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32. 미지를 향해 부르는 음성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 아르주아(Arzua): 7시간30분 (29.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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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크고 작은 마을을 지나고 또 ‘따로 또 함께’를 반복하며 걷는 이 길은 모든 순간이 축복이다. 물론 사람은 경험과 깨달음의 간극이 넓기에 매 순간이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아무리 고된 시간도, 아무리 힘겨운 순간도 지나고 나면 모두 기억에 남는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을 말이다.

며칠 전, 알베르게에서 저녁 식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일행들과 어설픈 요리 준비로 한창이었는데, 우리 사이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한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동양인의 얼굴이었지만 한국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동네 마트에 갔을 때도 잠시 마주쳤는데, 홀로 저녁 식사준비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1인 순례자 같았다. 숏컷에 온몸으로 스페인 햇살을 품어 안고 걷던 그녀는 바로 캐나다에서 온 제이미(jamie)였다. 결국, 첫 만남 때는 대화 한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그녀는 내 마음속 매력적인 여성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오늘 순례길의 지면 높낮이는 보통이 아니었다. 가파른 언덕 하나를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몸뚱이와 함께 막 넘어선 순간이었다. 언덕을 오르자마자 마주한 Bar에서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이다. 사람이 땀을 좀 흘리거나 호흡이 높아지면 긴장감이 낮아지는 것 같다.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긴 것이다. 큰 주저함 없이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 인사를 건넨다.

우호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는 다행히 낯선 순례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 조심스레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더니, 역시 그녀는 국적이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난 혼혈의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분이시고 어머니는 한국 분이신데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가 사용하는 모국어 때문에 어느 정도 한국말을 알아들을 순 있다고 했다. 혹시 내가 영어로 말하는 게 불편하다면 한국말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안의 청개구리 심보가 굳이 영어를 쓰라고 부추겼다. 회화를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해서, 어설프지만 영어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뭐든 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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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 중 넓은 평야를 만나면 그곳에 누워 실컷 잠이나 자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만큼 힘들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아름다워서이기도 하다. 소유보다 존재가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이 아름다움을 오래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은 괜찮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제이미는 참 묘한 분위기를 가진 친구다. 야성적 매력을 지닌 그녀는 밴쿠버의 도시 생활에 지쳤고 또 산티아고에서 순례자들의 영혼을 치유한다는 한 첼리스트에게 감명을 받은 후 여러 계기가 겹쳐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을 두고 그녀와 얘기를 나누던 중, 나는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 나서도 여기서 끝내지 않고 여행을 더 지속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래도 되는 상황이냐고 물었다. 나는 안 될 것 없는 상황인데, 정말 그래도 되는지 계속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Do it! Do it! Do it!"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기회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것이기에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얼핏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 친구였지만 굉장히 용기 있고 멋진 심장을 가진 친구임에는 분명했다.

문득 나를 산티아고로 떠나게 했던 책 중 하나였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이야기 가운데, 조르바는 심장은 멈춘 채 머리로만 안다고 말하는 두목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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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이재훈 목사)
▲나의 소중한 벗이자 진주(경남 진주)가 낳은 순례자 현정이가 그린 우리의 얼굴이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자기만의 목적을 가진 채 우리는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다. 우연이 인연이 됨을 알려준 나의 친구들이다.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아오며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해'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어떤 기준과 판단들은 각자의 삶의 경험에서 온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전해준 이야기였거나 또는 모두 그렇게 사는 것 같기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것들이 많을 거라 생각된다. 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그러나 난 자연스러움을 매우 긍정하지만, 無성찰적 자연스러움은 독이 되기도 함을 느낀다.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 악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말은 여기에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이제 목적지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길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있길 기대해본다. 머리가 아닌 팔과 가슴으로 이해하기 위해 여기서 멈춰 서지 않기로 한다. 좀 더 낯선 경험을 마주함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하길 바라는 기대감이 내 가슴 속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큰 깨달음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접어두고자 한다. 나를 위한 크고 비밀스러운 선물이 준비되어 있을 거란 기대는 내려놓고, 그저 낯설고 불확실한 그 무엇에 나를 내맡겨보기로 한다. 제이미와 나눈 그 짧은 대화의 순간, 내가 탄 배의 항로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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