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론을 민중 신학에 잇대어 민중신학 담론을 확장하는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김희헌 한신대 신학대학원 석좌교수는 「종교연구」 제84집 2호에 발표한 연구논문 <한국 민중론과 민중 신학: 강인철의 '민중 개념사' 연구를 매개로 한 몇 가지 토론>에서 '인류세'라는 총체적 파국 앞에서 민중 담론의 핵심 기의인 '주체와 저항'의 요소를 재구성하는 방식에 관해 모색했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한국 민중론의 역사와 내용을 요약한 뒤 여기서 도출되는 논제를 세 가지로 간추려서 각각 토론을 진행했다. 첫째로 지난 한 세대 가까이 민중 연구의 비평학적 패러다임으로 기능했던 탈근대주의 담론의 성격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의 의미를 재평가했으며 둘째로 생태적 전환의 과제를 담당할 '주체성'의 내용을 새롭게 설정했다. 또 마지막으로 '저항'의 성격과 동력을 신학적으로 해석해 민중 형성론의 관점에서 '영성'을 제안했다.
강인철에 따르면 지배자들의 언어로 포섭되거나 버려지기를 반복하던 민중 개념은 1989년부터 벌어진 현실 사회주의 붕괴 과정과 맞물려 정치권 또는 시민 운동에 흡수되었고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급진적 민중운동은 급속도로 붕괴했다. 동시에 대안적 민중론에 관한 탐색도 이뤄지던 시기였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중 개념을 재구성한 3세대 민중론의 다양한 특징을 소개했다. 첫째로 민중은 다중적 주체로 소개됐으며 둘째로 이중성과 혼종성이 강조됐다. 셋째로 혁명적 저항과 일상적 저항이 결합되었고 넷째로 근대적 주체를 상대화하는 탈신민주의적 주체로 부상했다. 다섯째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한 주체로 등장했으며 이 밖에 이질성과 다양성이 주목을 받았다.
이어 강인철의 민중론이 남긴 과제에 대해 김 교수는 "그것은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처요, 한국 민중론이 지닌 고유한 힘을 다시 펼쳐내는 작업일 것"이라며 "강인철의 평가에 주목한다면 그 작업은 민중 개념의 두 가지 핵심 기의인 '주체'와 '저항'을 재평가하는 작업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민중론에 다룰 주제들에 대해 고찰해 나갔다. 먼저 탈근대주의가 남긴 것으로. 보편성에 대한 관한 재고찰을 진행한 그는 서구 근대사상의 절대적 규범들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취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제기했다.
김 교수는 "이제는 일종의 공식이 되어 이성의 치열한 탐색을 거치지 않고도 비판이론으로서 작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이 사유체계는 도리어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깊어졌다"며 "이제는 해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한 '거대담론과의 전쟁'과는 다른 방향의 과제, 이를테면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보편성'을 확보가히 위한 투쟁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보편성을 중요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보편적 질서(신자유주의 세계체제)로 인해 고통당하는 민중 현실이 간과되는 담론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라며 "민중론은 실제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실질적인 대처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민중신학은, 성서 속의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고 체제에서 배제당했지만, 성서는 그들을 향한 윤리적 보편성을 기조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며 "이런 '보편적 지향'은 민중 현실에 대한 끈질긴 책임을 낳는다. 탈근대주의 담론이 '지배와 억압'의 해체만이 아니라 '주체와 저항'의 해체까지 수반한 것이라면, 오늘의 민중론은 그 이론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어 "해체주의는 근대를 극복할 '탈근대'(post-modern)라기보다는 근대의 문제를 심화한 '첨-근대'(most-modern)라고 비평한 그리핀(David Ray Griffin)의 평가는 옳다"라며 "이글턴이 보았듯이 보편성은 '지구적 실재의 구조'이며 그 구조에 관한 탈근대적 성찰의 핵심은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 사실은 정치 신학이 추구하는 저항의 연대를 구축하는 활동의 근거요, 더 나아가 기후붕괴 시대를 초래한 근대적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기획의 출발점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보편'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실질적 '절대 다수성'이다. 신자유주의적 지구 체제의 배타적 수혜자인 1%에 맞선 99%의 저항과 투쟁은 '보편'의 의미를 얻기 충분하다"며 "이 저항과 투쟁은 단지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관계를 뒤바꾸는 대결적 정치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구현해가는 실험이다"라고 덧붙였다.
민중 주체론에 대한 토론거리도 나눴다. 김 교수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본 민중신학의 민중 주체론은 단지 정치 권력의 역학관계만이 아니라, 구원의 '사명'과 관련된 신학적 인식을 담고 있었다"며 "이점에서 민중 주체론은 서구의 근대적 주체론과 다를 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정치 주체에 관한 기표였던 '인민'이나 '시민'과도 다른 특징을 지녔다"고 했다.
또 " 민중신학의 주체론은 학문적 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 운동의 실천 그리고 종교적 영성과 결합하여 형성되었기에 다면적 역동성을 지닌다"며 "따라서 '탈식민주의'의 피지배 담론과 거리낌 없이 호환되면서도, '서발턴' 담론이 지닌 세속적⋅수동적 색채보다는 더욱 종교적⋅능동적 요소를 포괄하는 성격을 지닌다"고 했다.
'민중 메시아론'과 같은 고유하고 역동적인 담론으로 민중신학이 발전한 바탕에는 안병무의 '사건론'과 서남동의 '합류론'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관계론(비이원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그는 "이러한 성격은 최근 정치철학에서 유행하는 '메시아적 주체'에 관한 문제의식을 선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 담론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유기체적 생태주의 지평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인류세를 맞이해 인간의 주체성은 거부될 것이 아니라 변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시기 계급 갈등에 착안하여 형성된 주체성은 "생산과 생산의 결실을 분배하는 문제만을 중심으로 지난 두 세기의 역사를 조직"하였고, "지구의 물질적 조건이 갖는 한계"에 대해 눈 감았지만, 앞으로는 "생산의 확대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지구 환경의 유지를 우선시 하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할 것이다. 민중 주체론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인간은 자연 세계와 연결된 일부이기에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지만,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책임"은 여전히 남는다"며 "여기에서 민중 주체론의 필요성과 역할이 분명해진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민중 주체 형성을 민중 영성에 잇대어 전환 시기 민중의 저항의 의미를 새롭게 고찰했다. 김 교수는 "'영성'이라는 말이 종교적 색채를 띠지만, 인간은 행위의 효능만이 아니라 정신의 깊이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영성'이라는 말이 '저항'의 의미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여기서 말하는 '영성'은 '저항의 동력' 가운데 주체의 각성과 성숙을 일컫는다. 달리 말하면, 즉자적 민중에서 대자적 민중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관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민중론이 추구해온 저항과 변혁 역시 더욱 깊어져야 한다. 이전에는 민중이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그 '마음의 지형'에 관한 관심이 커진 듯하다"며 "개인이든 사회든 외면적 형상과 내면적 형상을 지니며, 그 형성의 성격과 방향은 같지 않다"고 했다.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정치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이 지배 위계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의 민중론이 억압적 위계에 관한 저항만이 아니라 포괄적 성장 위계에 관한 대처도 중요하다고 본다"며 " 전환을 일으키는 상상력(想像力)과 파상력(破像力),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그려내는 힘과 존재하는 체제의 환각성을 드러내는 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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