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기를 대략 짚으면 대략 600년~1500년 정도의 시기이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교부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칼케톤공의회가 451년,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이 430년, 플라톤이 아테네에 세운 아카데메이아의 해체가 529년 무렵이었다.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그리스가 중심지가 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이후 신학의 중심은 알프스산맥의 북쪽 지역으로 옮겨진다. 오늘의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1517년에 일어났다.
한편 이 시기의 동방신학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453년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전까지, 이 시기 동방교회의 신학을 '비잔틴 신학'이라 부른다. 이 이름은 그리스 도시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이다. 비잔틴 신학에 대한 연구는 현대에 들어와서 활발해졌으며,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폴 틸리히는 [서방 지역의] 중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이행기: 600-1000 AD. 옛것이 보존되면서도 새로운 것이 받아들여지는 시대. 중세기가 '암흑기'로 일컬어질 때는 특히 9-10세기를 가리킨다. 2) 중세 초기: 1000-1200. 고대와 명확하게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가 이루어졌다.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이 유명하다. 3) 중세 융성기: 1200-1300. 스콜라주의가 발전하였고 고딕 예술이 활발히 일어났다. 4) 중세 말기: 1300-1450. 1300년 무렵부터 중세 문화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문예부흥이나 종교개혁의 기초가 닦인다.
서방의 스콜라 신학의 대략적 개괄
중세신학은 수도원 학교, 대성당 학교, 수도회, 대학 기관이 주도하여 큰 발전을 이루었다. 서로마 제국 황제 샤를마뉴(742-814)의 지원으로 수도원 학교와 대성당 학교가 먼저 설립되어 신학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10세기경부터는 수도원들이 대거 설립된다. 중세의 수도원의 수는 교회의 수보다도 더 많았다고 한다. 그중 클뤼니 수도원(Cluny Abbey), 시테오 수도원(Citeaux Abbey),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가 대표적이다.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원 개혁을 주도하였고, 시테오 수도원은 성빈과 금욕을 중시하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는 최대의 수도원으로, 이 두 수도원의 특징은 곧 중세 학문이나 인식에 대한 두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보다 신비주의적 입장이고, 도미니코 수도회는 보다 합리주의적인 입장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이다.
수도원과 더불어 대학도 발달하기 시작한다. 대학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먼저 발달했다. 프랑스의 파리대학(소르본대학), 이탈리아의 볼료냐대학,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이 거점 대학들이다. 이 가운데 소르본대학은 가장 큰 대학으로 학생 수가 3천 명 정도였는데, 당시 파리 시민이 5만 명 정도였다. 한편 서방교회는 성경을 비롯해 신학서적, 교회의 문서들 모두가 라틴어로 되어 있어, 학생들은 라틴어를 알아야만 했다. 이에 프랑스대학 거리는 '라틴어 거리'(Latin Street)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같이 풍부한 교육 기관들과 뛰어난 연구자들에 의하여 신학은 중세 중후반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중세의 신학을 "스콜라 신학" 혹은 "스콜라 철학"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스콜라 신학은 한마디로 종합과 체계'의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틸리히는 스콜라주의의 특징을 '권위와 이성'의 관계, '변증법과 전통'의 관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관계,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의 관계', '유명론(nominalism)과 실념론(realism)'의 관계 가운데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스콜라신학 그 자체는 워낙 방대하기에 별도로 다룰 것이다.
스콜라 신학의 대표적 학자들을 먼저 소개하자면 11-12세기에는 안셀무스(Anselmus), 아벨라르(Abaelard), 베르나르(Bernhard), 빅토르 위고(Hugo von St. Victor), 요아킴(Joachim)이다. 13세기는 중세신학의 정점인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윌리엄 옥캄(Ocaam), 위클리프(Wycliffe)이 대표적이다.
동방의 비잔틴 신학의 대략적 개괄
동방지역의 교회는 교부시대 이 지역 교회의 영향대로 신비주의적인 면이 서방교회에 비해 강하고, 이는 비잔틴 신학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은 신학을 체계화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법률적 관계로 묘사하는 서방신학과 달리 '신화'(deification)의 관점을 사용하였다. 이에 비잔틴 신학에서는 '조직신학'과 같은 체계적 학문은 발전하지 않았다.
동로마제국 곧 비잔틴 지역의 교회는 성경과 교회의 문서들, 그리고 예배의식에까지 희랍어를 사용하였다.
비잔틴 신학의 역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 하나는 '성상파괴 논쟁'(iconoclasm, 8~9세기)이다. 이것은 교황 레오 3세가 성상을 금지하면서 정치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이다. 교황의 명으로 성화와 성상(조각)이 금지되자, 성화상을 포교의 한 방법으로도 이용하고 있었던 서로마교회는 즉각 반발한다. 이 논쟁은 교회가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로 분리되는데 큰 요인이 되었다.
두 번째 논쟁은 '해시카즘'(hesychasm) 문제이다. 헤시카즘은 신자들이 육체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의 눈으로 '신성한 빛'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주의이다. '침묵'을 뜻하는 그리스어 hesychia에서 유래하였고, 잠잠한 명상이나 묵상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헤시카즘에서 '내적 고요'라는 관념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수단이다. 이같은 신비주의적 접근을 이단이라고 규탄하는 자들도 있었다. 반대자들에 대해 팔라마스(Palamas)라는 사람이 "신의 본질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활동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옹호하였다. 헤시카즘은 서방교회-프로테스탄트의 후예인 한국교회에서는 다소 낯선 개념이다. 관상기도(觀想)로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이슬람 군대에 함락되면서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 비잔티움의 멸망으로 비잔틴 신학은 명맥이 끊겼고, 정교회 사람들은 러시아로 들어갔다. 비잔틴 신학은 현대에 와서 다시 재발견되고 있다.
글 이민애 박사 eleison202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