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이 살았던 시대의 조선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너무나 다르다. 당시 조선은 식민지였고, 외국에서 들어온 책 한 권과 신학 서적 하나를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오늘은 인터넷만 열면 세계 어느 교회의 예배와 설교도 볼 수 있고, 해외 유명 신학자의 강의와 저서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졌는데 한국교회의 신앙은 얼마나 주체적으로 변했을까. 우리는 여전히 남의 기독교에 시선이 향한다. 미국의 대형교회의 목회 모델을 배우고, 유럽의 신학적 흐름을 소개받으며, 해외에서 유행하는 예배와 집회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물론 배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로부터 배운 것은 결코 적지 않다. 성서 번역과 교육, 신학교육과 교회제도, 병원과 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서구 선교사들과 교회가 한국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분명히 컸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까지 그들의 역할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배우는 것과 의존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 시작된다.
서구 기독교가 곧 기독교는 아니다
기독교는 서구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예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의 무대는 오늘날의 유럽과 미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유럽과 미국을 거치며 거대한 문명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한국에 전해진 개신교 역시 서구의 신학과 교회제도, 예배문화와 함께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착각이 생길 수 있었다. 서구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모습과 기독교 자체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방식이면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서구 신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표현이면 더 훌륭한 신학처럼 받아들이며, 해외에서 성공한 교회 모델이면 우리도 따라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문화의 차이를 놓치는 일이다. 복음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소유물이 아니다. 복음이 특정한 문화 속에서 전해지고 표현될 수는 있지만, 그 문화 자체가 복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교신이 말한 '조선산 기독교'를 오늘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서구 기독교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성서의 진리를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와 삶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살아내자는 것이었다. 성서가 중심에 있고, 그 성서를 살아내는 사람이 자신의 현실에 서는 것. 그것이 중요한 차이였다.
우리는 왜 남의 기독교를 부러워하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남의 기독교를 부러워하는가. 아니, 어쩌면 '부러워한다'기보다 남의 기독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남이 이미 만들어 놓은 답은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함에 있어서 삶의 자리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씨름하는 일보다, 누군가 이미 정리해 놓은 교리와 신학의 체계가 내놓은 답을 받아들이는 데 더 익숙한 것은 아닐까.
교리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교리와 신학은 우리가 믿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교리가 삶의 질문보다 앞서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내 삶에 던져진 질문에 성서로 답하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답을 내 삶에 끼워 맞추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질문보다 앞서 주어진 대답은 나의 삶에서 나온 대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대답이 과연 내 삶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있을까.
김교신이 고민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성서를 읽고 이미 정해진 답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성서 앞에 가져가고 그 말씀과 씨름하는 것. 그에게 신앙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답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서 앞에 직접 서는 일이었다.
새로운 예배 형식이 필요하면 해외 교회의 사례를 가져오면 된다.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이 필요하면 성공한 교회의 모델을 연구하면 된다. 신앙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면 유명한 신학자의 책을 찾아보면 된다. 이미 누군가가 고민했고, 이미 누군가가 답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질문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고, 성서를 다시 읽고,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교신이 걸었던 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 교회와 얼마나 비슷한가"가 아니었다. "성서가 지금 이 땅에서 무엇을 요구하는가"였다.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신앙인은 더 이상 남의 기독교를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
몸은 한국에 있는데 신앙은 다른 곳에 있다면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한국에서 살아간다. 직장도 한국에 있고, 자녀도 한국의 학교에 다닌다. 집값과 전세 문제를 경험하고, 입시 경쟁을 마주하며, 청년 실업과 저출생, 고령화와 돌봄의 문제를 함께 살아간다. 정치적 갈등과 세대 갈등도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신앙의 언어만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때가 있다.
교회에서는 사랑과 섬김을 이야기하지만 직장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 성경공부에서는 정의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부당함 앞에서는 침묵할 수도 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돈과 집과 학벌과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위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앙이 삶의 자리까지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성서와 삶이 서로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김교신에게 성서는 현실을 떠나게 만드는 책이 아니었다. 성서를 읽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현실을 더 깊이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본다는 뜻인가.
한국적인 것이 모두 옳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는 피해야 한다. '조선산 기독교'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한국교회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교회에는 분명히 개혁해야 할 모습이 있다. 권위주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지나친 성장주의와 경쟁주의가 신앙의 언어를 대신하기도 했다. 교회의 규모와 건물, 헌금과 직분이 신앙의 척도처럼 오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적인 것을 무조건 되찾자는 주장은 김교신의 문제의식과도 거리가 있다. 김교신이 말하는 주체성은 "우리 것이 최고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서구에서 온 것도 성서 앞에 세워야 하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도 성서 앞에 세워야 한다. 미국에서 온 신앙문화도 물어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지켜온 교회 전통도 다시 물어야 한다. "이것이 정말 복음에 충실한가?" 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성은 배척이 아니라 분별이다. 배우지 않는 것이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우되 그것을 그대로 복붙하지 않는 것이 주체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주체적일 수 있다
김교신의 사상을 이해할 때 흥미로운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뢰적 주체성'이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어떻게 주체적일 수 있는가.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인간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종속될 필요가 없고, 특정한 제도나 문화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필요도 없다.
미국에서 왔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성서 앞에서 다시 물으면 된다.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인 신앙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질문은 조금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처럼 되는 것이 목표인가. 유럽교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묻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이제는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출생의 시대에 생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청년들이 미래를 포기하는 현실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노인이 늘어나는 사회에서 이웃과 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주거와 부동산이 삶을 흔드는 시대에 소유와 탐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경쟁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성공을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정치와 이념으로 사회가 갈라진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해 미국교회가 대신 답해줄 수 없다. 유럽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해외 교회나 신학자도 우리의 현실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성서 앞에서 직접 질문하고, 직접 씨름하고, 직접 살아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 다시 묻는 '조선산 기독교'의 의미일 것이다.
남의 기독교를 닮는 것보다 어려운 일
남의 것을 따라가는 일은 편하다. 이미 만들어진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일은 어렵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구의 전통에서 배워야 하고, 때로는 한국교회의 오래된 관행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촌스럽다고 여겼던 신앙의 유산을 다시 살펴야 할 때도 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분별력이다.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서구교회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성서 앞에 다시 서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오늘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84년이 지난 오늘, 다시 성서와 한국을 마주 놓다
김교신이 '조선산 기독교'를 이야기했던 시대의 조선은 세계의 변방이었다. 오늘 대한민국은 더 이상 그때의 조선이 아니다.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문화와 콘텐츠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도 과연 그런가. 수많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보내고, 세계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을 접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의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 질문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성의 문제다. 김교신이 오늘 우리 앞에 있다면 아마 한국교회가 미국교회보다 나은지를 묻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묻지 않을까. "너희는 지금 너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성서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는 성조기도, 태극기도, 어떤 교회의 이름도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서구의 것도 아니고 한국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역사와 땅과 현실 속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다시 마주 놓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텍스트로서의 성서와, 상황으로서의 한국. 그 둘이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 그랬을 때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인 신앙과 삶의 모순도 극복할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84년 전 김교신이 남긴 '조선산 기독교'라는 오래된 질문을 오늘 다시 읽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날의 성서조선이란
『성서조선』은 1942년에 멈췄다. 하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성서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인은 시대의 고통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죽어가는 것들만 보고 있는가,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을 발견하고 있는가? 「그날의 성서조선」은 이제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의 현장으로 가보려 한다. 과거의 글을 읽고,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나고, 오늘의 현장을 바라보고, 다시 성서 앞에 서보려고 한다. 그날의 질문이 오늘도 살아 있다면 그날의 성서조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