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말이신 하나님이다. 로고스는 성자를 통해 육화되어, 사람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성자는 사람과 같이 계셨고, 성령은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와의 비연속성과 연속성을 동시에 본다.
역사의 시공간에서 사람과 함께 하신 이에게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라고 하고[요한복음], 또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등된 분이라 하고[니케아공의회], 또 이분을 참사람(vere homo)이자 참하나님(vere Deus)이라고 고백하는[칼케돈공의회] 그리스도교가 가진 신관은, 믿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신자들은 무의식중에도 이와 같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자신이 겪는 경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신관의 문제에 천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양명수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초래되는 결과들에 주목했다. 신이 저 높은 곳(up there)에 초월로서만 계신다면, 신은 언제나 절대일 것이고, 언제나 주체일 것이다. 이 경우 양 교수의 표현대로 신은 인간의 상대가 될 수 없으며, 신과 인간은 "절대자 하느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을 본 자는 죽"는 그런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일방적인 지시를 넘어, 성자가 육화된 사건 그대로, 인간에게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말을 건네신 그런 말이다. 양명수 교수는 하나님의 이같은 행위가 "인간의 주체성을 낳는다"고 해석했다. 신이 저 위에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 오셔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같이 있으면서, 신이 인간에게 말하실 뿐 아니라 인간도 신에게 말을 하게 되었다.
말을 건네는 것은 "상대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은 죄인으로 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존재이지만, 이와 동시에 기독교는 인간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은총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을 건네고 상대하면, "상대방의 영향을 입"게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향을 입게 된다. 저 높은 곳에만 계셨더라면 그저 객체일 뿐인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을텐데, 인간을 상대하시면서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영향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것을 성자의 삶에서 직관적으로 본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주체 대 주체의 관계에 서는 것을 가리킨다"고 양명수 교수는 밝힌다. 그리고 이어 "그러한 하나님의 수동성(passivity)에 하나님의 수난(passion)의 핵심이 있"다고 밝힌다. 인간에게 말을 건네심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셨고, 인간도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수동성이 생겨났다.
인간도 주체가 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극단적 사태는, 아마도 인간이 자신을 전적 주체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태일 것이다.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음을 넘어, 신이 없다고 하고, 자신 혹은 자신이 만든 것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사태일 것이다. 양명수 교수는 "성서의 신은...신의 죽음의 위기를 안고 있"다고 밝힌다. 우리는 이 위기의 상황에 익숙한 세대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상대하면서 사람이 하느님에 맞먹게 되면 신의 죽음이라는 문화 현상을 낳게 된다"는 양 교수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가 몇 세대째 살아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의 신 자체가 무신론을 품고" 있다고 양명수 교수는 밝힌다. 성서가 전하는 신은, 인간의 약함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또 성서의 전하는 신은, 인간의 악함을 알고도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다. 인간 쪽에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이 관계는 아직도 그러한 듯하다. 양 교수는 "말씀이신 하느님은 무신의 위기를 안으면서도 인간을 끝까지 상대해 주시는 하느님이다"라고 밝힌다.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이와 같은 은총 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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