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동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자살을 택한 대구의 어느 중학생 아이가 남긴 유서는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데, 그 이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학원폭력에 관한 뉴스가 끊이질 않는다. ‘왕따’는 이제 일반명사가 되었고, ‘빵셔틀’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였다. 수시로 빵 사오는 심부름을 해야 하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동료 중의 어느 한 교수가 단호하게 주장한다. 학원폭력 없애는 거 아주 간단하다고... 묘안이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 하는 눈초리를 모아주자 헛기침을 한번 하고 대답한다. “아이들을 그냥 놀리면 된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게 하면 대부분의 학원 폭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어릴 적과 달리 요즘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공부 잘하게 하기 위해서 이다. 친구들보다 공부를 잘해야 일류대, 아니 최소한 ‘인 서울’ 가고, 그래야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있고 사람 구실 할 수 있으니 지금 놀 시간이 없다. 어느 남자고등학교의 급훈이 “지금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나중에 마누라의 미모가 달라진다”라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좋은 대학 가야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는 부모의 애걸 혹은 명령이 곧 ‘절대로 친구들보다 뒤쳐져서는 안된다’는 경쟁논리임을 아이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왕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져서는 안된다는 부모의 가르침을 앞서 실천해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첫 단계로 일단 만만한 친구 하나를 찍어 여럿이서 힘을 모아 따돌리는 것으로 경쟁자 하나를 제거하는 행위로써 부모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우리가 어린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곧장 동네 골목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서 해가 질 때까지 형, 누나, 동생들과 정신없이 놀면서 자라났다. 계절과 성별에 따라 놀이 종목도 다양했다. 술래잡기, 깡통차기, 자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다방구, 고무줄, 공기 등등 놀이는 끝이 없었다. 놀이는 이집 저집에서 엄마들이 나와 “00야, 저녁밥 먹어라~”하고 불러서야 끝을 맺었다. 학원폭력으로 청소년들의 가슴이 멍들고 있는 요즈음 우리 어린 시절의 골목 놀이를 떠올리면서 주목해야할 중요한 문화가 있다. ‘깍두기의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깍두기는 양편으로 편을 짜다가 마지막에 제일 어리고 약한 아이가 한 명이 남으면 이편, 저편 모두 시켜 주는 것이 바로 깍두기이다. 사실 너무 어린 아이를 놀이에 끼워주는 것은 성가신 일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골목 학교에서는 어리고 잘 못하는 아이들을 따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양쪽 모두의 편으로 받아 주었다.
깍두기는 왕따와는 정반대의 문화이다. 같이 놀아야 할 동급생 친구를 여럿이 짜고 따돌리는 것이 왕따라면, 가장 약하고 어린 아이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놀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주고 ‘더불어 함께’ 노는 것이 깍두기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깍두기의 놀이문화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소위 신자유주의의 풍랑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전 지구적으로 기업과 개인을 막론하고 경쟁력이 없으면 가차 없이 도태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왕따는 다름 아닌 이러한 시대문화의 산물이다. 이 무한경쟁의 시대를 거슬러, 어린 시절 ‘더불어 함께’ 놀던 깍두기의 문화를 복원할 길은 정녕 찾을 수 없는 것일까?
(*‘깍두기’란 말은 요즘 조폭 똘마니들을 지칭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이는 깍두기처럼 각을 세워 짧게 깍은 머리 모양 때문에 생긴 말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김기석 교수(성공회 사제,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