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교회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함께 안디옥 학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학파의 결은 사뭇 다르다.
안디옥 학파(School of Antioch)는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큰 희랍인 도시로, 군사의 요새였고 학문의 중심지였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로 약화되었을 때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새 중심지로 떠오르며 이방 선교의 거점이 되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안디옥에서 처음 생겼다. 안디옥 교회의 2대 감독이 이그나티우스(Ignatius)이다.
안디옥 학파는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비해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 재평가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영향 가운데서 신비주의적 요소가 선명하였다.<②번글 참조> 이에 반해 안디옥 학파는 역사적인 것, 인격주의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두 학파 간 차이는 예수를 보는 시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를 단성론(單性論, Monophysitism)적으로 이해했다. 이는 예수 안에는 하나의 본성만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 하나의 본성은 '신적 본성'이다. 예수 안에는 신적 본성만이 존재한다. 신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적인 신비주의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에 반해 안디옥 학파는 "역사적 예수"를 중시했다. 예수는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인간적 본성도 가지고 있다.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예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은 안디옥 학파의 한 사람인 모프수에스티아의 사교 테오도로스(Theodoros von Mopsuestia, 350-428)와 안디옥 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사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1)의 신학이 잘 보여준다.
테오도로스와 네스토리우스
테오도로스는 예수 안에 '완전한 신성'과 더불어 '완전한 인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예수]에게서 인간적 인격은 신적 인격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재인용, 틸리히) 단성론적 입장과 확연히 구별된다. 그런데 예수는 어쨌든 한 분이시다. 때문에 예수에 대한 통합된 시각도 요구된다. 테오도로스도 예수 안에서의 통일을 말하는데, 그 통일은 본질(ousia)이나 본성에서의 통일이 아니다. 두 본성의 혼합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예수 안에서의 통일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은혜의 통일이며, 의지의 통일"(재인용, 틸리히)이다.
이같이 테오도로스는 예수의 신적 본성을 인정하는 것과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말하는데, 그런데 한편으로 그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신의 어머니'(theotokos)를 써도 된다고 했다. 이 맥락에서 데오토코스(theotokos) 용어의 방점은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것보다 예수가 마리아라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마리아가 "신을 낳았다"라는 뜻도 함의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은 동시에 마리아는 인간을 낳았다는 한에서 그렇다"(틸리히)라는 것이 테오도로스의 입장이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신을 낳았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는 마리아가 이 세상에 낳은 것은 "신이 그의 도구로 썼던 인간"이라고 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은 신성성의 기관이 되었고, 그는 또한 고난을 겪었다. 영지주의나 가현설이 육을 부정하며 예수의 육체적 고난을 긍정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고난을 겪었다고 말한다. 그는 "데오토코스보다는 크리스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구춘서)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나중에 가서는 데오토코스(theotokos) 개념을 인정했다고 한다. 다만 이 인정은 틸리히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마치 신전 안에 신이 살고 있듯이 예수 안에 로고스-신이 살고 있는데, 이러한 예수를 마리아가 낳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역사성이 중시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왜 이단으로 선고받았나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그의 교설은 안디옥 학파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틸리히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 선고에 대해 "이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죄 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왜 당시 교회는 예수의 '인성'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틸리히는 "민중의 종교감정"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그는 "단순한 인간은 신을 가지기를 원했고, 제단 위에서 신을 보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상 어느 시대에나 여전히 통용되는 형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었을 적 지도자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예수의 시대에, 예수의 십자가 현장에는 제자들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예수로부터 '기적'을 바랄 수 있었을 때에는 군중들이 모여들었었다. 그리고 현대 우리들의 신앙도 초자연주의적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부 시대에, 예수와 함께 했던 사도들이 죽고난 뒤, 신자들은 전승과 제도와 기록들에 의존하여 예수를 믿어야 했다. 예수는 분명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자신들과 같이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고난받았던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 틸리히의 표현과 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을 걷는 신"이길 바라는 것이 더 쉬운 길이었을 것이다.
이에 일반적인 종교 감정은 아무래도 신비주의적 요소를 더욱 확실히 보여주는 알렉산드리아 학파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것이 틸리히의 분석이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먼저 도그마의 형식을 놓았던 것도 일정 작용인이 되었을 것이다."민중의 종교 감정은 결국 안디옥 학파에 반대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찬성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틸리히)
아무튼 마술적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요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안디옥은 로마와 연합하여 예수의 인간성의 종교적 의미를 구하는데 성공했다"고 틸리히는 평한다.
당시에 안디옥 학파의 신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비적이고 초자연주의적인 경향에 밀려 상대적으로 지지받지 못했고 일부는 이단으로 정죄 받았지만, 현대에 일단의 신학자들에 의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신앙은 살아 있는 것이고, 교리는 신앙을 다 담지 못한다.
글 이민애 박사 eleison202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