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2. 유대나라의 비운
헤롯 왕조
에돔 출신 헤롯(Herod)이 BC 40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받고 BC 37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궁전을 짓고 그리고 성벽을 높이 쌓고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사해 근처 황막한 지대에 있는 높이 600미터가 되는 외딴 산 마사다에 유대인이 구축해놓았던 군대 보루를 개축하여 높이 6미터, 두께 3미터가 되는 튼튼한 성벽과 높이 25미터가 되는 30개의 탑을 세운 둘레 1킬로가 되는 튼튼한 성을 만들어서 안으로는 유대인의 반란과 밖으로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침범을 방어하려 하였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무마할 생각으로 유대의 마지막 왕조 마카비 정권의 하스몬(Hasmonean) 가문의 마리암네(Mariamne)를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마리암네의 아들 둘을 살해하였고, 나중에는 마리암네도 죽였다. 이것으로 그는 유대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친인척 되는 사람들도 많이 죽였고, 유능한 사람들도 많이 투옥하고 추방하였다. 이렇게 잔인하여 후에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되는 남아들도 쉽게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헤롯이 유대인들의 미움을 무마하고 호의를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세운 제2성전을 개축하는 일이었다. 그는 솔로몬이 지었던 제1성전의 기본 구조를 살렸다. BC 20년에 착공하여 10년이 걸려서 성전 본전의 중요한 부분을 지어 예배 드릴 수 있게 하였고, 계속 건축하여 AD 64년에 완공하였다. 본당 높이가 30미터, 기둥들의 높이는 15미터 이상이고 모든 석재는 순백색에 지붕은 황금으로 단장하여 실로 아름답고 웅장하였던 이 제3성전은 그러나 완공 5년 후에 예수의 예언대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헤롯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이 유대 나라를 분할통치하였다. 빌립(Philip)은 갈릴리 이북지방을, 아켈라우스(Archelaus)는 남쪽 지방을 맡았다가 통치 실패로 물러나고 사마리아와 유대가 로마의 영지가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을 맡은 안티파스(Antipas)는 세례 요한을 살해한 사람이었다.
유대지방에는 로마의 총독이 와서 통치하였는데 빌라도(Pontius Pilate)가 AD 26년에 부임하였다. 헤롯대왕의 아내 마리암네가 낳은 아들에게서 난 아그리파(Agrippa) 1세가가 로마의 황제 칼리굴라(Caligula)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왕이 되었고 유대인들은 그가 유대인 혈통이므로 환영하였고 아그리파도 유대인들의 호의를 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을 때 그는 예수의 제자이며 요한의 형인 야고보를 처형하였다(AD 42). 아그리파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연소하여 통치 능력이 없어서 로마정부는 다시 총독을 보내어 유대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펠릭스(Felix)와 페스투스(Festus)가 이어서 통치하였고 사도 바울이 이들에게서 심문을 받은 후 로마로 호송되어 갔던 것이다.
유대전쟁
유대인들의 내란과 소요는 로마정권의 골칫거리였다. 유대에서는 잦은 반정부 소요와 내란이 일어났는데,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 거주지에서도 일어났다. 이들은 두 가지 이유로 소요를 일으켰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이후 메시아로 자처한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과, 유대의 로마 총독들의 폭정과 실정에 반발한 것이었다. 이 같은 소요는 주로 열심당원들에 의하여 일어났다.
빌라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강요에 못 이겨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했으나 예루살렘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을 만들려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그만둔 일이 있었고, 성전 제사의 제물이 될 짐승을 사기 위하여 성전에 비치된 돈을 들고 나와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만들었다가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대와 소요를 야기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66년에는 유대의 총독 플로루스(Florus)가 유대인 3,000명 이상을 죽인 일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유대인들의 독립전쟁에 대한 기록을 그의 저서 「유대인 전쟁」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이집트에 살고 있던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에 들어와 3만 명 이상의 신도들을 모아서 유대 독립운동을 벌였다. 시리아의 로마총독 바루스는 만여 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가이사랴와 욥바와 리다에 살던 유대인 반란자들을 소탕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이때 예루살렘 시민은 로마군대와 싸워서 로마군인 5,300여 명과 기마병 480명을 죽였다. 이 사건이 생긴 해 즉 66년에 유대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네로 황제가 당시 유대 총독 베스파시안(Vespasian)에게 군대를 증파하여 먼저 갈릴리지방에 진격하게 하였다. 67년 봄에 베스파시안은 3만 5천 명의 병사와 기마병을 투입하여 유대의 바리새파 지도자 요세푸스가 편성한 유대인 보병 6만, 기마병 250명과 접전케 하였다. 요세푸스의 군인 대부분은 전투훈련이 빈약하였고 직업군인은 4,500명 정도였으므로 로마군대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 결과 갈릴리 지방의 많은 주민들이 죽었고 동네는 불타버렸으며 어린이와 여자들 2,500명이 노예가 되었다.
네로 황제가 죽은 후 로마에는 네 명의 황제가 난립하였다가 유대의 총독이었던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되어 로마로 떠나고 그의 아들 티투스(Titus)가 유대 총독이 되어 유대전쟁을 책임졌다. 이 때 유대의 열심당원들과 군인들이 이미 예루살렘에 들어가 시정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여 헤롯 왕가의 사람들과 친로마 지도자들을 투옥하거나 살해하였다. 또 온건파 사람들을 숙청하고 제사장들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 사이의 분열로 내란이 일어났지만 결국 티투스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는 합세할 수 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가이사랴와 사마리아 지방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와서 강력하게 무장되어 있던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고 격전 6개월 만에 예루살렘 성은 무너졌다. 이 때는 유대인의 유월절의 절기여서 예루살렘에는 100만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다. 포위된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식량이 없어 기아 상태였고 군량미도 떨어져서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식량을 색출하였다.
예루살렘 성은 70년 봄에 함락하였다. 성전은 완전히 화염에 싸였고 시내는 피의 바다가 되었으며 로마군대는 유대인 패잔군의 뒤를 따라가 섬멸하였다. 이 유대전쟁을 일으키고 지휘해왔던 요세푸스는 자기가 본대로 이 때의 상황의 일면을 기록하기를, “살육과 화염이 모든 것을 매장시켰다. 희생자 대부분은 죄 없는 약한 시민들이었고, 손에 무기를 쥐고 있지 않은 사람이 무차별 도살되었다. 성전의 제단 주위에는 시체가 산더미와 같았고 성전 아래에는 피가 강물을 만들었으며 시체가 그 피의 강물에 떠밀려 갔고 불을 끄려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살아남은 유대 병사들은 열심당원들과 함께 항쟁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절망적이었고 유대인 최후의 요새인 마사다가 74년에 함락하고 유대전쟁이 끝났다.
티투스는 승전 장군이 되어 로마로 돌아가면서 성전에 있던 일곱 촛대와 나팔과 몇 가지 성물과 함께 노예들을 데리고 나갔다. 티투스는 나중에 자기 부친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나 3년 반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 그리스도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는데,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뿔 열과 머리 일곱이 달린 두 마리 짐승 중 한 마리에 해당하는 폭군이고, 다른 한 마리는 그의 동생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한대로 그 아름답고 웅대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예루살렘 성과 함께 불에 타고 파괴되었는데 이 사건은 유대의 제사종교의 종말과 함께 유대인 민족사회의 해체와 유대인 유랑의 시작이 되었다. 유대교는 그 후로 랍비, 곧 율법선생이 지도하는 회당종교로만 살아남았고, 유대인 최고 지도기관인 산헤드린의 70인 회원은 단 한 명만 남고 다 전쟁 때 죽어 유대인 정치세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된 BC 63년 이후 헤롯대왕의 통치시대에 걸쳐 로마제국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살았는데 한때 로마시에만 5만이 넘게 있었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는 100만이 넘어 유대인들의 자치구가 생겨서 유대인 학교와 회당과 다른 기관들이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민족적, 종교적 자존심을 가지고 다른 민족, 부족과 화친하지 못하여 미움을 받아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유대인 배척 운동이 AD 3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나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로마에서도 추방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약 500만이었는데 유대 전체인구의 약 7%였다. 이들은 도시에마다 회당을 지어 유대인 사회의 거점으로 삼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부터 특별한 배려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세를 송금할 수 있었다.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축제에도 참여하였다. 할례제도 때문에 이방인들이 유대교인이 되기는 어려웠으나 할례 받지 않은 유대교 신자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는데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이 로마의 통치 아래 살면서도 메시아 사상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없지 않았다. AD 132년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 ‘별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메시아로 자처하고 3년 동안 반란을 일으켰다. 하드리안은 군대의 힘으로 그의 추종자들을 전멸시키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이교도시로 만들어 성전 자리에 로마의 주피터 신전을 세워서 제물을 바치게 하였고, 예루살렘 도시명을 아예 고쳐버렸고, 그 후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로 유대인은 1800년 이상 유랑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