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송창근이외다. 한신대학교 교문 아래에 잠들어 있다가 '쿵'하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낫음니다.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 소리는 멧돌 윗짝이 나동그라지는 소리엿음니다. 학내 분규를 두고 "어처구니없다"는 평가들이 들리는 것을 듣고서 그 소리가 어처구니가 빠져버린 멧돌의 비명이라 가늠한 것임니다. 그 어처구니는 지금 K교회에 가 있는데 그 어처구니가 멧돌이 돌아가는 과정에 스스로 빠진 것인지 K교회에서 빼 간 것인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임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벌어졋더군요. 새 어처구니를 구해서 넣는 과정에 학교 이사회와 학생회 및 교수협의회의 의견충돌이 있엇고 이사회는 학생들을 사법당국에 고발한 것임니다. 이 사태의 원인부터 지금 진행 중인 학내 분규의 전체 과정에 목사들이 관련되어 있는데 일처리의 절차나 방법이 비인격적인데다 합리성우선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것을 보니 이제 어처구니가 빠져버린 기독교 정신의 형해를 보는 듯하여 나는 앞서 놀라서 깼던 그 몽롱함에다 착잡한 심정까지 더해진 느낌이어서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슴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데는 언제나 대화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담니다. 대화라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전제로 할 때 감정 낭비에다 정력 낭비를 동반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대화를 하지 않고 일방적인 결정을 실행해버리는 것은 그 상대방을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화시키는 행위임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을 인정한다면, 어려운 부담이 있을지라도 서로 대화를 해야 함니다. 상호간의 인내를 시험할 만한 대화를 거치고 난 뒤에도 원만한 합의점을 찾지 못할 수 있슴니다. 그러나 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결행하게 되면 그 여파에 대한 책임은 그 권력자가 져야 함니다.
학내 사태와 관련하여 변호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공표한 것과 다르지 안슴니다. 법절차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했으므로 이러한 합리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외다. 합리성이 숫자로 입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이성의 한계를 고발하는 것인데, 목사가 숫자를 신뢰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사회는 현재 한국교회의 현실을 목도하고서도 모르는 모양임니다. 그리고 이것은 목사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한 대학교와 교회마저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휘말리게 한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실책이외다.
그리고 대화 없이 법 절차만을 앞세웠으니 목사가 학생들을 사법당국에 고발한 것은 정해진 수순일 것임니다. 나는 학장 시절에 학생들을 징계할 때도 그들을 직접 찾아가서 훈계하고 권면했슴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내가 목사였기 때문이엿슴니다. 학생들도 하나님의 양들이지 안슴니까? 교회에서 얌전하게 예배드리는 사람들만 양들이 아니지 안슴니까? 전통을 내세우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등 억지를 부리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학생들은 양들의 범주에 들지 안는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범주를 제한하고 현재의 제도와 질서를 목양적 사명보다 우선시하는 행위임니다. 반대세력을 법으로 진압한다고 권위가 지켜지는 것이 아님니다. 목사가 법을 우선시하고 안전하게 공여되는 교인들의 존경을 선호하게 되면 결국 권위주의자가 되고 맘니다. 목사는 권위를 좇는 사람이 아님니다.
내가 1923년에 쓴 글이 생각남니다. "소위 智者와 達者들이 모혀서 회의를 開하고 토론한 결과에 다수결의로 진리를 斷定하엿슴니다. 누구든지간에 자기의 주장대로 되지 안을 때에는 多數한 黨을 집합하여 가지고 저 편을 異端視하엿음니다. 그러면서 몹쓸 핍박과 학대를 기막히게 햇음니다. 其極에[그 끝에] 가서는 참아 사람으로 할 수 업는 무서운 일까지도 감행하엿담니다. ... 여긔에서 기독교는 죽은 물건이 되고 참으로 기독교의 정신은 차자 볼 수 업게 되었슴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은 기독교정신의 상실임니다. 내가 다시 잠들 수 있게 해주기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