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UCLA 옥성득 교수(한국기독교사)가 "이승만 신화 작업이 지나치다"라며 5년 전 자신이 썼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댓글을 부탁한다"며 독자들의 반응을 유도했다.
옥 교수가 공유한 글에는 영화 <건국전쟁>을 제작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대표 이호 목사를 겨냥한 팩트 체크 내용이 담겨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이승만 전도사'를 자임하는 이호 목사의 이승만 미화와 역사 왜곡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이호 목사는 지난 2019년 뉴욕 프라미스교회에서 이승만을 "세기적인 위대한 전도자"로 칭송하며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옥 교수는 전했다.
"1899년 1월, 추운 겨울날 조선의 중죄수만 가두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회심한다. 조선의 양반 가운데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팔도에 예수 믿는 사람은 40명, 남자 가운데는 백정, 여자 가운데는 기생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 대접을 받는 양반 가운데 단 한명 이승만은 회심하고 가슴에 민족복음화의 꿈을 가진다. 예수 믿은 그날부터 이승만은 조선에 1백만 명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에 옥 교수는 "정말 이 연설자에게는 "이승만을 위한 이승만에 의한 이승만의" 한국 개신교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펙트 체크를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1898년 9월 북장로회 통계만 해도 예배처소 205개, 조직교회 24개, 세례교인 2,079명, 전교인 7,500명 등이었다. 또 백정 선교는 1894년에 본격화 되었고 1893년까지 북장로회에만 세례교인 236명이 있었다. 1899년까지 기생이 회심하고 교인이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도 옥 교수는 덧붙였다.
옥 교수는 특히 "최초의 양반 신자 두 명은 1893년 서울에서 나왔다며 "감리회의 경우는 최병헌(목사)으로 1888년부터 존스의 어학교사로 활동하다가 1893년 2월 8일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장로회의 경우는 무어의 전도인으로 활동한 한 씨로 1893년 세례를 받았다"고 전했다.
백만구령운동에 대해서는 "1909년 개성의 남감리회 선교사들의 "20만 명 전도운동"이 선교회 전체 연합운동으로 확산되면서 1910년에 전개되었다"고도 밝혔다.
옥 교수는 그러면서 "지나친 미화는 득보다 독이 된다. 한국교회 역사 왜곡은 이미 도를 넘었다"며 "어디서 고치기를 시작해야 할까 막막하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옥 교수는 "이승만의 전도자가 되려면 제대로 공부를 해서 강의를 하기 바란다"며 "목사의 이름으로 하려면 더 열심히 바로 공부해서 오도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루에 이승만 관련 책 500쪽 씩 여러 달 공부한 사람치고 너무 허술하다. 하루 5쪽을 읽어도 제대로 읽고 확인하는 작업이 더 중요할 것이다. 더 듣고 싶어도 듣기 어려운 강의다.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는 강의라면 다른 좋은 내용도 함께 신용을 잃게 된다. 청년 이승만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