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향린교회 한문덕 목사 설교] 복음서와 창립정신(3): 누가복음서와 입체적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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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성경본문

(욘 4:5-11, 골 3:8-17, 눅 4:16-21)

창조절 열셋째주일

설교문

[모이고 흩어지는 공동체]

"교회란 무엇이며, 사람들은 왜 교회에 다니는가?"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삶의 의미를 묻는 현대인들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물음입니다. 늘 변화하는 세상에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다 보면 매우 다양하고 새로운 상황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화려한 문명을 건설했지만, 현대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일어나는 일상의 소소한 갈등과 다툼으로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립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업의 실패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치곤 합니다. 복잡다단한 삶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수천 년 역사를 지닌 다양한 종교 전통은 각각 나름의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80억이 넘는 세계 인구의 80%가 종교를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교는 그중 34%를 차지하여 약 24억 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교는 가톨릭 240년, 개신교 140년의 역사를 함께 해 오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렸고, 한국인들이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상호 간에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외래종교가 아니며, 한국 사회의 한 구성요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진지하게 "교회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흔히 교회를 정의하는 삼위일체적 표현은 "하나님 백성의 모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힘입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위들을 재현하려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 그리고 '흩어지는 공동체'라는 말로도 표현됩니다. 신앙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일을 중심으로 같은 시공간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혜를 입고, 다시 힘을 얻어 세상으로 흩어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선교를 합니다. '예배'와 '선교'는 이렇게 선순환을 이루며,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향린교회의 예배와 선교]

우리 가락과 이 땅에 밀착한 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숨결과 혼을 담아 드리는 우리 교회의 예배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경험해 볼 만합니다. 실제로 2013년 부산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우리 교회는 "국악예배 소개와 에큐메니칼 영성 연대"(Introduction of Korean Traditional Music Worship and Connection to Ecumenical Spirituality)라는 워크샵을 열어서 전 세계에서 오신 180명 가량의 그리스도인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는 워크샵이 매우 중요한데, 한국이 준비한 워크샵에서는 우리가 유일하게 교회 단위의 참여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연합회나 학교, 기독교 NGO들의 모임이지요. 그래서 전 세계의 예배학자가 한국을 방문하면 교단과 교파를 불문하고 가장 먼저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향린교회는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예배보다 세상으로 보내어진 선교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합니다. 지난 70년의 역사 동안 향린교회가 했던 선교사역을 다 나열한다면 여러분은 오늘 점심 식사 시간을 넘겨야 할 겁니다. 그래도 그중에 기억해야 할 것들을 분류해서 말씀드리자면 이러합니다. 교회가 세워질 때부터 시작했던 의료선교, 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도시산업선교, 남북 화해를 통한 분단체제 극복과 동북아 평화, 한미군사동맹 철회를 위한 평화통일 선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해치는 전쟁 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성차별, 소수자 차별 반대, 해고된 노동자의 복권 등의 인권 선교, 농촌교회와의 농산물 직거래, 생태기행과 아나바다 운동 등의 생명 환경 선교, 독거노인 목욕 봉사, 반찬 만들기,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고, 노숙인과 도시빈민을 위한 복지 선교, 민주화에 역행하는 제도와 정책에 저항하여 교회의 비민주적 구조를 바꾸는 교회 개혁 선교, 민중교회 지원, 1인 1 사회단체 후원, 다양한 NGO 기구들, 이웃 종교들과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대형교회를 지양하고 작은 교회와 함께 하는 분가선교, 그리고 이밖에 서울대병원 선교, 노회와 총회를 통한 선교, 구두닦이들을 위한 야학 운영, 양심수와 구속자를 위한 선교를 해왔습니다. 향린교회는 언제나 개인의 죄와 이 땅의 구조악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아픔과 신음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고, 불의가 판치고 권력의 억압이 작동하는 곳에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미래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온라인 선교, 진보 신학 모색, 세대 잇기, 새로운 통일 운동 및 우리가락 찬양의 창작 등 새로운 선교를 또 해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그 비용의 일부를 선교 기금으로 확보하였고, 2023년 선교비는 전체 예산의 32.59%를 달성하고, 올해도 31.75%를 목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1994년 10월 교회갱신 실천결의문 13번째 과제인 '적어도 예산의 30% 정도를 선교비에 할당하도록 한다'에 맞추려고 온 힘을 다해 애쓰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고 있고, 교회의 예결산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또한 교회의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교회 건물과 시설을 개방하고 대여할 뿐만 아니라, 정오 음악회나 국악학교, 안병무 도서관 운영 등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선교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평신도 목회에 대해서 강조했던 지난 주일 유튜브 예배 영상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향린교회가 교회 중의 교회, 찐교회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고, 향린교회가 걸어온 길, 향린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을 한국교회가 본받는다면 한국 개신교는 물론 한국사회 자체가 정화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저는 향린교회에 출석할 수 없는 이방인(캐나다인)으로서 향린교회 같은 교회가 이 이방 땅에도 세워졌으면 하는 실현불가능한 소망을 가져 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선교활동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분명하게 선포되는 사회선교 신학과 평신도들의 주체적 신앙이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회와 선교를 담아내는 공동의회 자료집에는 이런 것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가지고 있던 1992년 공동의회 자료집부터 2014년 공동의회 자료집을 보면 그 두께가 매년 점점 더 두꺼워집니다. 2024년에 다시 돌아와서 보니 올해 공동의회 자료집도 여전히 그러한 것을 볼 때, 교회의 규모가 작아졌어도, 선교활동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입체적 선교와 누가교회]

향린교회의 창립 정신 네 가지를 오늘날 이루고 있나 단순하게 평가해 보자면, 우리 교회는 더 이상 생활공동체는 아니고, 독립교회도 아닙니다. 목사를 청빙하였으니 온전한 평신도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입체적 선교'의 정신은 70년을 오롯이 지속해 왔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입체적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확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홍창의 장로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사회로 나아갈 때에 교역자만이 주로 설교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 일부분이 되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직업, 기능, 재간, 시간, 재물, 지위 등)을 통하여 교역자나 마찬가지로, 또는 교역자와 함께 사회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교사는 교사의 직업을 통해서, 의사는 진료를 통해서, 음악가는 음악을 통해서, 미술가는 미술을 통해서 무엇인가 교회선교의 일역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다. 각자 가정은 가졌으나 한 곳에 모여 수도원적 분위기를 만들어 한 몸이 되어 교회에 봉사해 보자는 것이었다.(홍창의, <초창기에 그리던 교회상과 앞으로의 전망>. 『향린』제11호(1982년 봄), 9쪽. <향린40년사> 215쪽에서 재인용)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교회는 네 복음서 중 누가복음서를 만들어 낸 누가교회와 아주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을 탄생시킨 교회는 마가 교회보다는 훨씬 규모가 크고 다양성을 담보하던 공동체였습니다. 누가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6:13 이하) 70인의 제자를 언급하고 있으며(10:1 이하) 이들이 모두 더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힌 대표들입니다. 대표들만 모두 82명이었으니 누가교회는 아마도 수십 개의 모임이 있는 우리 교회보다 더 큰 교회였을지 모릅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방인 지역의 한 변두리에 모여 작은 소종파를 이루었던 마가교회와는 달리, 누가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어쩌면 로마에 터를 닦고 있었던 보다 더 포괄적이고 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섞여 있었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었으며, 열두 사도와 칠십인 대표 같은 지도자들과 라오스(λαός)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서 저자는 경건한 유대 전통의 그리스도교 계열에서 만든 예수의 어록을 읽었고, 이방인과 소외된 계층이 그리는 예수의 복음 이야기인 마가복음서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전에 자기가 들었던 예수 이야기와 이미 읽은 모든 이야기들을 가지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정리하여 한 로마 관료에게 보냅니다(눅 1:3).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이제 더 이상 갈릴리 "어느 한 구석"(행 26:26)에서 일어난 불분명한 스캔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에 의해 모든 사회 계층을 꿰뚫고 들어가며 다른 민족, 인종 및 계층의 벽을 뒤흔드는 생명력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붓을 든 누가는 복음서와 행전을 쓰는데, 유대인인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 이야기로 끝을 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붙여서 '누가-행전'이라고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 사회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 펼쳐진 것처럼, 이제 이후 제자들과 평신도들을 통해 이방 세계가 변화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해방과 평등 경험에서 오는 감동으로 성립된 이 공동체에 이제 부자들도 동참하고, '로마 사회에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떼거리들'이라고 의심받았던 첫 교회들이,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요소를 제공하는 공동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누가는 알려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하나님 나라는 로마시민들이 좋은 황제로 기억했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만든 로마의 평화(Pax Romana)보다 훨씬 더 낳은 평화를 만드는 나라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핵심으로 삼는 향린교회와 자신들의 선교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갔던 누가교회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닮아있습니다. 향린교회 구성원들이 교양 있고 주체적 안목을 가진 신앙인들인 것처럼 누가교회 교인들도 중상류층 이상의 교양인들이 쓰는 헬라어를 쓸 줄 알면서 주변 세계와 자신들을 성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치 ․ 사회적 환경에 맞게 '현실적'으로 예수의 복음과 세상을 해석하고, 그에 따른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향린의 선교를 되짚어 보면서 누가교회의 경험을 견주어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교회의 선교에서 배우다]

실천 신학자들은 흔히 교회의 역할을 보통 복음의 선포인 케리그마, 교육, 봉사, 친교 이렇게 네 가지로 봅니다. 이 중 '봉사'로 번역된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뜻하는 단어로 흔히 일반교회에서는 교회 내 봉사를 뜻하는 것으로 말들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물론 세상을 향한 선교의 기지가 되기 위해 교회 내적인 것도 잘 추슬러야 합니다. 교회가 선교를 잘하려면 세상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상황인식이 필요하고 자신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맞붙어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의 경구처럼 외부와 내부 모두를 살필 줄 알아야 적절한 선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교회는 대(大)로마제국 안에 살고 있지만 로마의 황제가 신인 양 제 맘대로 하는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서가 쓰이기 전에 로마를 다스리던 도미티아누스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하들에게 자신을 "주와 하나님"(Dominus et Deus)으로 부르게 한 첫 번째 로마 황제였는데, 유대인의 세금을 따로 거두기 위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90세 노인조차도 바지를 내리고 할례를 받았는지 조사하는 아주 악독하고 교만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의 귀족들에게 암살당해 죽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권세 있는 자를 왕좌에서 끌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눅 1:51-52)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로마가 워낙 거대 권력이기에 전쟁과 같은 직접적인 정면 대결은 못하지만 예수의 시험 이야기를 통해 로마 황제가 바로 마귀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또 사도행전 12장 20절 이하에서는 헤롯 아그립바가 자신을 신격화시켰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누가교회는 정치적 권력이 신성화되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선교 금지를 당한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한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행 4:19-20) 이렇게 말하고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모여 기도합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빌어서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세상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행 4:24-26) 후에 다시 산헤드린이 이들을 또 호출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행 5:29)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를 실행하려면 우리 또한 세속 정부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교회가 바른길로 가게 하고, 더 나은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향린교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교를 해야 합니다. 민족문화의 수용, 교회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통일, 생명과 인권 선교를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는 일일수록 더욱 투철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해 내야 합니다. 향린교회의 존재 의의는 바로 이러한 선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향린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고 큰 품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교회는 포용력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사람들을 세심히 살핍니다. 우선 예수와 함께 처형되는 두 강도를 구별합니다. 한 강도는 로마병사처럼 예수를 조롱합니다만 다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예수의 무죄를 변호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누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회심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줍니다(누가 23:40-43). 심지어 그리스도교를 거절하는 사람도 누가에게 있어서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가는 바리새인들도 구별해서 볼 줄 압니다. 누가복음서의 전통적인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다수의 바리새인은 위선자로 그려지고 있지만(누가 11:37-54), 누가는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행 5:35 이하). 우리가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도, 또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분명 향린의 정신을 흠모하고 거기에 따르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있고 생길 것입니다. 누가복음서에서 어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마을에 못 들어오게 하지만(누가 9:51 이하), 이웃 사랑(누가 10:25-37)에 모범을 보이는 사마리아인도 있고 감사하는 신앙(누가 17:11-19)의 모델이 된 사마리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심하게 비판하는 대형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분들도 계시고, 하나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자진해서 나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정부와 권력자들을 묘사할 때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이는 악한 놈이고(누가 3:19 이하), 예수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누가 13:31 이하)이고,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사형집행을 하는 폭군(누가 23:4, 14, 22)이지만, 또 다른 총독 서기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접하고(행 13:4-12)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에 의해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향린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한국 사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근대화 과정을 겪지 못한 탓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얻은 모든 이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을 일거에 부정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다는 것을 우리교회에 오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예전에 알고 있던 어떤 청년은 자기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오면서 "존경할 만한 어른을 보려거든 우리교회에 와 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전문성과 성실성, 바른 생각, 진정한 실력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관료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지도자를 키워야 합니다. 박정훈 대령 같은, 강혜경 씨 같은, 김규현 변호사 같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옳지 못한 것에는 굽히지 않는 이들을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교회가 그러했던 것같이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바로 향린교회 선교 현실이자, 동시에 가능성입니다.

[선교는 넘치는 사랑으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기억하라]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교할 때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 한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말씀을 펴서 읽으신 것으로 보도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성경 봉독과 일종의 취임 설교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요약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그런데,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본문 말씀과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을 비교해보면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없는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라는 말씀을 첨가하시고,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보복의 날에 대한 선포"는 빼버립니다.

즉 예수님의 선교에는 "보복", 즉 "원수 갚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교활동은 미움이나 혐오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불의와 싸우고, 투쟁을 외치고,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선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모든 외침과 싸움과 저항은 근원적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비판도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11월 10일 첫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곁에 있어 준 것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죄인들 그리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잃은 사람들, 당시에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사회 문화적으로는 소외당하고, 때때로 여론에 의해 매도당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눕니다. 우리는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지, 선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누가-행전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으라"(누가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이들은 '오클로이' 즉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이 말은 속옷 두 벌을 가지고 두 사람이 공유하며, 먹을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 소유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함께 서로 어깨를 기대어야만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누가-행전의 후반부 주인공인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나의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장만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도 이렇게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언제나 본을 보여 왔습니다."(행 20:33-35)

이 말씀은 부자들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기 손으로 직접 일을 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면 모두 부자처럼 여겨졌습니다. 이 고별연설은 다른 사람의 육체 노동 덕에 경제적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입니다. 바울은 경제적 독립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것을 설교합니다. 바울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선생과 지도자로서의 그 권리를 희생합니다. 즉 그는 부양받기 위하여 일하기보다, 오히려 주기 위해서 즉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일하였고, 그렇게 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으며, 그래서 욥바와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음으로써(행 9:36-43) 아주 좋은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 모두가 바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충고, 바울의 연설, 삭개오 이야기가 이루어 낸 선교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수평적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산주의(Communism of Love)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가난에 허덕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눌 수 있습니다. 제힘이나 남의 도움으로 경제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부자 될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남에게 주기 위해 더 많이 노동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나누어 줌으로써 모두가 구원을 이루는 선교에 동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단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꿈꾸던 선교였고 이상이자 목표였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 교회의 목회와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지쳐서 사랑의 마음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면, 즉시 그 선교활동을 멈추십시오. 정말입니다. 안 하셔도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셨다고 했는데, 우리가 눈 떠야 할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맹목적 자기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랑 없는 열정으로 자기마저 불태우는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독선적인 행위로 남에게 상처 주고, 자기 의를 드러내며 남을 정죄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약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남을 정죄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일을 다 잘 해내고 싶고, 또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조금 무리하면서까지 교회 일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조헌정 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안 계셔도 향린교회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그렇습니다. 창조하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씨를 뿌리고도 열매에 집착하지 않는 선교는 흘러넘치는 사랑에서 나오는 선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에서 나오는 선교입니다.

오늘 요나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할 예언자이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스페인으로 도망간 이유는 니느웨를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래뱃속 체험, 깊은 고독의 시간을 보낸 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니느웨는 회개하고, 하나님은 니느웨를 용서합니다. 요나는 너무나 못마땅합니다. 화가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야 할 예언자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 가득 섞인 탄식과 비난이 나옵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설득하시면서 타이릅니다. 바로 요나에게 하시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선교가 기쁨이 되지 못하고, 우리의 선교가 사랑에 뿌리내리지 못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런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땅 조선 반도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이들만 해도 수백만이 되고, 뭇 생명들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하여 이 땅을 아끼지 않겠느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돈에 휘둘리지 말고 오히려 불의한 재물로 사람을 살리십시오.

가난하더라도 떳떳함을 잃지 말고

부자가 되더라도 하나님 두려운 줄 아십시오.

고통 속에서도 넘치는 평화를 맛보고

눈물 속에서도 그리운 자유를 누리십시오.

매일 그대들의 자리에서 예쁜 사람꽃 하나 피어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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