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과 누가는 두 가지 종류의 방언을 말하고 있는가?
VIII. 고린도전서 14장에서의 방언
b. 14장 6-12절
(고전 14:6-12)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어떠한 메시지라도 그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LT방언들(언어들, 외국어들)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통역이 되지 않으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언급된 "방언"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단어 즉 LT방언입니다: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LT방언, glossais lalon, speaking with tongues-KJV, speak in tongues-NIV)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도 바울은 통역 없이 행해지는 LT방언도 교회를 위해서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UT방언을 큰 소리로 중얼거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이 개역개정 한글성경에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배열되어 있습니다. 보다 명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영어성경들(NIV, KJV)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어순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와 같이 읽으면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로) LT방언을 말한다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Now, brothers, if I come to you and speak in tongues, what good will I be to you, unless I bring you some revelation or knowledge or prophecy or word of instruction?-NIV)"
"통역되지 않은 외국어들"(LT방언들, glossai)과 "중얼중얼하는 소리"(UT방언, glossa)의 공통점은 이해될 수 있는 의사소통(intelligible communication)이 되지를 않아 주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교회공동체의 덕을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악기소리에 비유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고전 14:7-9)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an uncertain sound-KJV, not a clear call-NIV)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except ye utter by the tongue words easy to be understood-KJV, Unless you speak intelligible words with your tongue-NIV)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for ye shall speak into the air-KJV)."
피리(pipe)나 거문고(harp) 등 악기가 소리를 내더라도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즉 멜로디나 음의 높낮이(음계, 音階)나 음의 길고 짧음(장단, 長短)이나 음의 느림과 빠름(완급, 緩急)이나 음의 강약(强弱) 등의 음악적 질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거문고를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나팔이 "삐익삐익" 하고 아무런 메시지가 없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낸다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나팔소리는 병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매우 중요한 신호소리입니다. 기상과 취침의 나팔소리도 있고, 식사시간을 알려주는 나팔소리도 있고, 전쟁터에서는 돌격하라는 명령의 메시지를 담은 나팔소리도 있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는 나팔소리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팔을 부는 병사가 뜻과 메시지가 담긴 알아들을 수 있는(intelligible) 나팔소리를 발해야만이, 그것을 들은 다른 병사들이 그 소리의 메시지와 명령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통역되지 않은 LT방언들"과 특히 "알아들을 수 없는 UT방언"은 그 소리의 의미를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전 14:9b, 'esesthe gar eis 'aera lalountes, for ye shall speak into the air-KJV, you will just be speaking into the air-NIV)는 표현은, 그것은 허공(虛空, 공기 空氣, air)에다 말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바울은 비꼬며 조롱하는듯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의 무용성(無用性, futility)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리의 뜻과 메시지를 주위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게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고전 14:10-11)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There are, it may be, so many voices in the world, and none of them is without significance-KJV, Undoubtedly there are all sorts of languages in the world, yet none of them is without meaning-NIV),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a barbarian-KJV, a foreigner-NIV)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a barbarian, a foreigner)이 되리니."
여기서 사용된 "외국인"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야만인"(barbaros, barbarian, 野蠻人)이라는 뜻입니다. "통역되지 않은 LT방언"(언어 혹은 외국어)을 말하는 것이나 "중얼거리는 UT방언" 소리를 내는 것은, 문명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야만인들(barbarians)끼리 서로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씨부리기만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듣는 사람들이 그 뜻과 그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하는 자들이나 듣는 자들이 모두 야만인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역되지 않은 LT방언들"이나 "뜻 모를 소리를 내는 UT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야만인"(barbaros, barbarian)이라는 말은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지역에서 살던 문명화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자기들을 향해서 침공해 내려온 북유럽의 험악한 사람들(The Barbarians)이 지껄이는 말들이 "바르, 바르"(bar, bar)라고 들렸기 때문에 붙혀진 명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의 결론으로서 "영적인 것들"(pneumaton, spiritual gifts, 영적인 은사들,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들이 풍성하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12절의 말씀은 4절의 말씀처럼 은사들은 자기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pros ten oikodomen tes 'ekklesias, to the edifying of the church-KJV, gifts that build up the church-NIV) 주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더 반복해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에 덕을 세워 줄 수 있는 은사들이 너희에게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재형과 명령형으로 표현된 "구하라"(zeteo, seek)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습관적으로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통역되지 않은 LT방언들"이나 "통역될 수 없는 UT방언"을 삼가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LT방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intelligible language,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제대로 통역이 된다면 예언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알아들을 수 없는(unintelligible, 이해될 수 없는) UT방언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을뿐 아니라, 통역 자체가 불가능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회에 전혀 덕을 세워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중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muttering, unintelligible) UT방언은 성령의 은사로 간주조차 하고 있지 않습니다.
c. 14장 13-19절
(고전 14:13-19)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과 30절에서 방언통역의 은사에 관해서 언급했습니다:
(고전 12:10)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allo de ermeneia glosson,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KJV).
(고전 12:30)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me pantes glossais lalousin; me pantes diermeneuousin, do all speak with tongues? do all interpret?-KJV).
이 두 구절들에서 말하는 방언은 복수형으로서 LT방언들(glosson, glossais, 외국어들, 언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통역이 가능한 방언은 LT방언이고, UT방언은 말하는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중얼중얼하며 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통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통역함"(ermeneia)이라는 말은 hermeneutics(성서해석학)이라는 영어단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 13절과 14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단수형인 UT방언입니다:
(고전 14:13-14)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여기에서도 바울은 또 다시 풍자적인 어법(비꼬는 표현, sarcastic expression, satire)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내에서도 오늘날처럼 통역 자체가 불가능한 UT방언을 말해 놓고는 그것을 통역하여 말하는 일부 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3절과 14절을 사도 바울의 속뜻을 풀어서 해설을 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전 14:13-14) "그러므로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나는 그것이 통역될 수 없는 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굳이 통역을 하려고 한다면) 통역하기를 기도해 봐라. (그러한 UT방언 기도는 내가 하지도 않지만), 내가 만일 UT방언으로 기도한다고 한다면 (UT방언을 말하는 너희가 주장하듯이)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그렇지만, de, but) 나의 마음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해."
바울은 영(pneuma, spirit)과 마음(nous, understanding, mind, reason)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UT방언자들을 비꼬면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장 2절에서도 이미 말씀했습니다:
(고전 14:2) "왜냐하면(gar, for, 왜 그런가 하면)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방언이란 원래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어떤 신(神, a god)에게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 (UT방언을 말하는 자는) 알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영으로 신비한 것을 말한다고 (주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