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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비판에서 신앙성찰로(8):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통찰을 중심으로
글 · 파울로 연세대학교 신학박사(Ph. D.)

입력 Dec 08, 2021 10:00 AM KST

5.1.2 신의 '전지'에서 나타나는 신 존재의 모순 

포이어바흐는 신의 전지(全知)에 대해서도 그 껍질을 벗겨보니 감성적 특성, 곧 감성적 지식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즉, 신의 전지는 실제의 감성적 지식의 특성과 본질적인 규정성이 제거되어버린 감성적 지식이라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147) 인간은 이렇듯 신 안에서의 제한되지도 규정되지도 않는 감성적인 지평선을 환상 가운데 확대하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된 조건 속에 있는 자신을 의도적으로 망각시키고 자신이 제한으로 느끼는 것을 자기 자신의 느낌에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보장해주는 환상 속으로 끌어들여 폐기하는 일을 감행한다.(<기독교의 본질>, 348)

앞서 줄기차게 언급했듯이 살과 피로 이뤄진 인간이 시간과 장소라는 제한된 조건에 의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것을 신 안에서 동격의 위상으로서 무한성에 견주어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과 신의 전지는 양적으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다를게 없다는 게 포이어바흐의 일관된 주장이다. 지식의 질적인 면은 신과 인간이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신의 전지가 인간의 지식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무엇이라면 또 전지가 인간 자신의 표상방식이 아니고 인간 자신의 표상능력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인간은 실제로 전지를 인간 이외의 대상 또는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부여할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환상은 양의 제한만을 제거할 뿐 질의 제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기독교의 본질>, 348)

포이어바흐에게서 결국 종교의 작용이라는 것은 감성적 의식을 확대한 데에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종교는 감성적 제한의 제거를 의마할 뿐이라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종교에 긴밀하게 매달린 인간에게 신은 어디서나 나타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국소적 입장의 제한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 속에서 시간의 제한을 초월하기에 종교인은 스스로 환상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기독교의 본질>, 130) 여기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적 종교가 그 본질에 있어서 문화와 교양의 원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교양은 외부에 의존하며 여러 가지 욕구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교양은 감성적인 의식과 생명 자체의 제한을 다시 감성적이고 현실적인 활동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지 종교적 환상에 의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적 종교는 지상생활의 제한과 고통을 환상에 의해서만 극복하며 신 안에서나 천국 속에서만 극복할 수 있기에 그가 말한 교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적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마음이 욕구하고 요구하는 모든 것, 곧 모든 사물이고 모든 재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종교가 인간의 지식의 제한을 종교적 환상으로 해소함으로써 문화와 교양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는 지적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이라는 유개념은 명확하고 확실한 반면 창조주라는 종개념은 불명확하며 불확실하다.(<기독교의 본질>. 350) 다시 말해 활동이나 제작이나 창조 개념은 그 자체로 신적 개념이기에 이러한 개념은 주저없이 신에게 적용된다. 이러한 개념은 과정보다 결과에 무게를 두고 있기에 '어떻게'라는 과정은 부수적이며 부차적이며 나아가 쓸모없는 물음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적 개념과 대조되는 자연 발생(Entstehung) 개념에 인간은 익숙치 않다. 소재를 갖지 않는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표상은 이러한 개념을 이교적이고 비종교적인 것으로 혐오했으며 그 자리에 창조(Erschaffung)라는 주관적인 인간적 개념을 재빨리 대치해 놓았다는 설명이다.

종교는 창조의 과정을 물으며 기원을 찾는 자연 발생학적인 성찰을 통해 인간이 신을 떠나 사물로 눈을 돌리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가해성이란 종교적 포장을 하기에 분주했다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도 주관적이며 인간적인 개념인 창조는 종교의식에서도 나타나듯이 결코 불가해하거나 불만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는다.(<기독교의 본질>, 353) 결국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창조 개념에는 불가해성이란 딱지가 붙지 않는 반면 그 모든 것들 중 바랭 개념에 한해서는 불가해성이란 딱지가 여지 없이 붙는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불가해성이란 기준은 무엇이며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일까?

포이어바흐는 "불가해성에는 신적 활동을 인간 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활동으로 만들기 위해 신적 활동을 인간적 활동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두 활동 사이의 유사성, 동형성, 또는 본질적 통일성을 제거하려는 목적이 기초되어 있다"(<기독교의 본질>, 354)는 진단을 내린다. 그에 따르면 자연은 생산하고 산출하지만 인간은 만든다. 만든다(Machen)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 개념에 해당하며 이러한 만듦에 있어서 신은 전적으로 인간과 같으며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신은 인간적 본질의 거울로부터 인간적 허영심과 자기만족의 거울일 뿐이라는 지적도 곁들인다.(<기독교의 본질>, 355)

이렇듯 포이어바흐의 논지를 따라 가다보면 인간과 신 사이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양적 차이에 불과한 것이기에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유한성으로부터 출발한 신성은 무한성을 향해 뻗어나가나 출발 지점이 유한성이기에 그와 동격의 위상을 지닌 신성 혹은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듯 모순이 발생할 때 그 처방으로 개념적 바넝을 통해 불가해성 내지는 신비성을 내세워 이러한 모순을 봉합하거나 피해가기 마련인데 여기서 어떤 개념적 반성을 거쳤기에 단순 양적인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치환되고 종교적 불가해성으로 고정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종교적 표현인 "인간은 신의 형상"이라는 명제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인간이 신과 근친적(verwandt) 존재라는 것이다. 종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의 종족에 속해 신적 천성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358) 이러한 신-인 관계의 유사성을 토대로 신인동형설을 퍼뜨림으로써 '같지만 같지 않다'는 환상을 만들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이성에 있어서는 통일을, 상상에 있어서는 '차이'를 가능하게 해주어 둘의 공존이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설명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 동일성이 있지만 비동일성도 있다는, 이른 바 '같음'과 '다름'의 공존 가능한 타협책으로 유사성이 제시된 것인데 문제는 이성에 반하는 '비동일성'이란 상상이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다는 데 있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유사성이 "온갖 종류의 신비화와 공상이 생겨날 수 있는 계기를 준다"(기독교의 본질>, 361)고 전하며 이 유사성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투사해 갖가지 신인동형설의 개념을 만들어 종교적 환상에 빠지게 하는 투사론의 인식론적 근거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동일적 비동일성 혹은 비동일적 동일성이란 모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신-인 관계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총체적 모순이라는 점을 포이어바흐는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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