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서구를 통해 전해지면서 서구적 기독교의 형태가 곧 기독교의 표준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일부 선교사들에게서는 서구의 교회와 신앙 형태를 기준으로 삼는 태도가 드러났고, 이는 조선인 신자들 사이에서도 서구의 기독교를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한편, 조선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복음을 살아내려는 시도를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바라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비록 복음은 서구에서 들어왔어도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복음을 살아낼 사람들은 서구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조선땅에서의 기독교인은 조선산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김교신의 생각이었다. 이를 단순히 민족주의적 발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복음을 조선인의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내려고 했을 뿐이다.
다시말해 복음은 서구에서 왔지만, 그 복음을 받아들여 살아내야 할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땅에서, 조선의 언어로,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성서는 서구의 책이 아니다
김교신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그가 서구 기독교 전체를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성서를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성서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려고 했다. 김교신에게 중요한 것은 '서양에서 어떤 기독교가 만들어졌는가'보다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였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서구 기독교를 조선에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조선에'라는 방향으로 향했다. 연구자들은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를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즉 서구의 특정한 교회 형태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진리를 조선의 언어와 문화와 현실 속에서 살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신앙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선인은 언제나 '뒤늦게 따라가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성서를 직접 읽고 그 말씀을 자신의 역사와 삶 속에서 살아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 조선인은 더 이상 기독교의 주변부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복음을 살아내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김교신이 말한 '조선산 기독교'
'조선산'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조금 낯설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의외로 분명하다. 조선에서 나고, 조선에서 만들어지고, 조선에서 배출된 것. 김교신이 사용한 '조선산'이라는 표현을 바로 이러한 의미로 분석하면서, '조선산 기독교'를 영어로 표현하면 'Christianity born in Korea', 곧 '한국에서 태어난 기독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독교를 민족주의로 바꾸자는 발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김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것은 서구인의 전유물도 아니고, 또 일본인의 전유물도 아니며, 조선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복음은 그저 복음일 뿐이다. 그래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는 성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양과 같아야 옳다"는 생각
여기서 김교신의 문제의식은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가 많다. 서구 교회가 걸어온 길은 선진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구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지리적으로 변방에 놓인 동아시아의 한국교회가 자기 자리에서 고민하고 일구어낸 것은 낡고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
서구에서 사용하는 신학 용어와 예배 형식은 세련됐다고 여기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신앙의 모습은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한국적 신앙 형태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교회에도 반드시 버려야 할 모습이 있고, 끊임없이 개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우리는 정말 복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서구 교회의 기준을 복음의 기준으로 착각하고 있는가? 김교신이 던졌던 질문은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다.
한국교회만의 신앙은 정말 부끄러운 것인가
한국교회에는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신앙의 역사가 있다. 새벽기도가 있었고, 통성기도가 있었고, 금식기도가 있었으며, 성경을 붙들고 밤을 지새우던 사람들이 있었다. 가난과 전쟁과 독재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통해 사회를 일깨우는 한편, 복음 선포를 통해 눈부신 성장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만의 신앙문화가 형성됐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우리의 것을 너무 쉽게 부끄러워하는가?
한국적인 것은 촌스럽고, 서구적인 것은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열등하게 만들어버린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과 그것을 무조건 부끄러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체성이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아니다
김교신의 사상을 이해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가 말한 주체성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독립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구자들은 김교신의 '전적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관계성, 의뢰적 주체성, 직접성, 실천성을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여기에서 '의뢰적 주체성'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어떻게 주체적일 수 있는가.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김교신 사상의 독특한 부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서 다른 인간이나 제도나 국가나 문화에 무조건 종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의뢰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서구인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따르지 않고,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따르지 않고,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무조건 따르지도 않는다. 성서 앞에서 다시 묻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인 신앙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이 질문은 1940년대의 조선교회만을 향한 질문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말 주체적인가. 우리는 한국교회만의 신앙적 유산을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서구 교회의 신학과 예배와 문화를 가져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좋은 신학이 있다면 배워야 하고, 건강한 교회 제도가 있다면 참고해야 한다. 그러나 배우는 것과 종속되는 것은 다르다. 배우는 사람은 자기 발로 선다. 종속된 사람은 끊임없이 남의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조선산 기독교'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한국적 전통을 성경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서구에서 온 신학과 전통이라고 해서 모두 배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조선 사람이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열등한 것이 아니듯,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한 것도 아니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서구교회를 흉내 내는 것도 아니고, 한국적인 것을 무조건 신성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김교신이 꿈꾸었던 '조선산 기독교'의 중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서구의 기독교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한국적인 것을 무조건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서구 기독교와 같아야만 옳은가
김교신이 오늘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까? 아마도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를 닮았는지를 먼저 묻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묻지 않을까. 성서를 제대로 읽고 있는가?
전통과 역사가 오래된 서구교회를 배울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서구교회의 복사본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기독교를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신앙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한국교회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역사와 기억과 경험이 있다.
그것을 무조건 자랑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지워버릴 이유도 없다. 복음은 서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서구의 것도 아니고 한국의 것도 아니다. 복음은 삶의 자리에서 그 복음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것이다. 김교신이 '조선산 기독교'를 이야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날의 성서조선이란
『성서조선』은 1942년에 멈췄다. 하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성서는 오늘의 현실에서 무엇을 말하는가? 신앙인은 시대의 고통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죽어가는 것들만 보고 있는가,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을 발견하고 있는가? 「그날의 성서조선」은 이제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의 현장으로 가보려 한다. 과거의 글을 읽고,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나고, 오늘의 현장을 바라보고, 다시 성서 앞에 서보려고 한다. 그날의 질문이 오늘도 살아 있다면 그날의 성서조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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