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서를 어떻게 대할 것이며, 특히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율법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율법, 특히 도덕적 율법들(Moral Laws)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규범(Norm)인가? 십계명과 십일조 헌금 등의 율법들은 복음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유효한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한다. 글의 내용은 6부로 나누어 전재된다.
VI. 십일조 헌금과 복음적인 신앙
요즈음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헌금에 관한 논란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 헌금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제도는 이미 폐기되었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는 말씀을 인용하며, 성도들의 필수적인 의무로 십일조 헌금을 율법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십일조 헌금의 정신-필자 주) 행하고 저것도(십일조 헌금 그 자체-필자 주)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십일조 헌금을 드릴 때 돈이나 헌물만을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렸던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헌물 속에 헌신된 마음(즉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담아서 정성껏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십일조(Tithing)가 모세의 율법시대 이전에 이미 드려졌던 예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왕을 비롯한 이방의 왕들을 쳐부수고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부녀와 친척을 되찾아 왔을 때(창 14:16), 살렘 왕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그를 축복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아브람은 "그 얻은 것(전리품들-필자 주)에서 십분의 일"(창 14:20)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 모세 시대에 십일조 헌금이 이스라엘 백성의 율법으로 제정되어 레위인들의 생활과 성전예배 활동을 위해 사용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십일조 헌금들이 법제화되었습니다(레 27:30-34, 신 12:6, 14:22-29, 26:12 등).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필자는 성령의 강림(행 2장) 이후에는 율법으로서의 십일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효력을 상실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이 율법이기 때문에 법의 강요와 강제에 의해 의무적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는 것은 올바른 동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이 마음속에 용솟음치기 때문에, 자원하는 정신(voluntary spirit)과 즐거운 마음(pleasant heart)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서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을 규정한 것입니다. 최저기준을 정한 것이 법입니다.
저는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쳤을 때에는 턱걸이 테스트가 있었습니다. 턱걸이를 몇 개 했느냐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습니다. 그래서 수험생들은 철봉에 매달려 턱을 위로 끌어당겨 한 개라도 더 많이 턱걸이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행동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숙련된 체조선수는 철봉대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운동을 합니다. 철봉대 위에 발을 올려놓고 서기도 하고, 철봉대를 붙잡고 여러 번 360도 회전을 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돌기도 하고 뒤로 돌기도 합니다. 더 이상 철봉대는 매달려 몸부림치는 곳이 아닙니다. 숙련된 체조선수는 그 위에서 자유롭게 운동하며 즐기고 놉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유대인들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는 법을 지키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천국을 바라보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율법에 정해져 있는 헌물의 최저기준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물질뿐 아니라 생명까지 드려도 갚을 길이 없는 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지 않습니까? 율법적인 헌금이 아니라 복음적인 헌금을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된 삶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심한 환난과 가난 가운데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드렸던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알리고 있습니다(고후 8:1-5). 그들의 헌금은 율법적인 최저기준이었던 십일조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을 드릴 때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으로 후하게 연보를 드려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 9:6-8, 11-12).
(고후 8:1-5)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 9:6-8, 11-12)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철봉대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듯이 십일조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으로서의 십일조는 폐기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의 최저기준으로 삼아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러한 사랑의 증거를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만족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고, 영생을 얻게 되었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종국적으로는 천국이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만 드리며 만족하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이상을 드리는 것이 복음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찬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 헌금을 드리는 것에 만족할 수도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복음적인 신앙을 생활화해야 하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십일조 헌금을 능가하는 연보를 그 마음에 담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304장 3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