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진다. 동방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과 소아시아, 콘스탄티노플까지 지역을 이르고, 서방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 지역이다. 초기에는 동방교회가 서방교회보다 활발하여, 신학의 기초도 동방교회 지역에서 일찍 형성되었다.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에 이르자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 문화, 철학, 관점들이 모이면서 여러 입장과 관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류 신학과 관점이 크게 차이나는 부류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된다. 대표적인 '이단'들이 마르키온의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의 종말론자들이다.
영지주의 (Gnosticism)
영지주의(gnosis, 靈智)는 영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스어 gnosis는 지식, 신비적 합일, 성적 결합 등을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과학적 인식이 아닌 '참여에 의한 인식'이다. 영지주의의 기본 사상은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정신은 선한 것으로 물질은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피안의 영적 세계는 빛의 세계이고, 차안의 물질적 세계는 암흑의 세계이다.
물질이 악하다는 개념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먼저 물질이 악하기 때문에 물질을 창조한 신도 선한 신이 아니다. 영지주의에서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은 최고신이 아니라 최고신 아래의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최고신과 물질세계를 창조한 신이 분리된다.
인간은 자신의 육이 물질적인 것 곧 악한 것이기 때문에, 육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혼은 육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비유되는데,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으려면 육신을 괴롭혀 육신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 이것은 금욕주의가 된다. 영지주의는 결혼이나 성생활 등을 피한다. 유대교 제사에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야만적인 일이라 본다. 인간의 구원은 악한 피조세계로부터의 해방이다.
영지주의는 예수의 육신도 거부한다. 요한복음서의 '말씀이 육신되어'라는 선언은 거부된다. 이들에게 예수는 몸을 입은 "것처럼" 나타나셨으며,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은 이를 이르다. 예수는 육이 없으시니 십자가의 고난도 받지 않으셨다.
영지주의에서 대표적 인물은 마르키온(Marcion, 85?-160?)이다. 마르키온은 144년 로마에서 자신의 교단을 세웠다. 그는 『반론』(Antithesen, Antitheses)에서 구약성서의 신과 성서의 신을 대립시켜, 구약의 신은 율법의 신이라고 하여 거부하고, 신약의 신만을 복음의 신이라 하여 받아들였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몸이 없었으므로 육신의 고난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회기하였다고 했다. 마르키온은 성찬식의 떡이나 포도주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몬타누스주의 (Montanist, Montanism)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빗나간 것으로 생각되면서, 영과 종말에 대한 긴장성이 약화되었다. 이에 급진적 종말론자들이 나타났는데, 몬타누스(Montanus, 2세기 무렵)가 대표적이다. 156/7년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phrygia) 지역에서 등장한 몬타누스는, 예수의 재림의 때와 장소를 예언하여 신자들을 미혹한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성령이 이제 자기를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한다고 주장했고, 곧 요한의 묵시록에 예언된 신천신지가 땅 위로 내려온다고 했다.
몬타누스와 함께 했던 여자 예언자 프리스카(Prisca)와 막시밀라(Maximilia, 179 사망)도 자신들을 마지막 예언자라고 자처하면서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이들은 페푸자(Pepuza)라는 한적한 촌락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가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다. 신도들은 직업과 가정을 버리고 페푸자에 들어가서, 단식과 금욕생활을 하였다. 윤리적 순수성을 중시하였는데, 일부일처제를 지키면서 간음을 행한 자는 추방하였고, 재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역자들에게는 정기적으로 봉급을 지불하였고, 여자들은 직분을 가질 수 없었다. 이 종말론적인 촌락의 소식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주변 마을 인구가 격감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해 아래 고난받던 그리스도인이 먼 나라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는 보도도 있다. 이들은 신비 체험을 중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몬타누스가 예언한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몬타누스 단체는 해체되었다.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가 교회에 남긴 것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여러 각도로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분석한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지주의는 교회가 "권위에 관한 물음"에 직면하게 했다. 교회는 성서의 메시지와 영지주의의 메시지 가운데서 올바른 가르침을 숙고해야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비의'(秘儀, 비밀스런 종교 의식)를 중시했는데, 그들은 예수가 부활한 뒤 40일간 제자들과 있었을 때 비의를 그들에게 넘겨주었고, 이 비의를 자신들의 주요 근거 및 권위로 삼았다. 이같은 주장들은 성서의 기록들에 배치되었다.
이에 교회들은 정경의 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성서의 문서와 다른 가르침(영지주의의 비의)이 교회에 침투하면 교회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정경의 확립은 교회가 생사를 건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밝힌다. 신약성경의 문서들 가운데 사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 많음에도 문서에 사도들의 이름이 붙여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도 시대에 쓰여진 것이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쓰여진 문서도 정경의 문서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텍스트는 그 마지막 글자에 이르기까지 정경적인 것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교가 종말론적인 몬타니즘을 거부한 것과 관련, 틸리히는 이것이 교회에 일단의 손실을 초래했다고 밝힌다. 첫째는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통에 근거한 계층구조(하이라키) 체계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종말론이 약화됨에 따라 역사의 종말이라는 사상이 교회 내에서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는 점이다. 넷째는 윤리가 점차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르키온과 몬타누스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단들도 큰 틀에서 이 두 유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교회는 이러한 유형의 주장들을 경계해야 하기도 하지만, 이 두 유형의 '이단'들의 출현 배경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 틸리히는 마르키온이 "사변적 철학자라기보다는 종교 개혁자"라고 했고, 몬타누스에 대해 "그리스도교를 규칙과 같은 것에 고정화시킨 데 대한 영(the Spirit)의 반동"이라고 했다. 이들의 모태는 교회 자신이었다. 제도화되고 경직화된 교회는 참여의 영성을 약화시킨다. 그렇다고 성숙하지 못한 영적 운동을 교회가 방관할 수도 없다. 교회는 이 양 면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