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강길]도올의 열정과 직무 유기의 한국 신학자들

<도마복음 한글역주> 세권을 완간한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 박사는 얼마 전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재 캐나다 신학자 오강남 교수,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정강길 연구실장 등과 함께 좌담회를 가진 바 있다. 이 좌담회에 참석한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정강길 연구실장이 본지에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와 관련해 기고글을 보내와 이를 싣는다.- 편집자주


한국교회 현장의 병폐적 상황에서의 도올읽기와 교단 신학자들의 문제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발간과 본인이 보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문제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한글역주』2, 3권(통나무)이 나와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게 주로 동양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천 페이지가 넘는 성서신학에 대한 주석 작업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열정적 작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올은 그 자신의 도마복음 연구를 통해 그동안 서구의 기독교로만 알고 있던 맥락을 뒤집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의 장에서 그 안에 깃든 아시아적 가치의 발견을 아름다운 중동 사막의 풍경 사진들과 함께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사실 그가 보는 역사적 예수상에 대해 혹자는 여러 학설들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또는 그러한 도올의 작업을 또 하나의 변종된 예수상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보다 더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다면 얼마든지 도올의 성서읽기 작업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만일 보다 더 치밀하게 그리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들을 시도할 경우엔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Jesus agnostic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의 입장이야말로 내가 볼 땐 그나마 가장 합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정직한 입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실상 역사적 예수 탐구의 문제는 그만큼이나 자료의 빈곤도 문제지만 거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십상이었으며(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설정한 역사적 예수 연구들을 두고 일컫는 것만은 아님), 적어도 어느 한 면으로 모아지기가 힘든 논의의 장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의 입장만 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차라리 오늘의 시대에 현실적 유용성을 주고자 하는 관점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좀 더 깊이 들어가서 현실 변혁의 입장에서 새롭게 활용할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적으로 우리에겐 <역사적 예수>라는 논의의 장 자체가 이미 현시대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투쟁의 장이 되고 있음도 분명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역사 연구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고 있는 한계적 현실의 실체다. 내가 볼 때 모든 성서 연구든 예수 연구든 간에 그 자체로 이미 현재적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비롯한 여러 포지션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는 이 얘기를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실 변혁의 담론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들이 항상 담론적 성격만 띤다고 보진 않는다. 나는 부분적인 합리주의적 성취도 중요시한다. 예컨대 Q자료설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 물론 더욱 엄밀한 고등비평 진영에선 Q자료설까지도 의심스럽게 보는 면이 있긴 하지만(결정적으로 Q는 아예 사본조차 발견된 적도 없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서학자들 가운데서 대체로 인정받고 있는 정설로서 거의 받아들이고 있잖은가. 내가 볼 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담론의 장이 있게된 그때까지의 기나긴 인과적 연유들 역시 있겠지만 그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궁극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왜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시도 자체가 탐구자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도 끊임없는 의미들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확정된 역사적 예수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들 모두는 합리주의의 모험을 감행하는 가운데 어쩌면 천 개의 예수를 계속적으로 써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신약성서라는 텍스트 자체가 케리그마의 집산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적 현실이 있으나 이것이 곧바로 역사적 예수 탐구 자체를 봉쇄시킬 수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 역사적 예수의 논의들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물음을 던져야만 하는 역설적 동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복음서 케리그마의 배후를 끊임없이 묻는 것과 그러한 예수담론을 둘러싼 오늘 우리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는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역사적 예수 이론은 결코 과거에 완결된 것으로서 남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의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복음서에 대한 다양한 이해로도 새롭게 창조적으로도 열려 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창조가 태초에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창조과정(-ing)에 있는 것과 같다. 역사적 예수 역시 언제나 형성과정에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본인의 입장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결국 확정할 수 없다고 보는 측면에선 불트만과 비슷할진 모르나 그가 역사적 예수를 굳이 알려고 할 필요까지도 없다고 말한 측면에선 본인과 불트만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내가 볼 땐 지금까지 인류의 지성사가 거쳐왔던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거대한 논의의 장에 함께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신을 포함한 당대의 의미 있는 창조적 모험이 될 수 있을 걸로 본다.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서 수행되는 도올의 작업과 도올 읽기

지금까지 잠시나마 본인의 역사적 예수 연구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을 밝힌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현재의 도올의 역사적 예수 연구 작업에 대해서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은데, 이것은 그러한 작업들이 지금 현재 한국교회 현장에서 드러나는 여러 병폐와 문제점들로 노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현재의 도올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나로선 도올의 성서읽기 작업과 함께 현재까지도 한국교회 현장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성서읽기의 참혹한 현실 문제와 함께 내다보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도올이라는 인물이 주로 동양철학자로서 활동한 점도 없잖아 있지만, 이미 그 자신의 성장 배경에서 받았던 기독교의 영향 역시 빼놓을 수도 없었기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러브콜 작업은 항상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것이 더러는 이번처럼 표면상으로 드러나기도 했었거나 혹은 잠재적으로 감지되거나 했었을 뿐, 이전의 글에서도 그가 보인 기독교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는 여전히 그 배경으로서 지니고 있었던 터였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 역시 그가 지닌 기독교에 대한 애정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번에 발간된 매우 두꺼운 『도마복음한글역주』작업에서 보여준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관심과 열정도 기본적으로는 그 자신 안에 형성된 몸삶의 무게와도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도올의 도마복음연구에서 주장하는 그 아시아적 가치란 것도 사실상 그때까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들로 형성된 그 자신의 삶의 자리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잖은가.

그런데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러한 도올의 성서연구의 작업들에 대한 기존의 보수 개신교 진영은 이를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 또는 언급을 꺼려하거나 하는 반응이었지만, 기존의 진보 개신교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반응을 해보이기도 했었다. 혹자는 이를 찬성하기도 하고 비평하기도 하는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 것이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존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건강한 변혁을 요구하는 기독교 내부의 소수자들과 외부의 일반 사회 진영에서는 그러한 도올의 행보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교단 신학자들의 직무 유기 : 교회현장과의 심각한 괴리와 이원화

역사적 예수 연구 및 우리의 성서읽기가 오늘의 현재적 정치행보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듯이, 결국 도올에 대한 비판이든 긍정이든 간에 내가 볼 때 한국 신학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의 포지션은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진보 개신교 진영의 한계 역시 그렇듯이 도대체 신학현장과 교회현장 간의 심각한 괴리와 이원화 현상에 대해선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점에 대해 기존 한국 신학자들의 분명한 직무 유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교단 신학자들 말이다. 크게는 두 가지 점에서다.

첫째는 기독교 성서가 지닌 초자연주의 문제에 대해서 제발 좀 솔직한 커밍아웃이라도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이때 이 지점에서 <성서의 그 구절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식의 성서우회주의자들> 역시 문제가 있는 태도라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목사들과 신자들은 이미 그 성서구절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에 그토록 목을 메달고 있는 현실이 있기에 이를 더욱 더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음에도 여전히 그러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354 참조).

따라서 성서구절들의 역사적 사실 여부의 문제와 신학적 의미의 구현 둘 모두를 분명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하지만, 한국의 신학자들은 전혀 그러질 못했었다. 물론 보수 개신교 진영의 신학자들이야 그런 문제들에 대해선 그냥 간편하게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멍청함의 태도 문제가 있지만, 정작 진보 개신교 신학자들의 문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진보적인 성서학자도 사석에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에선 덕을 끼치지못한다고 봐서인지 여전히 성서우회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은 실정이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추상적 수준에서의 얘기들로 황급히 마무리 짓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신학현장과 교회현장 간의 괴리와 이원화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불거져만 갈 뿐임을 왜 모르는가. 또한 그럼으로인해서 더욱 구조화된 병폐들은 한국교회 현장까지 망칠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로운 학문 탐구의 신학현장까지도 보수적인 교단 목회 시스템에 의해 더욱 심하게 통제받게 되는 치명적 문제까지 낳는 꼴만 되고 있다. 어찌보면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고 있는 셈인 것이다.

두 번째 한국 신학자들의 직무 유기는 도대체 쓸만한 성경공부 교재하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현장을 가보면 거의 대부분은 교리적인 성경공부 교재이지 도대체가 쓸만한 성경공부 교재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목회 현장을 맡고 있는 김경호 목사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시리즈인 성경공부 교재는 매우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가 보기에도 보수적인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꼭 한 번은 필요한 성경공부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성서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이 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의 처참한 보수적인 성경공부 교재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가 필요하다. 이는 어쩌면 기존의 진보적인 조직신학자들과 성서신학자들의 협력이 함께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학자들은 이 작업을 여태까지도 해오질 못했었다(‘한국교회 성경공부 문제, 교재가 없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32 참조). 물론 한국교회의 교단 신학자들이 도올의 성서연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나무랄 수는 있겠으나 그전에 먼저 지금까지도 한국교회 현장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성경공부의 문제부터 분명하게 비판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을 갈망하는 흐름으로서의 예수와 성서읽기

이러한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에서 오늘날 도올의 성서작업을 다시 들여다 볼 경우, 오히려 도올의 그러한 창조적 작업들 자체는 한국교회를 향한 보다 생산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의 괴리와 이원화 문제는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 간의 엄청난 불통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우선적으로 선취해야 할 관점은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현실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새롭고 건강한 변혁으로서의 관점인 것이다.

물론 신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드러낼 경우 아마도 자신의 밥줄이 걸려 있어서 구체적인 커밍아웃까진 안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앙이란 건 자신의 신념에 기반되어 있어야 하잖은가. 만일 밥줄 때문에 결국은 위선과 기만의 비겁한 행보를 걷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신학을 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한국교회 병폐 문제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혹자는 나의 이러한 얘기에 대해 당신은 아예 교단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니까 저런 말이나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내가 볼 때 보수적인 교단 시스템이 나로 하여금 죄짓게 한다면 차라리 이를 과감히 엑소더스하거나 짤라낼 수 있는 각오까지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런 나의 얘기가 황당하게 들린다면, 다음과 같은 주의 말씀은 어떠한가.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두 손이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마가복음 9장 42-43절).

그렇다. 목을 메고 차라리 바다에 빠져버려라! 찍어 버려라! 자 이제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러분들은 어쩔 텐가? 우물쭈물 곤란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 자신 역시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서도 목회 시스템 과정을 밟지 않은 이유는 당시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까지도 불어닥친 보수화 바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나는 여전히 지금까지조차 생활고의 불안을 겪게 되기도 했었지만 동시에 거침없는 자유로운 창조적 신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해서 결코 후회스럽지가 않다.

돌이켜보면 그 옛날의 예수운동이 이단이었고 비주류였듯이, 새로운 진보 역사의 창조는 얼마든지 아웃사이더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기장교단까지도 예장을 나와서 기장을 세운 장공 김재준 목사의 정신을 잃어가는 점에 있어선 참으로 아쉬움이 클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보다 더욱 근원적인 기독교 변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즉, 기독교 전체의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진실로 주를 믿는 자라면 먼저 확고한 결심부터 세웠으면 한다. 난 21세기에 새로운 기독교 혁명이 한국이라는 <지금여기>now and here를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여, 자각인들이여,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자! 그러한 아픔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지 않나니!

솔직하고 해방적인 성서읽기에서 보는 도올과의 협력 관계

 만일 한국의 신학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과 교세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신학자라고 할 경우, 그러한 기독교에선 거의 희망이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국의 모든 신학자들이 죄다 이러한 직무 유기를 한다고는 볼 순 없겠고, 적어도 그같은 교단 신학에 복무하는 신학자들의 경우는 대체로 분명한 직무 유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한국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색조는 <성서무오설>에 입각된 보수적인 색깔이며, 교회현장에서의 성경공부라는 것도 너무나 처참할 지경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성서의 초자연주의 문제에 대해선 진보적 신학자들일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솔직한 입장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현장이 안고 있는 <성서무오설>은 성서의 초자연주의적 내용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는 실정이라 진정한 성서읽기의 깊이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치명적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이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성서무오설>이야말로 사탄의 교리요 오히려 성경을 사탄의 바이블로 만들 뿐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는 오류와 같이 간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7 참조).

이러한 현실에서 내가 볼 때 한국교회의 새롭고 건강한 변혁을 염원한다면 도올은 함께 해야 할 우군이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세부적인 각론에선 차이가 있을지언정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지향하는 해방의 큰 흐름에서는 함께 협력해야 할 분명한 동반자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도올의 연구 작업에서도 여전히 개선되고 보완할 사항들은 있을 걸로 본다. 이를 테면 도올의 글에서 자주 거론되듯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자기가 기술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전략적으로도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차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서 도올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은 그렇게 평가할 것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도올을 자꾸만 부정적으로 씹어댈 것이며, 실상 도올에 대한 평가는 결국 후대의 몫일뿐이다. 그냥 그렇게 진행되는 흐름에 맡겨두다보면 자연스러운 피드백으로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면 될 것으로 본다. 동시에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바라는 점에 있어선 도올의 작업들에 대한 인색한 평가를 내려서도 안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에게서 한국 기독교가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소통될 수 있으면 하는 그러한 건강한 기독교를 염원하는 그 신념의 열정과 진정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도올은 이미 우리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국 신학자들의 더 엄중한 비판의 화살은 도올읽기를 통해서조차도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한국교회 현장의 처참한 현실 문제로 겨누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을 위한 보다 솔직한 대화들이 더욱 생산적으로 형성되길 앞으로도 진심으로 바라고 바라는 바이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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