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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전 아버지의 떠남

최만자의 나의 삶, 나의 이야기(2)

manja
(Photo : ⓒ최만자 선생 제공)
▲일제 강점 말기 만주에서 태어나 자란 최만자 선생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만주 땅은 참 기름지고 끝없는 광활한 벌판이다. 수확물들은 대체로 크고 풍성하였으며 달고 맛이 있었단다. 우리 집의 농토도 매우 넓어서 일꾼들이 집에 같이 살아야 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너무 부지런하시어 언제나 새벽 일찍이 제일 먼저 논밭을 휑하니 둘러보고 오시곤 하셨단다. 가끔씩 어머니는 촉촉이 비오는 날 새벽녘에 크다란 보릿짚 모자를 쓰시고 한 밭을 둘러보고 들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 바로 바라보이는 듯이 회상하시곤 한다.

처음 두 분이 만주에 가셨을 때 두 분 다 농사일을 잘 모르셨고 더구나 추운 지방의 특성을 몰라 혼이 난 적이 많았다고 한다. 두 분이 맞은 첫 가을에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지고 배추밭이 온통 눈으로 덮여서 한 해 농사를 다 그르치나 싶어 눈물을 흘리며 눈길을 헤치고 배추를 뽑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눈 속에서는 배추가 절대 얼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공연한 헛수고를 하셨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셔서 꼭 10년 동안 함께 사시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 있게 말씀하시기를 다른 이들의 평생 살 즐거움을 그 10년 동안에 다 누리셨다 하신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시골에서 아버지의 공부가 끝나기를 기다리셨는데 그 동안 두 분은 수십 통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으셨다. 한번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편지가 너무 아름다워 신문사에 가서 좀 실어 줄 수 없느냐고 요청 한 적도 있었단다. 물론 거절당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통하여 아버지가 어머니의 글 솜씨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고 또 인정해 주셨던가를 알 수 있어 흐믓 했다. 내가 남편과 혹 다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때마다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들려주시고 자신은 우리들처럼 그렇게 시시하게 살지 않았다고 나를 약 올리시곤 했다.

내 아버지는 1945년 민족의 해방을 바로 눈앞에 둔 음력으로 6월 6일에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 어리디 어린 딸들을 남겨 둔 채 홀로 먼 길을 떠나가셨다. 전쟁으로 온 땅이 피폐해져 있던 그 때 대지를 호열자라는 전염병이 휩쓸었고, 아버지는 어느 환자를 치료하시던 중 그 병이 옮겨져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묘소를 어머니는 발해 왕 터 근처에 두었는데 아버지가 평소에 그곳을 좋아하시고 즐겨 찾으시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 속에 우리 어머니를 생존케 한 것은 우리 네 자매의 까만 눈망울들이었단다. 마침내 8.15 해방을 맞았고 그 땅을 러시아 군이 장악하면서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뵐 수 없게 되었다. 어린 여자아이거나 나이 많은 노파이거나를 가리지 않고 군인들은 여자를 겁탈하였기 때문이다. 얼굴에 숯검정을 묻히고 남장을 하고서도 가슴을 졸이며 겨우 나다닐 수 있었기에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일은 커다란 위험이었다.

※ 이 글은 새길교회 최만자 선생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최 선생은 일제 만행이 극심해 지던 일제 강점 말기에 이주민 대열에 합류한 이주민 가족 출신으로 만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해당 글은 1995년 여신학자협의회 출판물에 앞서 게재된 바 있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총 6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이민애 theworld@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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