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김기홍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마라
그대는 담을 쌓아 보았는가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워
균형 잡는 세상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마라
돌담을 쌓다 보면 알게 되리니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음을
시인(1957- )은 모난 돌멩이처럼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쓰기는 했지만, 생업으로는 노동을 했고, 그 과정에 모난 돌멩이처럼 "마음대로 차지[는]" 경우를 당하기도 했다. 그 경우에 대해 울분을 토하거나 항변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오히려 그는 모난 돌멩이로도 빈 곳을 채우며 담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하찮은 돌멩이 같은 존재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자존감을 보호할 핵심적인 방책을 소유한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세상이라는 담의 균형을 위해 공동체 의식이 필요함을 계몽하고 있기도 하다. 모난 돌멩이 같은 존재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세상의 균형을 잡아준다. 각기 다른 개체가 서로 조화할 때 공동체는 균형을 이루며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그는 화평의 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길가에는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가 있을 수 있다. 공동체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 외형적으로 왜소할 수 있고, 성격이 모났거나, 가시적인 영향력이 미미할 때 비록 모가 나지 않더라도 모난 양 발길질을 당한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해서 발로 차버리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관행처럼 벌어지는 일에 대해 제동을 건다. 그런 돌도 "마음대로 차지 마라." 마음대로 찬다는 것은 차는 사람이 그 돌을 마음대로 하찮게 보았기 때문인데 바로 그 "마음대로"에 이의를 제기하며 금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마음대로"란 전혀 객관적 고려 없이 주관적인 판단, 혹은, 편견을 따르는 태도이다.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상대방을 단정하는 것은 자신의 기준을 절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 구성원들이 모두 각자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삼으니 화합과 협력의 기조는 형성될 수 없다. 이 상태에서는 상대방을 "모난 돌멩이"로 여기며, 행동상으로나 심정적으로 그 돌멩이를 발길에 걸리는 대로 차버린다. 소통 자체가 어렵게 된다.
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을 돌담을 쌓는 행위에 비긴다. 개인이 자기의 담을 쌓을 때나 협력하여 담을 쌓는 경우에도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워/ 균형 잡는 세상"을 만든다. 개인이 자기 나름으로 균형을 잡든, 공동체가 협력하여 균형을 잡든, 담을 구성하는 요소들끼리의 소통은 필수적이다. 큰 돌이 기운 곳에 작은 돌을 끼우고 둥근 것이 빠진 데 모난 돌을 넣고 낮은 곳에 두꺼운 돌로 괴며 받치고 틈을 메우는 것이 소통이다. 구성 요소들끼리의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공동체라는 담은 균형을 잡게 된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함께 담을 쌓는 경우에는 균형을 기대하기가 더 쉽다. 협력 자체가 소통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함께 담을 쌓는 과정에 큰 돌, 작은 돌, 둥근 것, 모난 돌, 두꺼운 돌 등을 보게 되고, 큰 돌이 기울기도 하고 둥근 돌들은 그 사이의 틈을 메워야 하며 두꺼운 돌이 항상 중심에 있지 않고 낮은 곳을 받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담에 균형을 잡으려면 다양한 쓸모가 작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담을 쌓는 데 이처럼 다양한 자원이 모조리 동원되니까 자기가 어떤 모습이든 그 담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자동적인 앎이 아니라 소통의 노력을 요구한다.
소통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받치고 틈 메워" 가시적 형체를 완성하는 절차라 할 수 있다. 절차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질서와 조화가 강제된 상태에서는 우리가 소통을 연상하지 않는 반면에, 다양한 돌들이 자발적으로 "받치고 틈 메워/ 균형 잡는" 작업은 반드시 소통을 거친다. 그때는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않는다. 뒹구는 돌도 "받치고 틈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돌담을 쌓다 보면 알게 되리니" 그렇게 공동체로서 협력할 때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소통하려고 노력하면 외형상으로는 분별되지 않는 구성원 각자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소중함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누군가에게," 즉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이 균형 잡힌 세상의 그림이다.
균형 잡힌 담은 무너지지 않는다. 조화와 질서가 유지된다. 그 상태는 다양한 형태의 돌들이 서로 "받치고 틈 메워"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각각의 역량대로 "받치고 틈 메[우는]" 소통을 거칠 때 공동체가 균형을 잡는다.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이다. 그분이 탄생하신 날 밤에 천사들이 무엇이라 찬양했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했다. 그분은 인간에게 평화를 주고자 오신 것이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그분은 스스로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가 되셨다. 일생 동안 그런 돌멩이들과 함께 "마음대로 차지[면서]" 함께 우셨다.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되셨고 둥근 것은 모난 돌로 괴고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되어 "받치고 틈 메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쌓아 올리셨다. 그렇게 몸소 돌멩이가 된 채 세상의 균형을 잡으심으로써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말 것을 이르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께 소중한 아들이듯이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분이 이루신 평화의 뜻이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