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추모의 설교] 뒤를 돌아보는 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편집자주- 이화여대 인문학부 교수이자 대학교회 담임으로 있는 장윤재 목사가 지난 6일 주일예배 설교에서 이화의 큰 스승이었으며 기독교의 지성과 양심이었던 서광선 목사와 이어령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이화여대 대학교회의 동의를 얻어 설교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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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출애굽기 14:10-14, 히브리서 10:19-25, 누가복음 9:57-62

설교문

천자문(千字文)은 한자를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 편찬한 교재입니다. 옛날엔 이렇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르 황(黃)."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은 이걸 이렇게 바꿔 불렀습니다.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렁지 딸딸 긁어서 너는 한 그릇 나는 두 그릇." 배는 고프지, 글자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 이어령 박사의 인생 첫 질문은 바로 '검을 현(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대여섯 살 무렵입니다. 한문을 가르치시는 훈장님에게 소년 이어령은 질문했습니다. "훈장님, 왜 하늘이 검나요? 제가 보기엔 파란데요?" 당돌한 질문에 할 말을 잃은 훈장님은 답변 대신 호통을 쳤고, 그길로 이어령은 서당에서 쫓겨났습니다.

'분명 하늘은 파랗게 보이는데 왜 검다고 할까'라는 물음은 이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40대가 되어서야 풀렸습니다. 주역(周易)과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통해 검을 '흑(黑)'자가 물리적인 검은 색이라면 검을 '현(玄)'은 추상적인 검은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남쪽이 생명을 상징하는 '양(陽)'이라면 북쪽은 남쪽과 대비해 생명이 죽은 곳이라고 여겨, 옛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에 묻힌다' 혹은 '하늘나라로 간다'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말한 것입니다.

돌아가신 고 이어령 선생님은 자신의 삶이 평생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교우님들의 자녀가 이상한 질문을 하면 호통을 치지 마시고 '천재구나' 생각하시며 잘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제2의 이어령, 제3의 이어령이 나올 것입니다. 이화의 큰 스승,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님이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검을 '현(玄)'에는 '가물가물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물가물하다는 조금 멀리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희미하여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이 글자는 누에고치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형상입니다. 실로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누에고치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움직입니다. 고치 안에 있는 누에가 미세하게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의 관찰력이 참으로 뛰어납니다. 누에고치는 그 가물가물한 시간, 즉 '현(玄)의 시간'을 넘어 비로소 나방으로 탄생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물가물한 것이 분명해지려면 '현(玄)의 시간'을 넘어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두려워 서성이면, 뒤를 돌아보고 망설이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린도전서 13:13) 했습니다. 신앙은 '현(玄)의 시간'을 넘어서는 용기입니다. 옛것은 없어지고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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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과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본지 전 회장)

서광선 선생님은 2022년 새해를 맞으며 기독교 인터넷 신문 <베리타스>에 "송 구 영 신 (送 舊 迎 新)"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셨습니다. "송 구 영 신", 한 글자씩 일부러 띄어 쓰셨습니다. 이화의 큰 스승이시며 이 시대 기독교의 지성과 양심, 그리고 평화운동가인 서광선 선생님께서도 하나님의 품 안에 영원한 평화와 안식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날 우리는 두 큰 별을 잃었습니다. 저는 기독교학과의 서광선 교수님, 그리고 국문학과의 이어령 교수님과 같은 대학자들을 둔 이화의 인문대학 교수로 봉직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예롭게 생각합니다. 서광선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2022년 새해 연하장을 받았는데, 한자로 네 글자, 송구영신(送舊迎新) 그리고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송구영신'이라는 한문은 중국에서는 '송고영신'(送故迎新)이라고 적고, 관가에서 구관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신임 사또를 영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송구영신'이라고 하여 옛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보다 넓게 사용한다. 사람만이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낡은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낡은 것은 보내버리고 새것을 맞이한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 그런데 '송구영신'을 말로는 하기 쉽고, 글씨로 써서 대문짝이 붙이는 일은 쉽지만 행동에 옮기기란 말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약속한 지 3일도 못 돼서 옛날 하던 식으로 지난해까지 하던 나쁘거나 해로운 생활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오던 대로, 하던 대로, 편하게(?) 살게 된다. / 올해 2022년 3월 9일에는 앞으로 5년 동안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게 되는 대통령을 선거하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우리 국민이 송구(送舊, 임기를 끝내는 대통령을 보내고), 영신(迎新, 새 대통령을 맞이)하게 된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정권교체'의 구호와 깃발을 높이 들고, 새 정치, 새 세상, 새 역사를 만들겠다고 소리 지르고 있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듣고 보면... 낡은 정치... 옛날 하던 대로 돌려놓겠다고 한다. 이건 송구영신이 아니라 영고영구(迎故迎舊), 옛날 하던 대로를 환영하고, 옛것을 환영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 여당 대통령 후보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다고 소리 지르지만, 무엇을, 어떤 정책을 보내버리고, 어떤 새로운 정책을 세우고 정치를 하겠다는 것인지, 한마디로 무엇이 새롭고, 어떻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 송구 -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세계적인, 세기적인 역병을 보내버릴 수 있는가? 그리고 영신 - 새로운 생태친화적인, 죽어가는 자연과 지구라는 행성을 다시 살리고 새로운 자연세(自然世)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 송구 - 열전과 냉전의 낡은 역사를 청산하고, 영신 - 평화로운 지구촌에서 평화롭게 살게 되고, 핵무기와 핵탄두와 핵전함과 핵잠수함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두 손 들고 환영할 수 있겠는가? 새해에는 정말, 우리 한반도에서... 전쟁과 평화의 '송구영신'이 우리 눈앞에 전개될 것인가? ... / 근 하 신 년 (謹 賀 新 年), 송 구 영 신 (送 舊 迎 新) - 맑은 정신, 새로운 마음으로 호랑이의 새해를 맞이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된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를 읽어봅니다. 새해가 되면 꼭 부르곤 하는 우리 찬송가 554장의 가사로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거친 상공에, / 저 흐르는 구름, 차가운 빛에 울려 퍼져라, / 이 해는 오늘 밤 사라져 간다. /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이 해를 보내라. / 낡은 것 울려 보내고 새로운 것을 울려 맞아라. / 거짓을 울려 보내고 진실을 울려 맞아라. / 부자의 빈자의 반목을 울려 보내고 / 만민을 위한 구제책을 울려 맞아라. / 울려 보내라 서서히 죽어 가는 명분을 / 그리고 케케묵은 당파 싸움을. / 울려 보내라 결핍과 근심과 죄악을, / 시대의 불신과 냉혹함을. / 울려 맞아라,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 울려 맞아라, 다 함께 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장영희 선생의 해설처럼,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하나도 다른 게 없는 똑같은 하루입니다. 그래도 새해가 되면 새로운 시작에 가슴 설레고 희망이 솟구칩니다. 마치 이제까지의 불운과 실수, 슬픔을 다 떨쳐버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힘들고 버거운 지난 난들이지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모든 거짓과 반목과 불신을 역사 속으로 보내고 우렁찬 종소리와 함께 내 마음에도 종을 울려 진리와 정의와 선을 맞아들입니다. (장영희, 『다시, 봄』 중에서) 송구-영신합니다.

이스라엘은 늘 주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렸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 혹 홍해 앞에 장막을 쳤을 때의 일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출애굽기 14장)의 보도입니다. 바로가 마음이 변하여 육백 대의 병거와 정예군을 동원하여 뒤따라와 곧바로 진격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모세에게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우리가 이럴 줄 알고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더냐?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출애굽기 14:11-12, 공동번역) 강렬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무어라 말했습니까? 성서에 기록된 그의 명설교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3-14)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도, 자기들을 쫓아온 이집트의 군사들이 다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애굽 땅을 뒤돌아보고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스라엘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출애굽 후 둘째 달 십오일이 되었습니다. 성서를 보니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3)

힘든 마음은 이해합니다.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힘들다고 과거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미화하는 건 지나칩니다. 압제자 바로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는 건 듣고 있기 힘듭니다.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다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늘에서 비와 같이 양식을 내려 광야의 백성이 일용할 것을 날마다 풍족히 거두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마가 1:15)라고 선포하시며,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누가 9:57-62)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길을 가실 때 어떤 사람이 무작정 다가와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큰소리칩니다. 예수님은 열정은 있으나 사려가 깊지 못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두 번째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먼저 "나를 따르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자비하게 들립니다. 그 당시 죽은 친족의 장례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두 번째 사람의 말뜻을 간파하셨습니다. 그의 속뜻은 '나는 나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친은 아직 정정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 핑계치 말라는 단호한 경고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청하는 세 번째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지금 누가는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를 부를 때의 이야기를 청중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나선 엘리사가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단호하십니다. 사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구라도 밭을 가는 사람은 앞의 소나 말이 이끄는 쟁기를 바라보고 거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어깨너머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절대로 밭이랑을 곧게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각이 과거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표어는 '후퇴!'가 아니라 '전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번째의 사람에게는 '따르라'라든가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히브리서 10:19-25)도 우리에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새로운 살 길"을 따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으나 이 신앙을 떠나 옛 유대교 신앙으로 되돌아가려는 시험을 받고 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의 이름이 '히브리서', 곧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도 그 까닭입니다. 이 편지가 쓰일 때는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해서 매년 속죄 제사가 드려지고 있던 시기입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대규모의 희생 제사는 히브리인들에게 자부심이었고 그들의 삶과 신앙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성전 중심의 세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십자가의 속죄를 믿고 살아가던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사와 성전 중심의 신앙체계로 회귀하려는 유혹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 '출애굽' 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하며 거꾸로 애굽으로 되돌아가자는 '환애굽'을 외치다 광야에서 다 쓰러져 죽은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더 이상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여셨음을 강조합니다. 자기 몸을 찢은 십자가 위에서 "한 영원한 제사"(히브리서 10:12)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소의 휘장을 찢고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 생명의 길을 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자고 권고합니다.

미국의 대표적 흑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의 시 <어머니가 아들에게>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246년의 노예제도(slavery)와 또다시 100년의 인종분리정책(segregation)을 경험한 아마리카 대륙에서 한 흑인 어머니가 흑인 아들에게 주는 말입니다. "아들아, 내 말 좀 들어보렴. /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다. / 거기엔 압정도 널려 있고 / 나무 가시들과 / 부러진 널빤지 조각들, /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도 많은 / 맨바닥이었단다. / 그렇지만 쉬지 않고 / 열심히 올라왔다. / 층계참에 다다르면 / 모퉁이 돌아가며 / 때로는 불도 없이 캄캄한 / 어둠 속을 갔다. / 그러니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 사는 게 좀 어렵다고 /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 여기서 넘어지지 말아라. / 얘야, 난 지금도 가고 있단다. /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는데도."

고 장영희 교수가 해설하는 대로, 흑인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이 어머니의 삶은 그 누구보다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시밭 헤치고 어둠 속을 더듬으며 층계를 올라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의연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매일 계단을 올라갑니다. 인생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우리의 계단도 찬란한 크리스털 수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올라가면서 걸핏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고, 모퉁이 돌기 전 층계참에 앉아 마냥 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쉬지 않고 삶의 계단을 앞장서 올라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디선가 "얘야, 사는 게 좀 어렵다고 주저앉지 말아라"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에서 울리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장영희의 염미시산책) 축복』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종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누에고치가 나방으로 변하는 '현(玄)의 시간'입니다. 수난의 길을 걸으며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께서 우리를 이 길로 부르십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며 앞으로 나아오라 부르십니다. 홍해 앞에서 쫓아오는 이집트의 정예군사 앞에 공포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외쳤습니다. 종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송구영신! 찬송가 가사처럼, "옛것은 울려 보내고 새것을 맞아들[입시다]. 시기와 분쟁 옛 생각 모두 울려 보내고 순결한 삶과 새 맘을 다 함께 맞아들[입시다]. 그 흉한 질병 고통과 또 한이 없는 탐욕과 전쟁을 울려 보내고 평화를 맞아들[입시다]. 기쁨과 넓은 사랑과 참 자유 행복 누리게 이 땅의 어둠 보내고 주 예수 맞아 들[입시다.]."(찬송가 554장)

기도합시다. 오늘의 공동기도, 존 웨슬리의 <순례자의 기도>입니다. "오 주님, / 당신께로 향한 우리의 전진이 / 그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게 하소서. / 이 세상의 위험한 미로에서 / 이 땅에서의 우리 순례의 모든 과정에서 / 당신의 거룩하신 명령이 / 우리의 지도(地圖)가 되게 하시고 / 당신의 거룩하신 생명이 / 우리의 안내자가 되게 하소서."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과 저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시고 영원한 생명과 진리와 자유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집의 대제사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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