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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조향록 목사 ⓒ베리타스 DB |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장 13절)
고 난곡(蘭谷) 조향록 목사(90)가 목회 인생을 살다가 팔십이 넘어서야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았다는 성경 구절이다. ‘믿음’도 좋고, ‘소망’도 좋지만 ‘사랑’ 만큼 값지고 귀한 것이 없었다는 삶의 증언은 교회 목회자이자 큰 어른으로서 남긴 고인의 유지가 아니었을까.
그는 초동교회 제 4대 당회장으로 시무하던 시절(1954∼1977년)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의 설교를 셀수 없이 많이 했었고, 초동교회 원로목사가 된 이후로 운영해 오던 조향록 목사의 홈페이지에서도 "서로 사랑하세요…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사랑의 메시지는 ‘말’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후학들과 미자립,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자신의 주옥 같은 설교문들이 빼곡히 담긴 설교집을 무료로 기증하는 ‘실천’을 보였던 것.
책을 펴내기에 앞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생전에 강단에서 전했던 설교들을 한데 묶어 책으로 엮었다"며 "이 책을 우리 기장인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어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당시 조 목사의 이런 결정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이하 기장) 서재일 전 총회장은 은퇴한 선배의 고귀한 뜻에 감동해 경기도 남양주에 소재한 그의 자택을 직접 방문,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기장이 낳은 대(大)설교가는 그렇게 ‘사랑’을 말하고 보여줌으로써 ’사랑’을 전파했다. ‘사랑’을 말하는 그였지만 부조리에 맞서는 ‘정의감’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사랑’이었다. 제 4공화국 시절 억압 받고, 억눌린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는 한편,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던 것이다.
1960년 3월 조 목사는 박정희 혁명정부 출범 후 넝마주이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서울시내 약 2천 여명의 청소년들을 각 경찰서 단위로 규합해 도움을 주었고, 선도사업을 해 교회, 불교계 유지, 사업전공 교수 등으로 선도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으로 취임해 3년 동안 각 숙소에 1명씩 신학생을 파견해 동숙 지도함으로써 큰 성과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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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난곡’ 조향록 목사가 최근 출간한 설교집. 이 설교집에는 팔십평생을 살아오면서 강단에서 전한 그의 설교문과 논설, 인터뷰 기행문, 수필 등이 담겨있다 ⓒ베리타스 DB |
같은 해 4.19 학생운동 직후에는 약 20명의 지도적 지식인(교수, 언론인)이 모여 5월 동지회를 조직, 매주 1회씩 회집해 국가진로에 대한 강연회, 토론회 등을 진행했고 동(同) 동지회소집장으로도 피선된 바 있다.
조 목사는 또 혼란한 정국 속에서 교계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사회 속에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교회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일깨우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재단법인 전국재해대책협의회 조직 및 실행이사 및 실행위원회 위원장, 기독교시청각교육국장에 피선돼 3년간 일했고, 한국 최초로 성서 판소리를 제작했다. 이에 덧붙여,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위원장,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 한국 복지법인 생명의 전화 창립 이사장, 한국신학대학 협의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1980년대 제 5공화국 출범을 전후해 전두환 정권에 협조한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과 같은 스탠스를 가졌던 사실은 후배들에게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1980년대 당시 5.18 광주학생 운동 직후 한국교회협의회를 대표한 보수 성향의 정진경 목사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해 전남 광주시를 방문, 구호금품을 전달했고, 국가비상 수습대책협의회에 기독교계를 대표해 강신명 목사와 함께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사회 참여 활동을 전개해 온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고인을 한 때 총회장으로까지 추대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는 공과(功過)를 놓고 볼 때, 과에 비해 공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는 분석이 교단 지도부들의 사이에 은연중 자리잡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고인의 몸은 이제 떠났다. 그에 대한 평가를 떠나 고인이 삶을 통해 보여준 ‘사랑의 메시지’는 분명 우리 삶의 현장 구석 구석에서 되살아나야 할 혼이요, 정신일 것이다. 끝으로 고 조향록 목사가 소천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시(詩) 한편을 소개한다.
운호(雲湖)
하늘이 땅을 보고
웃으시니
운호(雲湖)는 안개로
응답한다.
안개는 하늘에 올라
구름이 되고
구름이 몸을 바꾸어
땅에 번개와 비를 내리니
불씨가 되고 물이 된다.
내린 물은
땅을 적시고
땅속에 젖어들어
생명 씨앗들의
젖줄이 되니
싹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게 한다.
고 조향록 목사는
1920년 함남 북청 출생
[학력]
1932년 보흥초등학교졸업
1940년 함흥 성경학원 수료
1942년 조선신학원 졸업
1950년 동국대 사학과 문학사
1958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신학사
1965년 스위스 제네바 대학 연수
1983년 대구대 명예철학박사
[경력]
1943년 풍산읍교회 전도사
1945년 한국기독교 청년연합회 창립 서무부장, 종교부장
1946년 신사동교회 목사/ 한국장로교단 경기노회 교회연합청년회 총무
1950년 주한 캐나다 선교부 직명 대학생 기숙사(관북학사, 후에 신우학사) 초대 사감
1950년 국군북한진격으로 해방지역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위문특사로 함경남도에 파견됨. 국군과 연합군 후퇴로 후퇴함.
1951년 한얼중고등학교 교장
1951년 경남사립중고등학교 연합회 이사 피선
1953년 한일중고등학교 이사장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
1954년 초동교회 목사
1960년 한국기독교 절량농기구위원회 위원장
1961년 서울시재건대 교회위원회 위원장
1963년 가족계획협회 이사
1966년 한국기독교 교육협회 회장
1967년 중앙신학교 신학과장
1968년 기독교시청각 교육국장
1970년 기독교협의회 부회장
1971년 연세대학교 이사
197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73년 빌리그레함 한국전도대회 부회장
1974년 방숭윤리위원회 위원
1976년 한국신학대학장
1976년 생명의 전화 이사장
1977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이사
1980년 국가보위 입법의회 위원
1981년 민주평통종교분과 위원장
1981년 성남교회 임시목사
1981년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1981년 KBS 방송자문위원
1982년 서울올림픽대회 범인족추진회 위원
1983년 한일교회 목사
1984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고문
1985년 경향신문 이사
1986년 현대사회연구소 이사장
1986년 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 이사장
1986년 인천대학교 이사
1986년 세종연구소 이사
1989년 경영자총협회 고용윤리위원회 위원장
1990년 일가기념재단 이사장
1991년 범종단 남북교류추진협의회 회장
1991년 고용윤리위원회 위원장
1992년 통일고문회의 고문
1992년 민족통일 복음화운동본부 고문
1992년 한국여성 정치연맹 고문
1993년 한국기독실업인회 고문
1994년 기독교 21세기 운동본부 대회장
1994년 범종단 남북교류추진협의회 회장
1994년 자유지성 300인 통일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