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기고] 진실과 사랑 - 역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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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이활 기자)
대한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주임사제인 주낙현 신부(가운데)

광주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보내는 19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인 주낙현 신부는 '진실과 사랑 - 역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이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 5.18의 의미를 되새겼다.

주 신부는 "5.18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작은 구호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라면서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고,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聖事)의 시공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최근 언론을 통해 잇따르는 5.18관련 새로운 증언을 언급하면서 "억지로 진실을 왜곡한 이들은 뉘우쳐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동안 무지로 외면한 이들은 이제 진실 앞에 예를 표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주 신부 강론 전문이다.

진실과 사랑 - 역사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말씀 본문 - 사도 11:1~8 / 묵시 21:1~6 / 요한 13:31~35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성전에 오르면서, 성당 화단에 핀 꽃들에 눈길을 주셨는지요? 성당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그 향기를 품은 바람이 참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사람들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이 생명력이 완연한 지난 열흘 사이에, 우리는 사랑하는 교우 두 분을 하느님께 돌려보내드려야 했습니다. 겸손하고 온화하게 하느님을 섬기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떠나보내는 우리의 슬픔은 컸지만, 그분들이 남기신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이 땅에서 남은 삶을 이어가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랑만 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짧다는 작은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주간에 우리는 꽃처럼 예쁜 신부와 신랑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간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싱그러운 봄의 신부는 사랑 가득한 미소를 품었습니다. 기쁨에 넘치는 신랑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희망의 웃음을 환하게 담았습니다. 우리 모두 누리는 사랑과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며 바라보는 생명 속에는 이처럼 슬픔과 눈물, 기쁨과 축복이 버무려 있습니다.
신앙인은 삶의 두 측면을 공정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쪽에만 몰두하지 않고, 삶에 담긴 아픔과 사랑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 진실 안에서 부활의 약속과 희망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화사한 5월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와 슬픔을 생각하려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은 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큰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야속하고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 진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더욱 잔인한 세월의 주인공이 되고 말리라는 경고입니다.

어제 5월 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의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외부 불순 세력의 선동과 개입으로 이뤄졌다는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이미 조사가 끝나서 확인된 사실마저도 세월의 망각을 이용해서 호도하려는 사람들마저 있습니다. 그러나 정권의 성격과 관계없이, 지난 20년 동안 정부의 공식 기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려고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제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눈앞에서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 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밥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피를 나누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히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공식 기록 속에서 저는 신비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1980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그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5.18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작은 구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聖事)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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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SBS)
최근 5.18과 관련 헬기사격, 편의대 투입 5.18관련 새로운 증언들이 언론을 통해 잇따르고 있다.

39년이 흐른 뒤, 아직 감춰진 일에 관한 진실의 말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증언 자체로도 큰 충격이었지만, 저는 증언자의 소회가 마음 아팠습니다. "나이 들어 ‘저승길이 문밖'인 처지에서 더는 진실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39년 동안 진실의 입을 다물고 살아간 것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 참으로 쓰라렸습니다.

진실은 자유의 공간에서 우리에게 정의와 평화를 선사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감추는 일은 자기 안에서 가시가 되고 결국 독침이 됩니다. 이를 뚫고 나온 진실이 사람과 사회, 역사와 미래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죄악에 가담한 이들은 참회하며 용서를 구할 일입니다. 억지로 진실을 왜곡한 이들은 뉘우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동안 무지로 외면한 이들은 이제 진실 앞에 예를 표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실에 담긴 슬픔과 상처를 넘어, 봄의 부활이 선사하는 사랑과 희망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 묵시록 본문에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새 땅의 기쁨을 누리고, 새 하늘로 오르는 희망의 환시가 뚜렷합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레고 들뜬 사랑 뒤에는 실패와 상처의 어둠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 직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에 이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고 "나간 뒤에" 오늘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사랑'과 상호 신뢰를 확인하고 다짐하며 스승의 몸과 피를 나누었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은 곧바로 배신의 길을 걷습니다. 뒤이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진실을 부인할 참이었습니다.

자신의 복락을 바라며 우리가 다짐하는 신앙은 흔들리기 쉽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휩싸여 맹세하는 사랑은 연약합니다. 아무리 굳센 믿음으로 함께한 성찬례 경험도 서로 배신하는 실패를 막지 못합니다. 거친 풍파가 넘실대는 삶 속에서 우리가 약속하는 사랑의 감정은 흔들리고 상처 입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걷는 실패와 상처를 아십니다. 이 처지를 아신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위로입니다. 배신과 실패, 그 상처와 아픔을 이겨 나가는 신앙의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역사의 진실을 받아들이며,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향해 보여주는 존중과 사랑입니다. 진실에 바탕을 두어 ‘서로 사랑하는 일'만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자기만 바라봐 달라는 사랑은 ‘옛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오히려 배신을 낳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사랑'은 자기 사랑이 가져온 실패와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역사의 상처에 눈을 돌릴 때 일어납니다. 낯선 타인과 더불어 ‘서로 사랑'을 마련할 때 일어납니다. 이때라야 새로운 생명과 삶이 하늘과 땅, 역사와 미래에 펼쳐진다는 약속이 이뤄집니다.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사랑을 이뤄내는 조건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보십시오.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사실, 배신은 거대한 결단이 아닙니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만인 일입니다. 누가 죽든 말든 눈을 감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한 실패라는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했던 역사의 기억 ‘안'에 머물렀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통회를 안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떠올리기 괴로웠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부인과 배신을 괴롭도록 벼리고 담금질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사랑을 자기 몸으로 재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실패와 절망 속에서 우리는 자주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자나 깨나 여전히 그리워하고 몸부림치며 서로에게 머물며 위로하고 서로 격려합니다. 이 위로와 격려의 사랑 안에서 더 넓은 세계의 진실에 마음 여는 일이 신앙입니다. 헤아리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낯선 타인처럼 서 있는 진실을 초대하며, 서로 용서를 빌고, 서로 용서하는 용기를 북돋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조금씩 우리 안에 펼쳐집니다. 이제 우리는 아픔과 상처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는 부활의 백성입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진실과 사랑 위에서 서로 용서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아멘.

이활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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