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30. 여기 없는 이는 소용없다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 페레이로스(Ferreiros): 7시간30분 (2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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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를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동상이다. 이 순례자 동상은 끝없이 펼쳐지는 고지대 평야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지금껏 만나왔던 다른 어떤 순례자 동상보다 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느껴진다. 괜히 엄숙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동상의 모습을 마주하니 내 안의 어떤 숭고한 불꽃이 다시 점화가 된 듯하다.

까미노는 미팅의 천국이다. 물론 남녀가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만나게 되는 그런 즉석 만남의 미팅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다양한 만남(meeting)의 축제, 이것이 '길'이라는 뜻의 '까미노(Camino)'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이 길을 걸은 지 열흘 쯤 됐을 때였나? 땅만 보며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바로 앞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일본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던 그녀는 경상도 사투리가 매력적인 부산 아가씨 은경이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 우리는 아주 잠깐 함께 걸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눈 정도였다. 그 후로 길 위에서 스치듯 한 차례 더 만나긴 했는데,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무렵, 어느 작은 마을 Bar에서 은경이를 다시 만난 것이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세상 반가움에 소리를 질렀다. 그간의 안부를 묻자니, 계속 혼자 순례 중이던 그녀는 감기몸살 때문에 레온(leon)에서 3일 정도 쉬고 다시 힘을 내 걷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낯선 땅에서 혼자 아픔을 감내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시큰했다. 어쨌든 일행과 떨어져 혼자 걷고 있던 나는 이 우연을 잠시 끌어안아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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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하루의 순례를 마치고 편히 쉬는 가운데 먹는 음식들은 그야말로 JMT(존맛탱)이다. 스페인 오믈렛 토르티야(tortilla)와 시원한 맥주 한 잔, 담백한 빵 한 조각은 지친 몸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줌에 있어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오늘은 어찌 하늘의 기운이 수상하다. 구름이 잔뜩 낀 게 뭐라도 한바탕 쏟아 부울 기세다. 숲 속을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두둑 우두둑! 머지않아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은경이와 나는 숲을 벗어나기 전에 부랴부랴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계속 나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결국 폭우를 뚫고 계속 걷기로 결정한다. 까미노를 걸으며 맞는 두 번째 폭우다. 오늘은 사리아(Sarria)에서 묵을 생각이었는데, 비 때문에 너무 추운 나머지 쉼 없이 걸었고 그로 인해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 때 쉬지 못해 몹시 굶주린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추위와 끼니를 동시에 해결하기로 한다.

지구력이 좋은 은경이는 사리아를 지나 앞마을까지 더 나아갈 예정이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사리아까지만 걷고 쉴 계획이라고 말해두었는데, 어찌 이 마을에 멈춰서 자니 하루가 온전히 다 차지 않은 기분이다. 그런데 이럴 때가 참 난감하고 조심스러울 때이다. 상대는 오롯이 혼자만의 순례를 원하는지 그래서 함께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편함을 느끼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진다. 그런데 누구든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기 전까지 누가 그런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식당을 나오며 대충 그녀에게 더 걸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둘러댔고 그렇게 다음 마을로 함께 이동하게 됐다. 인연의 시간이 조금 더 연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리아를 지난 이후 자꾸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마음은 뭐지? 불편한 마음을 해소해야겠는데 방법이 뭘까? 생각이 많을 땐 단순함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측에 불과한 상대방의 생각을 혼자 그리지 않고 직접 물어보려 한다. 혹시 함께 걷는 게 불편하진 않느냐고, 혼자 걷고 싶은 것은 아닌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며 미소를 보내왔다. 이제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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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가끔 이렇게 순례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표지판도 있다. 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이럴 땐 자연스레 몸의 반응에 자신을 맡긴 채 걸음을 내딛으면 된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회하더라도 모든 길은 한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말이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이미 그녀와 나는 걷는 내내 비를 맞아 체력이 바닥이다. 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주고 싶어 페레이로스(Ferreiros)의 한 알베르게에 묵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이 마을에 도착하자 그녀는 지치긴 했지만 계획한 일정이 있어 더 걷겠다고 말한다. 대단한 체력이다. 나는 이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으면 뒤따라가겠다고 말해두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함께 있다가 혼자가 되면 더 외로운 법! 오히려 페레이로스의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길 바랐지만 아주 자리가 넉넉하다. 짐을 풀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는데,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자신은 다음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았고 이제 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은경이는 한국에 약혼한 남자친구가 있는 여장부 같은 친구이다. 아마 그녀에게 현재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군지 한 명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분명 약혼한 남자친구가 상위에 랭크 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소중함'과 '현실의 소중함'을 비교해 봤을 때, 지금 당장 소중한 사람은 과연 누가 되겠는지를 말이다. 만약 그녀가 순례 중에 다치거나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누가 그녀의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한 글쟁이 정희진씨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참 곱씹을만하다. 그녀는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게 자기 자신, 가족, 연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해줄 사람은 거리에서 처음 만난이라도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여기 없는 이'는 소용이 없다. 그런데 심지어 나는 돌아가신 엄마, 죽은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고 답한 것이다."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2014, p.107)

내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마음에 한 가득이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사람은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지금, 여기' 이곳에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익명의 사람 혹은 새롭게 출현한 타자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옆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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