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추기경이 속해 있는 한국 천주교 대표기구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아래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가 3.1운동 100주년에 발맞춰 낸 담화문 중 한 대목이다.
주교회의는 이번 담화에 천주교회가 일제 강점기 신도의 독립운동 참여를 막은 데 반성의 뜻을 담았다. 담화문을 더 살펴보자.
"조선 후기 한 세기에 걸친 혹독한 박해를 겪고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천주교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습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흑역사'를 고백하고 반성했지만, 개신교도 뒤지지 않는다. 1938년 9월 지금 장로교단의 전신이라 할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제27회 총회에선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뿐만 아니다. 4년 뒤인 1942년 제31회 총회에선 '창씨개명'과 '조선장로교' 이름을 단 전투기 헌납을 결의했다.
흑역사는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제주4.3사건, 5.16군사쿠데타, 유신 선포, 5.18광주민주항쟁, 5공화국 출범 등 한국 현대사는 유난히 요동쳤다. 개신교는 현대사의 변곡점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불의한 세력의 편에 섰다.
여기서 주목할 건 개신교 흑역사가 현재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정치권으로 눈 돌려 보자. 황교안 전 총리는 보수 야당인 자유한국당 당권을 노린다. 황 전 총리는 침례교단에 속한 전도사다. 정치권 안팎에선 황 전 총리의 정치적 기반이 이른바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극우 세력과 개신교 교회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요약하면 불의한 권력에 기생하는 유전자는 여전히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길 잃은 가톨릭 교회, 그럼에도....
가톨릭이라고 문제가 없지 않다. 올해는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약자의 친구를 자처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을 맞는 지금, 가톨릭은 어떤 모습인가? 가톨릭 교회엔 추기경이 두 명이 있어도, 존재감은 없다.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이 불의하게 권력을 휘둘러도 추기경은 침묵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세월호 유가족이 양보해야 한다"는 말로 시민사회의 공분을 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을 그리워 하는 정서는 지금 가톨릭 교회가 길을 잃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톨릭 교회 대표기구는 뜻 깊은 3.1절 10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죄책고백을 했다. 반면 개신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새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19일 "저는 오늘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주관하는 7대 종단지도자 모임을 단호히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천주교의 김희중 대주교(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대한불교조계종의 원행스님(조계종 총무원장), 기독교의 이홍정 목사(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총무), 원불교의 오도철 교정원장, 이정희 교령(천도교), 박우균 회장(민족종교협의회), 김영근 성균관장(유교) 등 7대 종단 종교인을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가졌는데, 전 목사는 이 간담회를 거부했다는 말이다.
"정부가 자신들이 주최하는 3.1절 집회를 통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건국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3.1절 역사를 왜곡하는 행사를 시도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게 전 목사가 내세운 이유였다. 그러나 정작 청와대는 한기총은 초청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청와대가 한기총을 초청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전 목사가 내세운 이유는 논란의 소지가 커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건국한 대한민국을 부정한다"는 전 목사의 주장엔 일제 식민지를 근대화로 포장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가 전 목사의 주장에 찬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특히 보수 개신교 전반에 전 목사의 역사관을 공유하는 목회자가 상당수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교회는 현대사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지만, 죄책고백의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개신교 교회는 4.19혁명 직후 반민주주의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이승만 정권에 부역했던 과거에 대해 회개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죄책고백을 거부했고, 5.16 혁명이 일어나자 군사정권이 내건 보수 반공 이념 뒤로 숨어 버렸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보수 개신교 교회는 죄책 고백 보다는 연합체를 꾸려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2016년에서 2017년까지 광장에서 타올랐던 촛불 이전 보수 개신교 교회는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리고 박근혜 탄핵 이후 지금까지 개신교 교회는 반정부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심지어 8.15 광복절엔 가해국인 일본을 용서하자는 주장까지 서슴치 않았다.
올해는 3.1운동 백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다. 100년 전인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절반이 넘는 16인이 개신교 쪽 인사였다. 그러나 이 자랑스런 역사는 과거로 남아 있을 뿐, 오히려 불의한 권력과 야합한 교회가 엄연히 주류로 군림하고 있다.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신교 교회에 바란다. 3.1운동을 맞는 뜻 깊은 이 해에 부디 죄책고백을 남기기 바란다. 기회는 한 번 놓치면 잡기 어렵다. 더구나 신자감소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설 자리마저 잃을 위험이 없지 않다.
가톨릭 교회를 참고사례 삼아 역사와 민족 앞에 무릎 꿇기 바란다. 예수께서도 간절히 바라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