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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가운데 희망을 사신 어머니

최만자의 나의 삶, 나의 이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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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최만자 선생 제공)
▲고난 가운데 희망을 사신 나의 어머니

만주 땅에서 막 돌아온 내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성서에 나오는, 이방인의 땅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 모두를 잃고 며느리 룻과 함께 빈손으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에 비교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졸망졸망한 딸 넷을 데리고 친정으로 찾아온 딸을 보시고 외할아버지는 한참을 우시었다. 그러고는 '그냥 내 곁에서 지내거라. 아이들을 내가 키워 주마' 하시면서 불쌍한 과부 딸을 위로하셨고, 앞으로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할아버지 곁에 살 것을 권하셨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살면 어머니는 편하게 지내실 수 있겠지만 우리들을 누구의 신세지면서 키워 기죽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또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시골이 아닌 도시로 가서 사시겠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런 결단은 결코 누구나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부가 딸 넷을 혼자 힘으로 공부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앞에 험난한 여정이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남기셨던 땅은 만주에 두었고 돈은 삼팔선 넘으면서 모두 써 버렸고 정말 맨주먹으로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자신이 쉽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하지 않고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어머니와 우리 네 자매의 삶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의 경제적 사정은 빈곤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이것저것 장사도 하시고 삯일도 하셨는데, 장사는 어머니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작은아버지 도움으로 정미소를 운영하였는데 그것마저 이웃에 불이 나서 우리 집까지 타고 말았다. 진정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 힘든 것을 내색하지 않으셨고 언제나 밝은 얼굴로 우리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애쓰셨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항상 주셨다. 언니들이 여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두 딸에게 정성껏 교복을 입히시고 문 앞에 나가시어 언니들의 모습이 골목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사랑스럽게 지켜보곤 하셨고, 그 기쁨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으시는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교육학이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분이셨지만 어머니가 우리를 교육하신 방법은 놀랍게도 세계적인 교육학자의 이론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매일 밤마다 우리 네 자매를 아랫목에 앉히시고 꼭 이야기 세 개씩을 들려주시곤 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하나 혹은 둘만 하시려 했지만 우리는 막무가내로 졸라대어 결국 이야기는 세편씩을 들을 수 있었다. 때로 옥루몽 같은 장편은 연속극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낮 동안 생존을 위해 온 힘을 다 쏟아 지칠 대로 지치셨을 터인데 어떻게 매일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자신이 읽으셨던 소설로부터 전설들, 혹은 역사 이야기 등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는 무궁무진하였고 이야기 솜씨는 요즈음 방송인들이 무색할 정도여서 소설을 직접 읽는 것 보다 더 재미있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할 정도였다. 오죽해서 어머니의 별명이 '방송국장'이셨을까! 우리 네 자매는 이렇게 이야기 솜씨가 좋은신 어머니 덕분에 무한한 상상의 세계와 아름다운 꿈을 키우면서 자랄 수 있었고 삶의 지혜와 용기를 배웠으며, 정의로운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들을 키우면서 자랄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온 동네 아이들이 노래와 연극, 무용을 공연하는 공연장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언니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나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곧잘 연극으로 꾸몄고, 동네 아이들을 모아 배역을 맡겼으며, 전체 순서를 짜면서 노래와 무용을 중간 중간 넣었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들의 이러한 계획에 언제나 고문으로 참여하셨고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 주시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한 연극은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공연할 때이다. 언니들은 나에게 나무꾼 역할을 맡겼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몇 분 관람을 오셨는데, 담요를 동그랗게 말아 그 속을 연못으로 하고 신선 할아버지를 맡은 친구가 그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도끼를 연못에 빠뜨리는 순간 담요가 풀어져서 연못이 흐트러지고 신선이 드러나 버렸다. 방에 가득 모였던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었고, 우리는 다시 연극을 진행시키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다. 아마도 어머니의 이야기 솜씨의 유전인자는 우리 네 자매에게 모두 유전되었는지 언니들도 나도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잘하였다.

우리 언니들은 더욱이 노래 부르기 까지 좋아해서 우리 집에는 언제나 노래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속에서도 언제나 화목하고 행복해 하며 노래와 웃음소리가 항상 넘쳐 나는 우리 집을 대단히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자기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고 애를 먹이면 '안되겠다, 너 만자네 집에서 좀 크다가 오너라' 라고 할 정도로 우리 어머니의 자녀 교육은 훌륭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우리 네 자매가 별 탈 없이 곱게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면서 자라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말 할 수 없는 기쁨이요 삶의 희망이요 남편 없는 허전함을 채워 주는 위로였던 것이다. 나와 내 위의 어니가 같은 해에 나는 부산여중에, 언니는 부산여고에 둘 다 거뜬히 합격을 하였다. 그 때 그 학교들은 소위 일류 학교라 그 합격은 대단한 영광이었는데 우리 동네 여러 친구들도 시험을 치렀지만 거의 모두 떨어졌는데 우린 둘 다 합격을 하여 온 동네가 떠들썩했고 어머니는 자신의 온갖 시름을 우리들로 인하여 말끔히 잊으시는 것 같았다.

※ 이 글은 새길교회 최만자 선생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최 선생은 일제 만행이 극심해 지던 일제 강점 말기에 이주민 대열에 합류한 이주민 가족 출신으로 만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해당 글은 1995년 여신학자협의회 출판물에 앞서 게재된 바 있습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총 6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이민애 theworld@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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