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학 교수(한신대, 신약학) |
본지는 한신대 이병학 교수(신약학)의 '횡령의 공모자가 된 한 슬픈 여성사' 연구논문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불의한 행실로 죽음을 맞이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 시장경제 체제 내 인간관계의 신뢰를 파괴하고 병들게 하는 '횡령'에 관한 문제를 성서신학적으로 풀어낸 글입니다. -편집자주
Ⅲ. 결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횡령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가부장제적 결혼에 의해서 자기주장을 펴지 못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한 여자가 남편이 주도한 횡령을 알면서도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했기 때문에 횡령의 공모자가 되어서 결국 남편과 동일하게 죽음의 벌을 받은 한 슬픈 여성사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음의 벌을 받고 공동체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비록 두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나 죄의 결과는 동일하게 일어났다. 아나니아의 행위는 자기주장에서 기인되어 있고, 삽비라의 행위는 자기주장의 결핍에서 기인되었다.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토지 매각 대금의 일부를 횡령한 사람은 남편인 아나니아이지, 아내인 삽비라가 아니다(5:3). 그러나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삽비라는 아나니아의 횡령 행위를 단호하게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였다. 남편이 저지르는 불의를 함께 알고 있으면서도 반대하지 않고 말없이 묵인한 그녀의 행위는 남편의 실제적인 불의에 공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삽비라의 죄는 자기주장이 결여된 행위에 있다. 만일 삽비라가 남편에게 불복종했었더라면, 그녀는 죽음의 벌을 받지 않고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사라지고 평화와 정의와 평등이 지배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세계에 대한 희망을 나누면서 계속해서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주장을 펴지 못해서 본의 아니게 횡령의 공범자가 되어 남편과 동일하게 죽음의 벌을 받은 삽비라의 슬픈 이야기는 억눌린 여성들에게 군림하는 남편들과 함께 정죄되어 죽음의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여성들이 불의한 가부장제적 구조에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남편들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없다. 여성들은 불의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남편들에게 그것을 반대하는 자기주장을 관철시켜서 남편들의 그릇된 결정을 취소시키도록 해야만 한다.
가부장적 제도는 개인적인 인간화를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약자들과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발전에도 방해가 되는 죽음의 문화이다. 억눌린 여성들은 불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자기주장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야만 한다. 여성들과 약자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힘은 횡령의 다양한 행태를 근절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신숭배로 부패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온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음의 벌을 받은 것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는 말로 끝난다(5:11).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가부방적 구조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그들도 역시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불의를 알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묵인하는 것이 죽음을 불러온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모두 성차별 없이 예수의 제자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여성을 차별하는 교회 내부의 적인 가부장제적인 구조를 먼저 깨트리고 양성 평등적인 공동체로 쇄신되어야하며, 그리고 나아가서 물신 숭배적인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횡령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저항과 투쟁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