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장윤재 목사(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0:3-5, 로마서 6:1-4, 마가복음 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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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신약성서의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이런 웅장한 선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마가 1:1). 마치 창세기 1장 1절의 그 놀라운 선포를 듣는 것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를 선언한 마가복음은 바로 이어서 이사야 40장을 인용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이사야의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이사야 40:3). 왜 광야입니까? 왜 사막입니까? 왜 메시아는 광야와 사막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던 그 땅과 그 산과 그 호수를 직접 밟으니 영혼이 떨리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누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어디였냐'고. 저도 모르게 '광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도 있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갈릴리 호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골고다 언덕이 있는데 왜 하필 광야냐'고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누군가 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성지, 성지 중의 성지가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광야라고 대답할 겁니다.

'아득하게 너른 벌판'이라는 뜻의 광야(曠野, wilderness)는 성서에서 '거친 땅,' '거친 들,' '빈들,' '사막'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땅, 개간되지 않는 땅, 승냥이와 이리와 독수리와 타조가 서식하는 곳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곳은 황야(荒野)라고 해야 옳습니다.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식물이 거의 자랄 수 없으며 온통 돌투성이 황무지가 바로 광야입니다. 게다가 광야는 평지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던 유대광야를 차로 올랐는데, 그 가파른 길을 오르는 동안 여행자 모두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아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뼈도 못 추릴 깊은 계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왜 다윗이 광야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광야는 또한 '아골 골짝,' 즉 '고통의 골짝'으로도 불렸습니다. 찬송가에서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노래할 때의 바로 그 고통의 골짝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집트까지 자동차로 만 하루 길을 달리는 동안 저는 시내광야, 미디안광야, 바란광야, 수르광야 등 수많은 광야를 지나갔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돌과 모래밭뿐이었습니다. 마땅히 쉴 곳도, 물 한 모금 마실 데도 없는 사막과 같은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침묵과 고독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창가로 들어오는 광야는 그렇게 낯설고 먼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광야가 저에게 가장 인상 깊은 곳, 가장 감동적인 성지로 기억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저는 왜 광야가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궁금하여 성서를 다시 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그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곳이 어디였습니까? 그곳은 이름 모를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꿈속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사닥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또 하나님이 그가 누워 있는 땅을 그와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언약을 들은 후 외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야곱은 그 이름 모를 광야를 '벧엘'(Bethel),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창 28;19). 또한 모세에게 미디안광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이집트의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숨어 살던 좌절과 고독의 유배지였습니다. 그는 그 광야가 저주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만난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모세에게 저주스러웠던 미디안광야는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약속으로 인해 거룩한 땅, 즉 성지(聖地)가 되었습니다. 또한 호세아서를 보시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리라"(호 2:15)고 약속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서의 광야'는 우리에게 결코 낯설고 먼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단지 빈들, 황무지로만 보이는 광야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며, '거룩한 땅'이요, '희망의 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신약으로 가면 광야는 특별히 하나님의 새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이 누구였습니까? 그는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요한 1:23)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마가 1:4)를 베풀며 메시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그것을 이기심으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광야에서 그의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시면,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바울은 이후 혈육과 한 마디의 의논도 없이 곧바로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3년이 지나서야 예수님의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바울의 이 광야 칩거 3년이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첫 외국 선교사가 된 빌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시면 주의 사자가 부르심을 받은 빌립을 이렇게 인도합니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행 8:26). 이렇게 신약성서에서 광야 길은 새 역사를 여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는 길이었습니다.

광야를 다녀와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광야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습니다. 이육사의 <광야>가 떠올랐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조국 광복의 신념과 의지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항일 시인인 이육사의 <광야>에서 눈이 내리는 광야는 식민지 체제의 각박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례요한처럼 이 광야에서 '가난한 노래'를 부르며 우리에게 다가올 광복의 기운을 '백마 타고 오는 초인'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구약성서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emann)은 광야를 가리켜서 "Nothing-less-ness"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Nothing"은 '없음'을 뜻하고 "less"는 '~이 없는'이라는 뜻이니 모두 합하면 '없음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 됩니다. 번역가들은 이 말은 '아무 것도 없음의 자리'라고 번역하고 있더군요. 아무 것도 없기에 오히려 충만한 상태가 '없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불교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지요. '텅 비어 있음'을 뜻하는 '공'(空)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텅 빈 충만'을 의미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오히려 무한한 공간으로 이해됩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사실 한자로 광야는 넓을 '광'(廣)자를 쓸 수도 있지만 밝을 '광'(曠)자를 쓰기도 합니다. 넓을 광자에 해를 뜻하는 날 '일'(日)자를 더하면 그것이 '밝다,' '환하다,' 혹은 '비다,' '공허하다'는 뜻의 광자가 됩니다. 이육사는 자신의 시 <광야>에 이 이 밝을 광자를 썼습니다. 그렇다면 광야란 텅 비어 있기에 오히려 밝고 환한 곳입니다. 아무 것도 없기에 하나님의 현존과 계시가 충만한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셨을까요? 그리고 왜 메시아는 광야를 통해 우리에게 오실까요? 400년 간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건너는 데 단 4일이면 충분한 시내(Sinai)광야를 무려 40년이나 거쳐 갔습니다. 왜 그 긴 세월의 광야 생활이 필요했을까요? 400년을 넘게 남의 나라 종살이하게 되면 노예근성이 몸에 배게 됩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을 경험해도 아직도 식민지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근성을 그대로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결코 새 나라를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훈련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더 이상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그 광야 40년 훈련의 기록이 바로 구약성서의 민수기입니다. 구약성서의 4번 째 책인 민수기의 본래 이름은 「광야에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미드바르'(midbaar)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다바르'(dabaar)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다바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같은 단어에서 지성소(至聖所)를 뜻하는 또 다른 명사인 '드바르'(dbaar)도 나왔습니다. 왜 광야가 가장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텅 비었기에 거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원초적 기억입니다. 이스라엘의 언어에 각인된, 지울 수 없는 신앙의 가장 깊은 자국입니다. 광야는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 곧 청종(聽從)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곳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동안 저는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 정상에서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베두인족들의 안내를 따라 낙타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때 왜 베두인족들이 낙타가 오줌을 싸면 그것을 귀하게 받아 두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베두인족들은 낙타 오줌을 어디에 쓸까요? 물론, 마시지는 않습니다. 샴푸로 씁니다. 모래바람 때문에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가 끼는데 미끌미끌한 낙타 오줌을 바르면 모래를 쉽게 쓸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낙타 뒤를 따라 터벅터벅 시내광야를 걷다가 제가 특별한 감동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거친 돌밭을 뚫고 자라고 있던 잡초들 때문입니다. 키가 작고 볼품도 없으며 간간이 피어있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칠 들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척박한 땅에 피어있는 생명들이 너무 귀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뽑아 보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넓은 광야에 얼마 피어있지 않은 풀 가운데 하나를 뽑자니 마치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머리에서 흰머리가 났다고 그걸 뽑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풀을 뽑다가 크게 놀랐습니다. 먼저는 깊은 뿌리 때문이었습니다. 키가 5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풀이라 쉽게 뽑힐 줄 알았는데 뾰족한 돌을 가져와 한참을 파고 나서야 겨우 뿌리 끝이 보였습니다. 그 때 짙고 푸른 향기가 코를 찔렀습니다. 심심산천의 약초에서 나는 것과 같은 싱싱하고 상큼한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그 뿌리를 뜯어 먹고 사는 광야의 염소들을 한국의 성지순례자들이 최고의 보약으로 친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뽑아보니 더욱 놀랍게도 그 뿌리는 땅 위의 풀 부분보다 더 길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잔뿌리는 거의 없고 중심뿌리가 풀의 키보다 더 깊이 땅 속을 향해 힘차게 뻗어내려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머리에는 일본의 본사이(ぼんさい), 즉 분재(盆栽)가 떠올랐습니다.

일본에 본사이라는 게 있습니다. 큰 나무를 작게 축소하여 조그만 화분에 가꾸는 기술입니다. 일찍이 이어령 교수는 『축소지향적인 일본인』이라는 책에서 바로 이 본사이 정신이 일본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문화적 동력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컴퓨터를 처음 발명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지만 방 두 칸 크기의 컴퓨터를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박스에 축소시켜 트랜지스터라디오라는 걸 만들어 돈을 벌 발상을 한 것은 일본사람들 아니었습니까? 본사이를 영어로는 "dwarf tree" 그러니까 '난쟁이나무'라고 합니다. 본사이 기술을 사용하면 느티나무처럼 10미터 이상을 자라는 나무도 30-50센티미터의 난쟁이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소나무와 같이 큰 나무들도 하염없이 작은 난쟁이로 변신시키는 일본의 본사이 기술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본사이 기술의 핵심을 알고 나면 우리는 감탄은커녕 경악하게 됩니다.

본사이 기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중심뿌리' 곧 주근(主根, tap root)을 잘라 주고 밑둥을 철사 줄로 꽁꽁 묶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무는 나머지 '잔뿌리,' 곧 세근(細根, surface root)으로 겨우 목숨만 유지하게 살게 됩니다. 잔뿌리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표면적의 합계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성장에 필요한 양분과 수분을 충분히 빨아올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심뿌리가 잘린 나무는 성장은 꿈도 꾸지 못하고 - 마치 식물인간처럼 - 겨우 숨만 쉬며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사이 기술, 알고 보면 그것은 잔인한 식물학대입니다.

하지만 그 시내광야에서 본 이름 모를 작은 풀은 달랐습니다. 볼품은 없었지만 자기의 키보다 더 길고 튼튼한 중심뿌리로 거친 돌밭을 뚫고 들어가 억센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낮과 밤의 기온 차이로 생기는 이슬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 극한적인 조건 하에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싱그러운 생명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풀을 40년간 시내광야를 떠돌며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풀을 광야에서 구원의 새 삶을 시작한 야곱과 모세와 호세아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 역사를 시작한 세례요한과 바울과 빌립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그 작고 볼품없는 풀 앞에서 이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새 삶을 살려면, 진정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면 먼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광야에 자신의 중심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일주일은 반드시 온 가족이 광야로 들어가 천막생활을 하며 자기 조상들이 살았던 광야생활을 재현합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재충전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광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영적인 공간이 필요합니다.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털어내고 비우기 위해 우리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가난하고 순결하기 위해 우리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타성에 젖어 굳어진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우리는 광야로 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광야에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광야에서 히브리 노예들은 익숙하고 편리했던 이집트 생활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종으로 살았던 옛 습관을 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파라오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고기가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광야는 필수 코스였습니다.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광야는 불가피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빈들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어김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여분의 만나를 몰래 비축하는 것은 불신앙이었습니다. 다음날 썩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광야에서는 아무 것도 없기에 오직 눈을 들어 하늘만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기에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광야는 그렇게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가는 연단의 장소였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혹 지금 광야를 지나는 것과 같이 거칠고 힘든 인생길을 걷고 계십니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나를 왜 광야에 두셨을까요? 오늘 '공동의 기도'로 읽은 히즈윌(His Will)의 노래 가사 <광야를 지나며>를 다시 읽어봅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 어두운 밤을 왜 그리 길었는지 /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 광야 광야에 서있네. //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 주님 손 놓고는 /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 광야 광야에 서 있네. /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 광야 광야에 서 있네. /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 주님 앞에 내어놓고 /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 광야를 지나며."

시내광야에서 그 생명력 넘치는 들풀을 만난 날, 저는 광야가 너무 좋아 하룻밤 베두인족과 광야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한밤에 광야에 누웠습니다. 추울 줄 알았는데 낮 동안에 달궈진 모래밭이 온돌처럼 저를 포근히 감싸주었습니다. 그 위에 누워 밤하늘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전 암흑 같은 광야의 모래밭에 누워 하늘을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수천, 수만의 별들이 바로 내 코 위에 내려와 앉는 것이었습니다. 밤하늘에 다이아몬드 가루를 확 뿌린 것 같았습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쏟아져 내려오고 TV와 라디오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던 지구의 자전소리가 들렸습니다. 거기서 온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거기서 마치 찬송가의 가사처럼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와 같은 신비한 지경을 경험했습니다. 그곳이 광야였습니다. 하나님과 우주와 내가 합일(合一)되는 곳이 광야였습니다. 천지인(天地人)이 하나 되는 곳이 바로 광야였습니다.

광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시려 목자 같이 선한 우리의 메시아가 광야 길로 오십니다. 거기서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십시오.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시오.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에는 '오심'뿐만 아니라 '모험'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오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간절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광야 길로 오십니다. 이 주님을 맞이하러 광야로 나아가십시오. 하늘의 생명 빛이 이 땅에 당도하는 그 '없음이 없는 곳'을 향해 과감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018.12.16.)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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