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며 우리 현대인들의 삶 구석구석을 통제하고, 길들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경제 권력은 대안 부재론에 근거해 항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정치 권력은 그에 따른 경제 권력과의 야합 도모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교회의 관계를 묻는 세 번째 기획 인터뷰에서 만난 김경재 박사(한신대 명예교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언론과 대학지성 그리고 종교로 구성되어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내포한 제3의 문화 권력이 ‘침묵’하고 있는 점을 꼽았다.
또 경제 메카니즘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길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무한경쟁에 근거한 ‘불필요한 재화의 과잉생산’에 있음을 진단하며, 지구 생명 공동체의 본래성 회복을 위해서라도 너와 나가 하나라며 한 생명을 외친 신천옹 함석헌이나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한 장공 김재준의 사상을 되새겨 보는 일의 유의미성을 찾기도 했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
-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을 구석구석 통제하고 있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평가해 본다면.
“신자유주의 오늘날 글자 그대로 세계를 지배하는 주류적인 거대 담론이라고 볼 수 있죠. 특히 고전적 자유시장체제와는 달리 국지적, 국가적 차원의 단위 혹은 지역 경제 단위를 넘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원리와 세계관 및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해 나가는 상당히 부풀려진 이데올로기인 것 같아요. 그것은 현실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의 정체성에 대해서 현대인들이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이 절실하게 그 빛과 그림자 양면을 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고 봐요.
이명박 대통령. 그 분의 인생 역정이 대기업의 CEO였고, 철저히 MB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신념으로 무장한 기독교 장로를 자처하면서 그것이 곧 자기가 믿는 기독교적 하나님의 나라에 접근해 나가는 구체적인 정치적, 이념적 틀이나 방편으로서 ‘신자유주의’를 능가할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비단 MB 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 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다 그렇죠. 기본적인 A, B,C지만 우리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를 피부로 느끼가 시작한 때는 대략적으로 90년대라고 읽혀져요. 60, 70, 80년대는 도시화, 산업화로 점철되는 근대화 과정이었죠.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먹혀 들어간 것은 소위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줄테니 민주니 자유니 인권이니 나발 불지 말고 나한테 맡기라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말을 알고도 속고 속고도 알면서 좇아왔던 한국민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인간다움 대신 먹고 사는 문제인 ‘빵’을 택한 것이죠.”
-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는 소위 웰빙 신드롬은 오늘날 더 기승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요.
“그 빵을 만들고 분배하는 방법과 과정이 이제는 국가단위나 지역단위가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으로, 초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면 문제는 훨씬 심각합니다. 소위 금융 자산의 횡포와 더불어 매스미디어의 인간 의식 조작, 유비쿼터스의 현실 지배로 인해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살자'라는 신자유주의가 불러낸 허상에 사로잡혀 체제의 산물로 자리할 것을 강요 받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삶의 질이 개선되지는 못하고 있잖아요.
정부 통치자들은 대재벌이 건강해야 우리가 ‘잘 먹고 잘 산다’고 말하면서 재벌에 대한 공경과 존중을 하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제 분석을 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자면 대기업에서 발생한 이익이 고스란히 한국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음을 알 수 있어요. 돌아온다면 고작 재벌을 중심으로 한 선발된 일부 재벌 가족들과 그 회사 사원들 그리고 나머지는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기업 경영 투자자들로 제한되는 것이거든요. 삼성을 비롯한 대재벌의 결과물이 그대로 한민족의 먹고 사는 먹거리와 일거리로 우리의 경제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데 그대로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한거죠.”
그러면서 김 박사는 금융 자산의 횡포야말로 프로테스탄트의 신성한 노동 윤리를 완전히 허물어 뜨린 장본인이라고 꼬집어 비판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의 눈으로서 복잡 다단한 경제 이론을 떠나서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이 처음 시작할 때 가지고 있었던 소위 막스베버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 경건의 윤리. 즉, 땅 위의 모든 재화는 하나님의 것이고, 나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시간을 가장 합리적으로 활용하여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 그것이 물질적인 부가 되었든 정신적 풍요로움이 되었든 간에- 잉여가치를 생산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좋다는 순수하고 소박한 자본주의 윤리가 사라진 것은 오래잖아요. 점점 더 자본주의 자체가 처음에 뿌리 내린 정신적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얘기죠. 또 기본적으로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찬미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비극적 인간관에 뿌리를 내리고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 탐욕적 존재, 자기 중심적 존재로 보는 등 두 가지 면을 함께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은유가 깨졌잖아요.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적인, 이름없는 금융 자산은 노동의 신성성이나 민족성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와는 상관 없이 오직 경제적 이윤가치 증대를 찾아서 이곳 저곳에 출몰하고 다닐 뿐이거든요. 그렇게 볼 때 기독교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 이외에 인간이 공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더 없다라며 자포자기 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일종의 절망이죠.”
- 정말로 신자유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란 없는 걸까요.
“성서적인 시각도 중요하나 오늘날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세계 석학들은 지구라고 하는 하나의 행성체의 생명 시스템 자체가 절대 국지적으로 분리해서 살 수 없고, 생명은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본래 생명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죠. 장회익은 온생명이라고 했고, 함석헌은 생명은 하나라고 했잖아요 . 너와 나가 사실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한 생명을 이루는 구성소라고 하는거죠. 너와 나란 의식을 넘어서 본래적인 의미의 하나로서의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성숙해 가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지금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체제가 아니고서도 전체 인류가 먹고 살 수도 있고, 보다 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과 비전을 계속 말해주는 집단이 없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경제학자들은 거의 다 포기를 했죠. 그들은 경제를 알면 알수록 현재 신자유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세계 경제 메카니즘의 리얼리티를 아니까 그것을 바꾸기에는 바위 앞에 계란 던지는 거니까 아예 꿈도 안꾸는 것 같고, 정치가야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죠. 문제는 언론, 대학지성, 종교로 구성되는 또 하나의 제3의 힘인 문화 권력이 궁궐의 내시같이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내포한 문화 권력마저 오늘날 죽어버린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봐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