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수 재림·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오해와 이해

‘요한계시록’ 연구 한신대 이병학교수 인터뷰(下)

한국 신학자들이 기피하는 ‘요한계시록’ 연구는 역설적이게도 세계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각광받고 있는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이병학 교수(한신대신학대학장, 한국신약학회장)에 따르면, 이들 신학자들은 인류가 부딪힌 경제 위기, 생태 위기 등 삶의 뿌리를 뒤흔드는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대안 모색 차원에서 ‘요한계시록’ 연구에 뛰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요한계시록에는 생명의 강에 대한 이야기 등을 비롯해 생태 정의 문제가 다뤄지고 있으며 또 동시에 경제 불평등에 의해 초래된 억울한 희생들을 고발하는 경제 정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신학자들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던지는 큰 물음들, 즉 생태·경제 문제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 신학계에서는 ‘요한계시록’하면 영순위로 떠오르는 예수 재림과 그와 얽혀 있는 시한부 종말론을 둘러싼 올바른 해석 문제로 기피의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에 주요한 통찰력을 제공할 ‘요한계시록’ 연구는 봉인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교수는 ‘요한계시록’ 연구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는 예수 재림 그리고 시한부 종말론에 대해 올바른 해석의 틀을 제공, 봉인된 ‘요한계시록’ 풀이를 독려했다.

▲이병학 교수(한신대신학대학장, 한국신약학회장)가 예수 재림, 시한부 종말론 등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베리타스

- 컬트 집단은 예수 재림에 관한 부분을 오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 예수가 곧 오신다는 재림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가.

“지금이 바로 예수가 재림할 때라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의 날짜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그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이 그날을 다시 연기했다고 변명을 합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내가 속히 온다”는 예수의 오심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속히 온다”는 말을 재림으로 해석하고 지금의 재림의 때이고 종말의 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속히 온다”는 말은 종말을 수반하는 예수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과 종말 이전에 먼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 우상숭배를 거부하면서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그들 편에 서서 함께 연대하여 싸우기 위해서 지금 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우상숭배적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들을 쇄신시키기 위해서 부활한 예수가 지금 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현재의 시간에 방문하는 예수의 오심은 결코 재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마지막 종말에 나타날 예수의 미래적 오심과 종말의 날 이전에 찾아오는 예수의 현재적 오심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은 “그렇다 내가 속히 가겠다”(22:20a)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이천년 후인 오늘의 우리시대에 오겠다는 예언이아니라, 로마의 폭력과 착취 아래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역사적 현재에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22:20b)는 예수가 그 당시의 성도들의 시대에 와서 폭력이 지배하는 이 현재의 시대를 끝내고,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생명이 지배하는 대안적 세계의 실현을 위한 그들의 영적 투쟁에 함께 연대해서 싸워주기를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간구이고 희망인 것입니다.”

- 컬트 집단들이 자주 언급하는 십사만사천 명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십사만사천이 부르는 노래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어린양이 십사만사천 명의 성도들과 함께 시온산 위에 서 있고, 동시에 하늘에서는 순교자들과 죽은 의인들이 거문고를 타면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서 구원을 받은 십사만사천 명 밖에는 아무도 순교자들과 죽은 자들이 하늘에서부르는 새 노래를 배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만이 새 노래를 배워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고, 어린양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는 제자의 도를 지켰고,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예수를 부정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는 엣 노래와 다릅니다. 옛 노래는 제국의 권력과 자본, 그리고 폭력의 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뒤따라 가면서 비폭력의 힘과 무력함의 힘을 믿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십사만사천 명의 성도는 하늘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과 정신적으로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이 세계의 불의와 우상숭배에 저항하면 싸우고 있는 조직화된 기독교적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 컬트 집단들이 다른 무엇보다 종말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면.

“사람들은 시대적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 출구와 위안을 얻고자 하는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는 근본주의와 종말론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 우주적 일정의 마지막 단계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악에 대한 최후 승리와 세계의 멸망이 곧 일어날 것이며, 오직 그들의 종교단체에 속한 사람들만이 휴거하여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기성교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며,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현실참여 보다는 사회로부터 도피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한부 종말론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과 토양은 감성적이고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신앙양태와 국내외의 불안한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과 대형 사고나 자연적 재난들이 말세의 징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정치적 불안, 경제적 혼란, 세계적인 빈곤화, 핵전쟁의 가능성,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 위기, 기후 변화, 그리고 천체들의 충돌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지구의 파괴와 세계의 종말이 실제로 지금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시한부종말론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세계의 멸망에 대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결코 지구의 파괴나 세계의 멸망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폭력의 역사의 중단과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불의와 억압의 체제의 종식과 부정의의 소멸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세계의 종말이나 역사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의와 모순이 지배하고 있는 이 폭력의 역사를 중단시키고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지배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 컬트 집단들의 시한부 종말론 해석, 무엇이 문제인가?

“시한부종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세계의 종말이라는 종착역을 향해서 달리는 열차의 시간표로를 찾기 위해서 읽었고 또 그렇게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 바로 마지막 종착역에 거의 도착한 때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의 열차시간표로 읽는 것은 그 책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종말의 때의 열차시간표를 얻는다면, 그것은 현대인들의 지독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장은 현대인들만이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요한계시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기독교 역사상 요한계시록에 대한 모든 해석들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심지어 요한계시록의 첫 독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성도들마저도 그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해석에서 우리는 가능한 해석과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해석을 구별해야만 합니다.”

- 이제껏 ‘요한계시록’이 (문자적 의미에서의)세계 멸망을 예고하는 책으로 읽혀진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요한게시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은 오늘의 시대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저자는 환상을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리포터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저자의 시대의 불의한 현실 속에서 실제로 고난을 당하는 약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폭력이 지배하는 현실이 빨리 끝장나기를 바라는 소망가운데서 쓴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는 정의가 유린되고 생명이 파괴되는 폭력의 역사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들은 하느님이 이러한 폭력의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끝장내는 것이며, 동시에 대안적인 세계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세계의 종말이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는 책이 아니라, 역사와 세계 안에 있는 모두 불의를 소멸시킴으로써 폭력의 역사를 중단시키고 끝내는 것 대해서 말하는 책입니다. 현재의 세계의 현실에 대립하는 대안적 세계의 대항 현실을 실현하기 위한 저항과 희망의 책입니다.”

▲이병학 교수가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시 저자의 현실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베리타스

- ‘요한계시록’이 오늘날 현재적 의미로 읽히기 전에 ‘요한계시록’이 쓰여질 당대 현실에 대한 저자의 인식을 살펴보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요한은 환상 가운데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의 현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지구를 포기하고, 망하도록 버리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압제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로마제국의 황제의 손아래서 통제되었습다. 그는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제국이 선전하는 “로마의 평화”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폭력의 야수적 특징들을 폭로하고 황제가 지배하는 세계 통치의 악마적 성격들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의 지배자는 하느님과 어린양 예수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부활한 예수는 무력하게 도살당한 어린양이며 동시에 유다 지파에서 나온 강력한 힘을 가진 승리하는 사자입니다.

현실 인식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저자의 시각은 아래로부터의 시각이고 변두리로부터의 시각입니다. 요한은 희생자의 시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폭력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과 말을 못 하도록 침묵을 강요당한 자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합니다. 하느님은 심판자로 행동하고, 살해당한 자들의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분입니다. 요한은 역사가 이대로 계속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항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가 지금처럼 이대로 진행된다는 것은 재앙입니다. 왜냐하면 이 현재의 역사는 삶을 위협하고 생명을 줄이고, 그리고 살인적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먼저 대참사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참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이 마치 “정상적인 상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는 이대로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하느님이 폭력의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끝장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폭력의 역사의 진행 아래서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불의에 저항하고 대안적 세계를 위해서 일하도록 수 있는 힘을 제공하고 있다.”

-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는 폭력의 역사가 중단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부활한 예수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는 역사 안에, 세계 안에, 교회 안에, 그리고  인간의 차원과 우주적 차원에 살아 있습니다. 그는 땅 위에 대안적 세계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이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용과 짐승과 거짓예언자에 저항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계14:1-5는 요한계시록의 중심부분(12:1-15:4)의 중심입니다. 부활한 예수가 어린양 모습으로 산 위에 서 있고, 십사만사천의 성도들이 그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부활한 예수는 짐승과 대결하고 있는 공동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임재하고 있음이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노라”(1:17-18). 지금은 우리가 불의에 저항하고, 증언하고,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시간입니다.
 
소위 이단들은 종말론을 마지막 심판이라는 무서운 현실로 축소시킵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은 세계의 종말이나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이 폭력의 역사를 중단시키고 끝장내는 것이고, 이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고난과 불의와 억압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세 가지 심판들이 있습니다. 1) 짐승, 거짓예언자, 그리고 땅의 왕들의 심판, 2) 사탄의 심판, 3) 죽은 자들,  죽음, 그리고 죽은 자들이 거하는 장소에 대한 심판. 이러한 심판들의 과정을 통해서 천년왕국(20:4-6)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지상에 이루어집니다.
 
종말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의 새 창조입니다. 새 창조는 우리의 역사의 최종적 성취입니다.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여하는 미래의 현실을 아직 실현은 안 되었지만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현실로 묘사합니다. 종말은 단순히 심판과 파멸만이 아니라, 또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즉, 종말은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도래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미래의 현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현실을 통해서 모순으로 가득한 현재의 현실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도록 고무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된 미래의 청사진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청사진이 모순과 불의로 가득한 이 세상 안에서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가 지금 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 오늘날 현재적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이 갖는 함의가 있다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이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침투하여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잘못된 해석들을 극복하고 미래를 두려움과 공포 없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오늘의 짐승이 무엇이며 오늘의 거짓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의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는 감추어진 악한 세력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호명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요한계시록은 폭력의 역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통곡과 절규를 듣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명을 지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시간에 대한 민감성을 가지고 현재의 시대를 살게 합니다. 희생자들을 생산하는 폭력의 역사는 이대로 계속되지 않고 하나님과 부활한 예수의 오심을 통해서 반드시 중단되고 끝장날 것입니다. 하나님과 부활한 예수는 약자들과 희생자들 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현재의 시간은 사탄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종말 직전의 시간이며, 회개의 시간이며, 저항의 시간이며, 그리고 연대의 시간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느님이 억눌린 약자들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서 이집트에서 일으킨 출애굽이 어떻게 요한의 시대의 로마제국 안에서도 일어났으며 오늘날 다시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은 세계의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일으키고 있는 새 출애굽 운동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불의에 맞서서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고, 항의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출애굽 운동의 주역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원형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요한계시록 2-3장에 기술된 일곱 교회들에게 보는 편지의 주 내용은 그 당시의 교회의 개혁을 위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유혹과 압제의 상황에서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제국의 요구에 타협하고 순응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은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되찾도록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들은 사랑, 인내(=저항), 믿음, 그리고 섬김입니다. 이어한 요소들을 가진 교회들은 칭찬을 받고, 반면에 이러한 요소들이 결여된 교회들은 비판을 받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이 없다면, 그러한 교회는 교회의 중요한 본질을 상실한 무력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도 역시 요한계시록이 요구하는 이러한 네 가지 요소라는 점에서 개혁되어야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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