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반도 평화의 시각에서 본 북한 현대사(3)

구갑우 교수(북한대학원대학교)

지난 11월 23일, 9.19 남북군사합의가 사실상 파기됐다. 한반도에는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으며 또 다시 전쟁의 위기가 감돌고 있다. 위기의 순간이지만 근본으로 돌아가 남북관계, 특별히 북한 현대사를 찬찬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북한대학원의 구갑우 교수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에 "한반도 평화의 시각에서 본 북한 현대사"를 게재했다. 기사연 신승민 원장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3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주

6. 북한의 외교안보정책과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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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철원 노동당사. 철원은 한국전쟁 이전 북한 영토였고, 이에 북한은 노동당사를 지어 이 지역을 통치해 나갔다.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사는 집중 폭격을 받아 현재는 폐허만 남았다. 노동당사로 진입하는 계단도 많이 훼손됐는데, 이것은 미군 탱크가 진입을 시도하면서 야기된 흔적이다.

정전협상에서 북한은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군과 중국군의 철수를 의제화했다. 정전협정 4조 60항에 따라 1954년 4월 개최된 제네바 정치회담에서도 북한은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다시금 언급했다.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의 한국주둔이 정당화되었을 때, 북한에는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중국군의 철군에 대한 북중소의 합의는 1958년 2월경에 이루어졌다. 제기되는 질문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군 철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유다. 특히, 1957년 말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음에도 북한은 중국군 철수를 추진했다. 중국군 철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인 1958년 2월 초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한국에 핵무기를 도입한 것에 대해 항의한 바 있었다.

한국처럼 동맹조약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상황에서, 중국군 철수는 북의 안보를 훼손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1956년 중국과 소련의 내정간섭 때문에 북한 주둔 중국군을 철수시키고자 했고, 중국이 철군 이후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약속했기 때문에 중국군 철수에 합의했을 것이다. 중국은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군 주둔에 소요되는 비용 등을 고려하여 북한에서 철군하고자 했다.

중국군 철수 이후 북한의 대외정책에서는 세 방향이 주목의 대상이다.

첫째, 대남정책이다. 1960년 한국에서 4·19혁명이 발생하자, 1960년 8·15경축사에서 김일성은 완전한 통일 이전 단계인 "남북조선의 련방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남정책을 제시했다. 남북의 정부가 독자적 활동을 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하여 남북의 경제문화발전을 도모하자는 제안이었다. 만약 한국이 연방제를 수용할 수 없다면, 남북의 협력을 위한 "경제위원회"라도 조직하자고 했다. 마치 탈냉전·민주화 이후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1961년 5월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1962년 10월 선 군축 후 경제협력을 담은 연방제를 제시했다. 1970년대 초 남북대화 이후 통일의 과도단계로 '고려연방공화국'을 언급했던 북한은 1980년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는 통일의 최종단계로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제안했다.

둘째, 사회주의 강대국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다.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북한은 1961년 7월 소련, 중국과 "우호, 협조 및 호상 원조에 관한 조약"인 사실상의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외적 세력균형정책이자 등거리외교의 산물이었다. 조소조약에는 전쟁 발생 시 서로의 자동개입과 소련이 북한에게 사실상의 핵우산을 제공하는 내용이 담겼다. 조중조약에도 자동개입이 명기되었다. 두 조약에는 1954년 인도와 중국이 합의한 '평화공존 5원칙'인 영토보전과 주권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 가운데 일부가 들어갔다. 1972년 사회주의헌법에 명기된 것처럼, 북한은 대외관계에서 힘 관계의 비대칭에도 불구하고 담론으로는 "완전한 평등권과 자주권"을 추구하고자 했다. 1980년 조선로동당 6차 대회에서 북한은 외교정책의 기본이념을, "자주, 친선, 평화"로 구체화했다.

동맹과 같은 외적 세력균형정책을 통해 안보를 얻으려는 북한의 의도에는 1962년 10월 북한에서는 "까리브해위기"라고 부르는 '쿠바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내적 세력균형정책이 추가되었다. 소련이 쿠바와 협의 없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쿠바에 배치된 핵투발이 가능한 미사일을 철수시키자 북한은 소련이 자신에게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핵우산을 의심하게 된다. 미국과 베트남 전쟁의 확대도 북한의 정책전환에 한몫했다. 1962년 12월 "경제건설과 북방건설을 병진"하는 전략적 방침을 선택했다. 김정은 시대에 등장한 경제·핵 병진노선의 원형이 이 경제·국방 병진노선이었다. 김일성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이 병진노선은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을 수도 있지만 경제에는 부정적이었다.

셋째, 중립국 외교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최초의 유색인종 정상회의인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북한은 초대받지 못했지만, 반둥의 이념을 지지했다. 반둥회의 10주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를 정식화했다. 김일성은, 1967년 8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단결기구가 발행한 『트리콘티넨탈(Tricontinental)』 창간호에 "반제반미투쟁을 강화하자"를,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전사 한 돌을 기념하는 1968년 10월 트리콘티넨탈 8호에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위대한 반제혁명 위업은 필승불패이다"를 게재하기도 했다. 1975년 강대국 진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북한에서는 "쁠럭불가담운동"이라고 부르는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에 가입했다. 한국도 같은 해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부결되었다. 북한은 현재도 비동맹운동에 참여하며, 강대국과 약소국의 평등한 관계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나름의 '국제적 정의(justice)'의 개념을 그 회의에서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소련을 적으로 만들며 '암묵적 동맹'을 만들 즈음인 1970년대에 들어서 북한은 탈식민국가는 물론 서구 자본주의국가와도 관계개선을 도모하며 동시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제안들을 했다. 1973년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1974년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1975년 태국, 버마, 싱가포르 등과 수교했다. 이 가운데 스웨덴은 현재까지도 북한에 상주대표부를 유지하면서, 한반도문제의 '중재자'로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01년 유럽연합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수교할 때도 스웨덴은 중재자였다. 2019년 10월 한반도 평화과정이 교착되어 있을 때, 스웨덴은 수도인 스톡홀름 인근에서 북한과 미국의 협상을 열도록 중재했다. 스웨덴은 스위스와 함께 정전협정에 규정된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일원으로 유엔군 측이 지명한 국가였다. 공산군 측의 선택은, 폴란드와 체코였다.

1972년 1월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유산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를 의제화했다. 이때 평화협정의 주체는 남북이었다. 1971년 8월 분단 이후 첫 공식 남북대화로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고, 1972년 7월 남북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원칙으로 하는 통일방법에 합의했다. 그러나 통일을 빌미로 남북 모두 독재에 근접하는 개헌을 했다. 1972년 후반 한국의 유신헌법과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이 만들어졌다.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을 선 평화협정 후 주한미군 철수로 해석하며 반대의사를 밝혔다. 한국정부의 대안은 남북 불가침협정이었다. 1974년 북한은 한반도 평화협정의 주체를 북한과 미국으로 바꾸었다. 북한은 1973년 8월 경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미국과 접촉을 시도했고, 1974년 8월에는 '형제국' 루마니아를 통해 미국과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의 주체 문제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 평화과정에서 항상 쟁점이 되었던 사안이다. 한국이 평화협정 또는 평화체제를 의제화한 시점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유엔총회 연설을 하면서,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 체제'의 건설을 의제화했다. 지구적 수준에서 냉전 해체의 조짐이 보일 무렵 한국이 공세적으로 평화체제 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1989년 9월 한국정부는 북한의 연방제와 비슷한 '남북연합'(Korean Commonwealth)을 통일과정의 한 단계로 설정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했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남북연합 단계의 한 구성요소였다. 7·4남북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 가운데 민족대단결 대신 '민주'가 포함된 3원칙에 입각한 통일방안이었다.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여 흡수통일의 우려를 느끼는 북한과 남북 지역정부의 자율성을 높인 '느슨한 연방제'에 합의한 것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991년 남북은 남북관계를 특수관계로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했다. 2000년 6월 분단 이후 첫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공통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냉전이 해체될 즈음,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인 미중일소와 남북 사이의 교차승인이 의제로 상정되었다. 미국은 한국정부가 1988년 남북교류와 공산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담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라는 제목의 7·7선언을 발표하자 한국전쟁과 더불어 만들어진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미대화를 위한 기회의 창도 열리게 되었고, 북한은 1992년 1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고위급회담을 개최했다. 1990년부터는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졌지만, 북미, 북일 수교는 성사되지 못했다. 1992년 1월 러시아는 1961년에 체결된 북소동맹의 폐기의사를 전달했고, 한중수교로 북중동맹은 폐기되지 않았지만 북중관계는 악화의 길을 갔다.

비대칭적 교차승인이 이루어지면서 발생한 사건이 북한발 핵문제였다. 더불어 핵문제는 북한이 1990년대 중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 건국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와 겹쳐 있었다. 1991년 12월 남북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재개와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요구를 이유로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다. 1991년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철수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이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만든 동력들이었다.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로 1차 핵문제는 해결되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인 10월 북한과 미국은 '공동코뮤니케'를 통해 관 계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까지 합의했다. 그러나 2002년 10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다시금 핵문제가 부활했고, 북한은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을 다시 탈퇴했다. 2005년 남북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한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을 통해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다시금 평화과정은 좌초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2005년 2월 핵보유선언을 했고, 6자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했고,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던 시점인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했다. 북한이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핵확산금지조약 밖에서 벌인일이었다. 김정일 정권 하에서 북한은 비핵화와 평화체제 교환을 틀로 하는 협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핵능력을 제고하고자 했다. 남북관계 차원에서는, 핵문제에도 불구하고 2003년 6월부터 북한지역인 개성에 공업지구를 만드는 사업을 남북협력으로 착공했고, 2005년부터 한국 기업의 입주가 이루어졌다. 북한 국내적으로는,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선군시대의 경제건설로선"을 추진했다.

7. 김정은 시대의 북한: 한반도 평화과정의 종언까지

2008년 8월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후 북한은 다시금 권력승계를 제도화했다. 김정은은, 2010년 7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표자회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식적 후계자가 되었다. 2016년 판 조선통사 (하)는 김정일이 2009년부터, 사망 직전인 2011년 10월 8일, 12월 15일의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의 담화까지, 김정은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쓰고 있다.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2011년 12월 말 김정일 사망 직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는 김정은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군 분야에서 최고지도자 지위로부터 시작했다. 2012년 4월에는 당과 정(政)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주의는 김일성-김정일주의로 대체되었고, 김정일도 영원한 총비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이 되었다. 헌법을 개정하고 서문에 김정일의 업적으로 "핵보유국"이 되었음을 알렸다.

김정은 정권의 첫 공식적인 전략적 노선은 2013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채택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로선"이었다. 1962년 12월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연상하게 하는 선택이었다. 김정은 시대 북한이 선택한 경제발전전략은, 김정일 시대의 "정보산업혁명"을 계승한 "새 세기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성장, 독립채산제와 지배인경영책임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사실상 소농제도를 도입하는 포전담당책임제와 같은 경제제도의 개혁을 통한 성장, 경제개발구와 같은 특별지역에 외자유치를 통한 경제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새 경제발전전략의 선택은 정치체제의 정상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김정은은, 당, 정, 군에서 최고지도자에 오른 후, 2016년 6월 헌법의 개정을 통해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의 유물인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대체하고, 김정일의 흔적이 담긴 조선로동당 제1비서라는 직함을 거쳐 조선로동당 위원장에서 총비서로 가는 방식으로, 당과 국가를 '정상화'했다. 그리고 병진노선 선택 이전인 2013년 1월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인민대중제일주의"를 통치담론으로 내세웠다.

북한은 핵개발이 국방비를 추가 증액하지 않고도 전쟁억제력과 방위력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에 경제·핵 병진노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2년 북한이 미국과 합의한 2·29합의는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교환하는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의 틀을 재확 인하는 것이었지만, 같은 해 4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하면서 폐기되었다. 북한은 2013년 2월 플루토늄이 아닌 고농축우라늄을 사용하여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실현했다고 주장하는 3차 핵실험을 했고, 그 직후 경제·핵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2013년 4월에는 국내법을 통해 핵보유를 "영구화"했다. 경제·핵 병진노선의 이름으로, 내부 역량을 극대화하는 경제개혁과 핵능력 고도화가 같이 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김정은 정권이 경제발전전략의 하나로 선택한 경제개발구를 매개로 한 발전전략은 북한의 핵능력의 고도화와 함께 간 대북제재의 고도화로 사실상 실현불가능한 길이 되었다.

김정은 정권은 경제·핵 병진노선 채택 이후, 한국의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1월 수소탄 실험이라고 주장한 4차 핵실험, 2016년 9월 핵탄두 실험이라고 주장한 5차 핵실험을 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9월 수소탄 실험으로 알려진 6차 핵실험을 했다. 4차 핵실험 이후 인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는 남북협력의 상징인 개성공업지구를 폐쇄했다. 개성공업지구는 북한이 경제·핵 병진노선 발표를 하고 잠정폐쇄되기도 했었다. 북한은 2017년 11월 핵무기 운반 체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북한 특유의 핵무력 건설과정의 한 단계가 마무리되었다는 선언이었다. 다른 핵국가와 달리 북한은 최초 핵보유 선언부터 핵실험 및 핵무기 운반체 실험을 나름 자세히 공개하고 있다. 핵국가로 공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과정 공개다.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2018년 2월로 예정된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에 북한을 초청하고자 했다. 한국정부는 올림픽·패럴림픽 기간과 겹쳤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연기까지 밝혔다. 북한은 2015년 1월부터 미국에게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임시중지와 자신들의 핵·미사일실험의 임시중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2018년 1월 북한은 한국의 제안을 수용했고, 미국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연기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 한반도 평화과정이 재개되었다. 2018년 3월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두 사건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첫째, 정상회담에 대한 남북합의 이후 김정은은 전격 중국을 방문했다. 베이징을 경유해서 서울과 워싱턴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북한은 한반도 평화과정에 중국을 당사자로 소환했다. 2018년-2019년 한반도 평화과정 속에서 북한과 중국은 무려 5차례의 정상회담을 했다. 둘째, 2018년 4월 당 중앙위원회 회의를 통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한미가 연합군사훈련의 중단에 대한 북한의 대답이었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새 전략적 노선의 골자는 북한이 핵국가가 된 조건 하에서 비핵화를 핵군축으로 정의하고,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총력을 다 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핵군축 노선을 한미가 수용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이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남북이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교환에 동의하는 문서가 처음 만들어졌다. '군축'도 2018년 판문점선언의 핵심어였다. 한국전쟁을 끝내는 종전선언을 2018년 말까지 3자 남북미 또는 4자 남북미중이 하겠다는 마감설정을 한 모호한 합의도 이루어졌다. 판문점 선언에 따라 2018년 9월 기능적 협력의 조정을 수행하는 연합적 제도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에 만들어졌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역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북미관계의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의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는 군사분야합의서도 만들어졌다. 안보분야에서 연합적 제도인 '남북공동군사위원회' 설치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과거의 평화과정 처럼, 시민사회가 개입하는 기능적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위에서 아래로의 평화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업지구의 재개가 가능한가의 여부였다. 2019년 1월 북한은 김정은의 신년사를 통해,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 및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금지,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의 재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다자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개최된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었다. 북한은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수용하지 않았다.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정의에 대해서도 북미는 합의하지 못했다. 결국, 남북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교류의 전면화의 길로 가지 못했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이후인 2019년 3월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하겠다는 통보를 했다. 같은 해 4월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는 "자력갱생" 노선이 부활했고, 김정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한국에게 외세냐 민족이냐를 선택하라고 했다. 2019년 4월과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재개는 남북관계를 다시금 단절의 과거로 회귀하게끔 했다. 한국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재개에 동의했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핵·미사일실험의 중단과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교환하는 이른바 쌍중단을 위반한 것으로 해석했다.

2019년 6월 판문점에서는 한반도 평화과정의 불씨를 살리려는 남북미 정상회동이 개최되었다. 북한은 이 회동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 회동에서 김정은은 미국 대통령 트럼프에게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즈음 트럼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정은은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시도에 부정적 의견을 드러냈다. 2019년 10월 스웨덴에서 열린 북미 실무회담에서, 북한은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중단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를 다시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비핵화의 입구에서 대북제재를 완화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북미 실무협상도 결렬되면서 재개된 한반도 평화과정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2019년 12월 말 북한은 당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정면돌파"를 구호로 내세웠다. 북미관계는 "자력갱생과 제재와의 대결"로 정리했다. 한반도에 공고한 평화체제(peace-keeping mechanism)가 구축되기 전까지는 전략무기개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새롭게 만들어진 북한의 전략적 노선의 주요 내용은, 자력갱생, 핵억제력의 증가, 외교전선의 강화였다. 그러나 외교전선을 강화할 수 없는 사태가 도래했다. 북한은 2020년 1월 말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염을 일으킨다는 보도가 나오자 곧 국경을 봉쇄했다. 1월 30일 「로동신문」 보도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관리를 책임지는 "비상설중앙인민보건지도위원회"에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다. 선제적 국경봉쇄를 핵심으로 하는 북한형 '방역국가'(quarantine state)의 탄생이었다.

방역국가로 전환한 이후 한반도 평화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의 대외정책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남북관계에서 북한은 대화재개 신호에도 불구하고 대남 무시정책을 지속했다. 2020년 3월 한국정부가 남북 보건협력을 제안하면서도 북한의 초대형방사포 발사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자, 김여정이 직접 나서서 한국정부가 "동족보다 동맹"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20년 6월 북한이탈주민 단체가 북한에 현찰 1달러가 든 대북전단을 보내자 북한은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대변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한국을 적으로 규정하며 판문점 선언의 성과인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철폐하겠다고 했고, 결국 6월 16일 연합적 평화의 길의 상징이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둘째, 북미관계도 단절로 갔다. 2019년 12월 미국의 대북정책에 따라 핵억제력 "강화의 폭과심도"를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2020년 미국이 대통령선거 국면에 접어들며 미국정부가 북한에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친서정치도 2019년 8월이 마지막이었다.

셋째, 북한이 한반도 평화과정에서 소환한 관여자였던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자력갱생과 핵억제력 강화 노선으로 회귀하기 전인 2019년 12월 중순 한반도 비핵화, 대북제재의 완화와 6자회담의 재개가 담긴 결의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다. 특히 2000년대 중반 6자회담의 실무그룹 가운데 "평화와 안보 메커니즘"의 의장국가였던 러시아는 북한에게 안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6자회담이 재가동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19년 4월 김정은과 푸틴의 북러정상회담에서, 푸틴은 비핵화를 북한의 군축으로 정의하며, 사실상 북한을 핵국가로 인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중러의 결의안은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통과가 불가능했다. 북한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선제적 국경봉쇄를 선택하면서, 북중, 북러관계도 진전이 없게 되었다.

2021년 1월 개최된 조선로동당 8차 대회는 김정은 시대 북한이 추진했던 경제·핵 병진노선을 재검토하는 모임이었다. 무엇보다도 김정은은 직접 경제개발 5개년 전략의 목표가 "엄청나게 미달"되었음을 인정했다. 핵국가는 되었지만 경제적 실패를 초래한 경제·핵 병진노선이었다. 경제노선과 관련하여 기술혁신에 기초한 경제성장은 다시금 강조되었지만 외자주도의 경제개 발구 건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북한경제의 시장화 추세를 국가의 "주도적 역할, 조절통제력"의 회복을 통해 제어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다시금 경제계획으로 복귀하여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 경제노선의 골자였다. 자립경제의 토대를 보완하기 위한 대외경제활동의 필요는 인정했지만, 8차 당 대회에서 제시한 북한외교의 "제일사명"은 "존엄사수, 국위제고, 국익수호"였다. 국가이익보다는 국가위신에 우선을 두는 외교정책의 방향이었다. 대미정책에서는 "강대강 선대선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남정책에서는 한국이 제안한 보건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 관광 등을 비본질적 문제로 간주하며 첨단군사장비의 반입과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군비증강의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국가핵무력건설대업"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며 국가방위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핵억제력 강화를 "핵선제 및 보복타격능력"의 고도화로 정의하며, 다양한 핵운반체의 개발과 핵무기의 "소형경량화, 전술무기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전술핵무기는 한국과 일본에게 실질적 위협이 될 수 있다. 핵선제타격은, 2013년 4월핵보유국 지위를 국내법으로 만들 때 등장하지 않았던 표현이다. 8차 당 대회에서 앞으로 만들무기로, 다탄두미사일, 핵 잠수함, 전술핵무기, 초대형 핵탄두, 수중과 지상에서 고체연료를 사용하여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극초음속 미사일, 군사정찰위성을 거론했다. 이 무기들의 개발 및 공개 여부가 향후 주목의 대상이다. 사실상의 핵국가로서 비핵화도 핵군축도 아닌 전략적 억제력 강화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핵국가의 병진노선을 추구하면서도, 2021년 9월 한국정부가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의 중 간 단계로 '종전선언'을 제안하자 반응을 보였다. 1949년 체결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정전협정,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정전협정은 평화협정 안에 종전선언을 담고 있었지만, 비핵화와 평화 체제 협상이 함께 진행되는 한반도 상황을 고려하여 남북은 2018년 판문점 선언에서 종전선언을 하나의 단계로 만드는 것에 합의한 바 있었다.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은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응답했지만, 남북의 군비경쟁 속에서 자신들의 군사적 행동만을 "도발"로 규정하는 "이중 잣대"와 "적대시정책"의 철회가 선결조건이었다. 결국, 종전선언을 매개로 한반도 평화과정을 재점화하려는 시도는 2022년 1월 무산되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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