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하나님인 참 인간"
성경본문
(렘 31:31-36, 요일 4:7-16, 요 14:6-14)
대림절 셋째주일
[타는 목마름으로, 사회 대개혁]
존경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12월 3일 악몽의 밤부터 어제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약 열흘간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저는 소름이 돋고, 자괴감이 들고, 화도 나고, 애가 타고,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고, 매우 놀랍기도 했습니다. 비상계엄의 전모가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그 잔인함과 무지막지함에 소름이 돋았고, 21세기 대한민국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이런 정부를 만들었다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고, 여전히 제 잇속만 챙기는 국무위원들과 여당 국회의원을 보면서 화가 나고, 내란가담자들의 구속이 늦어지고, 첫 탄핵이 실패하면서는 애가 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민들이 무시무시한 계엄을 막아냈고, 민주주의를 견인하는 시민광장을 축제로 만드는 젊은이들을 볼 때는 자랑스러웠습니다. 결국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그 옛날 예언자처럼 시대를 읽어내고 하나님의 뜻을 주님의 백성과 함께 나눠야 하는데, 이렇게 여러 갈래의 마음들이 제 가슴 속에서 휘몰아쳐서 어떻게 이 벅찬 감정과 시대정신을 말씀드려야 할지 몰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여러분과 함께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 못하지만, 여러분이 저와 함께 불러주시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서로 통할 것 같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시에 연세대 학생 이성연이 곡을 붙여 1980년대 초중반 대학가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노래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1.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후렴)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2.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나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이/ 서툰 백묵 글씨로 쓴다
지난 12월 11일 오전에 우리 교회에서 윤석열 퇴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있었고, 1,500개가 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이름으로 조직 명칭을 정했습니다. 그 명칭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입니다. 1987년 5월 27일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발기인 대회가 우리교회에서 열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2024년 민주시민 조직의 횃불이 우리 교회에서 켜졌습니다. 이번 조직의 명칭에는 "사회대개혁"이 들어가 있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전체적 조망과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 것입니다. 이 사회대개혁은 몇 날 며칠을 밤새워 토론해도 모자랄 주제이지만,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적 이익만을 챙기는 권력에 맞서 우리 사회 전체의 공적 가치를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공존과 상생의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지적한 "무(無) 사유"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비판했던 "계산적 이성"이 결합된 것입니다. 2년이 넘게 우리가 보아온 대통령은 극우 유튜버의 관점이라는 매우 편협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이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할 능력과 의지가 전혀 없는데도,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자신의 통치가 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거의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유시민 작가의 비유대로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처럼 그가 하는 일마다 그간 우리가 쌓아온 모든 제도와 사회적 가치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거기에 최고 권력자를 둘러싼 사람들은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그저 시키는 대로 하거나, 아니면 온갖 머리를 굴려 가며 자기 뱃속을 불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 가기에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시 맞닥뜨리면서 우리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만들어진 체제에 대해서도 새삼 성찰하게 됩니다. 불의한 군사정권의 긴 독재에 맞서 싸워 얻은 87 체제는 형식상의 민주를 이루었지만,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 깊은 분열과 혐오를 만들어 냈습니다. 다수의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들은 87 체제가 '승자독식의 체제'라는 한계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심한 양극화와 분열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이제 '중심과 주변', '선과 악'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체계를 벗어나 '다자 공존의 세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가치들이 존중받는 세상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치고, 죽임에 맞서 생명을 살리고, 전쟁에 저항하여 평화를 일구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 생명을 동시에 살려야 한다면 과연 어떤 생명을 먼저 살려야 할까요? 사랑과 정의가 부딪힌다면 이 소중한 두 가치를 어떻게 모두 살려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가 예언자처럼 말한 선과 악을 넘어선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고, 그동안 '회색지대'라고 폄하되었으나, 사실은 바로 거기가 공존의 지대, 가능성의 마당일 수 있음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새롭게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또 세계의 위대한 종교 전통 지혜는 모든 사건이 지닌 역설적 양면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완벽한 패배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무지막지한 권력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동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로마와 성전 기득권 체제의 죄악과 폭력이 만방에 알려졌고, 이후 예수의 뒤를 이은 사랑의 공동체 교회를 통해 결국 악의 카르텔은 무너지고 맙니다. 패배였으나 승리한 것이고, 죽어서 살아난 것입니다.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검찰이 승승장구하며 권력을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잘났다며 뽐냈던 이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못 돼먹은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점차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의 뒷배에 기대고자 이승만도 뽑아 봤고, 군대의 힘을 보고 군인도 대통령으로 만들어봤고, 욕망을 이뤄보고자 현대건설 사장도 뽑아봤지만, 그 모두가 진정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 지도자들이 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마지막 남은 검찰 세력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놔 봤는데 역시나였습니다. 모든 경험 속에서 더 새로운 무엇인가를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보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민주 의식은 훨씬 세련되어질 것입니다.
[독립교회]
향린교회의 네 가지의 창립 정신 중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정신은 '독립교회'의 정신입니다. '독립'(獨立)이란 무엇인가요?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랫동안 스승의 모델로 불렸던 공자는 자신의 일생을 자술하면서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섰다."고 말합니다(三十而立). 그가 제힘으로 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열다섯부터 열심히 배움에 힘썼기 때문입니다.(十有五而志于學)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히고(學而時習之), 배워서 알고, 겪으면서 익힌(學而知之, 困而知之) 15년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된 주체로서의 그의 삶의 마지막 자평은 이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所欲不踰矩) 일흔 셋에 유명(幽明)을 달리한 공자가 칠십세에 한 말입니다. 이 말은 현대를 연 사상가 칸트의 그 유명한 말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과 통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 본능을 넘어 사회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배워야 사람이 됩니다. 배움의 목적은 제힘으로 홀로 서는 떳떳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목표가 바로 제 뜻대로 하는 행동이 모든 다른 이들이 해도 전혀 문제없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 '독립'이란 이것입니다.
그럼 공동체에 있어 독립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하나 됨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싸우고 다퉈 분열하면 그 공동체는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서로 달라도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서 함께 뜻을 모아갈 수 있을 때 공동체는 독립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허리가 잘려있기에 제대로 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독립은 평화적 통일에 의해서만 완성됩니다. 이렇게 개인과 공동체에게 독립이란 무엇인가를 고려하면서 우리는 향린교회의 네 번째 창립정신인 "독립교회"를 성찰해야 합니다.
창립 당시의 '독립교회'란, 우선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은 교회를 가리켰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교회가 민족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기는커녕 싸움과 분열만을 일삼고 있었기에, 당시 향린교회는 독립교회로 남아 교권 싸움에서 어느 파에도 휘둘리지 않는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초기 교인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향린이라는 평신도 교회를 창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쌍수를 들고 찾아와서 입적했다. 싸움 없는 교회, 아무 파에도 가담하지 않는 교회, 딸라의 배경도 없고, 선교사의 콧김도 없는 교회, 따라서 교역자라는 무관제왕도 없는 순수한 평신도의 교회, 이거야말로 한국적 교회가 아니겠는가!"
이 교인에 의하면 독립교회는 딸라의 배경이나 선교사의 콧김에 휘둘리지 않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아 '홀로 굳건히 서 있는 교회'를 뜻합니다. 지금 우리 향린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소속이 되었습니다만, 주님의 뜻을 따라 교단 정치나 교파의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독립교회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하는 교회 갱신 활동에는 독립정신이 잘 녹아 있습니다. 교회 정관을 따로 제정한 것, 목회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온 교우가 주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우리 예배에 민족문화를 도입하고 국악선교회 예향을 만든 것, 작은 개교회가 통일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것, 그 어떤 교회보다도 도농 교류를 일찍 시작하여 한 세대를 이어 온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이런 횡보가 누군가에게는 교만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교단과 노회에 비협조적인 것처럼 비출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이 사실이라면 겸허히 듣고 성찰할 지점도 있지만, 이를 발판 삼아 더 보완해 간다면, 오히려 교단과 교파를 넘어서는 역할도 감당하고, 세상과 더 깊이 소통하여 선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습니다. 교단이나 에큐메니칼 진영, 각종 사회단체 등과, 연합하고 연대할 것은 함께 협력하면서도, 홀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은 화살촉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는 정신이 바로 독립교회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정신을 올바로 되살려 주체적으로 서면서도 보편적 입법원칙 즉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모두가 함께 어떤 마음을 지녀 노력해야 할까요? 요한복음서를 통해 그것을 알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서의 특이성]
요한 복음서를 쓴 사람은 공관복음서를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는 예수와 그의 운동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 사람은 뭔가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적어나가기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 1:1-2)
요한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씁니다. 예수는 세례요한이 예언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아나(마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거나(마태), 세계사에 우뚝 솟은 성인의 반열에 드는 인물(누가)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셨고,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빛 중의 빛이며, 이 세상의 죄악을 없애시는 분이시며, 목마름이 없는 살아있는 물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선한 목자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온갖 수사와 호칭으로 예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요 10:30, 17:11, 21). 이것은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전도서 5장 1절)는 말씀처럼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천지보다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조차 금지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두려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도당에 대한 저주문"을 그들의 기도에 넣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추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요 9:22)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서 저자는 당대의 모든 유대인의 사유와 인식 체계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요?
[문명의 불만과 종교적 욕망]
앞에서 언급했지만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이 문명사회에서 제 스스로 서려면 보통 한 30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태어나 부모의 돌봄을 받고(유아기 0-5세), 학교에 들어가고(유년기 6-12세), 사춘기(13-19)를 지나 청년이 되고 사회에 적응하는 성인이 되는데 30년이나 걸리는 거지요. 인생의 각 단계에서 충분한 영양이나 정서적 돌봄, 지적 자극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넘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타인 의존적 삶을 살거나 심한 경우 우울증에 노출되고 자기를 파괴하게 됩니다. 한 인간이 사회화되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은 사람을 성숙하게도 하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표독한 눈을 갖게 하기도 하고, 욕망의 노예로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참 자유를 약속하고 성숙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 생겨난 종교도 역시 같은 부작용을 겪어 왔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 역사가 짧지 않고, 또 많은 그리스도인은 신의 이름으로 자기 욕망만을 채우려 합니다. 건전한 신앙이 아니라 해로운 신념은 인간의 삶을 도리어 피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 후배 중 한 명은 제게 교회보다 술집이 많은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술집은 그나마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데 교회는 인간의 정신을 망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요즘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 친구는 교회는 다니는데, 사람이 참 괜찮아. 기독교인인데도 좋다 말이지. 허 참."
[참 인간]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다시 한번 인간을 믿어 보자고 제안합니다. 요한은 새로운 창조 이야기인 복음서를 쓰면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기억해 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10:35). 오늘 예수도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요한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은 욕망덩어리일 뿐인가? 요한은 인간 예수를 통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가능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해 먹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종과 여인과 제자에게 군림하는 주인과 남자와 선생이 있는 반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는 친구도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13장). 심지어 친구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사랑도 있다고 말합니다(15:13).
욕망에 휘둘리며 타인에 의존적인 인간이 아닌 참된 것에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이웃 종교인 불교의 선가(禪家)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스승(祖師)을 만나거든 스승을 죽여라."(殺佛殺祖) 부처에게 의존하고 스승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의 신성을 말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간성 즉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자기 비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이나 메시아로만 인식했던 초기의 제자들에 달리 참된 삶, 영생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요 3:1-21, 18:38) 정치사회적 안정을 통한 행복 추구보다 더 고차원적 삶, 위로부터 거듭나는 얼로 가득하게 솟아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언어로는 얼나로 솟나는 삶을 고민합니다. 요한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계 공동체들이 중시했던 조직과 규칙, 제도와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평화와 화해와 유연성을 주는 자유로운 성령의 바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각 개인의 마음 속에서 솔솔솔 예기치 못하게 불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의하면, 이전에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야 했지만 앞으로는 마음판에 직접 하나님께서 새겨놓은 그 음성을 따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예레미야 31:34). 이것이 새로운 약속이고 우리가 제 2성서를 신약(新約)이라고 부르게 된 경위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 건물을 때려 부숴도 참 성전인 개인의 양심은 사흘 만에 되살아납니다.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육해공군은 때려눕힐 수 있지만 한 인간의 뜻은 빼앗지 못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子曰: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論語』 「子罕」 25.).
[자유인으로 사는 것!]
향린교회 2대 담임목사이셨던 홍근수 목사님의 파송사는 향린교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홍 목사님은 향린을 떠나시며 은퇴 설교의 제목으로 이 파송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루터의 책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시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인간이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적 자유를 가지고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 녹아 있는 유교(儒敎)에서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엄청난 수행을 강조합니다. 자유란 깊이 생각하고(사변이성적인 지식, 思) 때에 맞게 몸으로 훈련해서(경험 축적적인 지식, 學而時習)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적실한 행동이 나오는 것(不思而得, 不勉而中)이라 말합니다. 공자는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從心所慾不踰矩). 유교의 길은 사람 사이의 관계(禮)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개인의 인문학적 수양(仁)을 강조하는 윤리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 즉 인연생기(因緣生起)를 통해 일체의 집착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저 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는 같은 것의 양면일 뿐, 인간의 단견으로 구별 짓고 차별을 두는 것은 모두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어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불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직시함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는 깊고 넓은 심리학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 요한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나요?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주체적으로 서는 인간, 즉 독립정신을 지닌 인간이 되기 위해 요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서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13:34-35) 요한교회 안에는 세례요한을 스승으로 모셨고, 예수도 그의 계승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적통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대표였던 사마리아인들, 유대교 회당에 적을 두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눈치를 보는 사람들, 회당을 박차고 나와 떳떳하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강경파들, 베드로로 대표되는 조직과 제도를 중시하는 사도계 제자들, 그리고 애제자를 통해 예수의 이야기를 전수받은 이들, 예수의 죽음 이후 부활한 예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기 어렵다는 합리주의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자본으로 덧칠한 거대 로마제국의 맘몬신이었고, 시시때때로 맘몬의 사탄적 세력은 로마제국의 조직과 권력을 이용해 교회를 위협하고 인권을 유린하였습니다.
내적으로 분열의 소지가 높았고, 외부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없애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기탱천할 때, 요한교회는 "서로 사랑"함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랑을 핑계 삼아 자신의 기준과 방식대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방식을 말하기도 합니다(己所不欲, 勿施於人.).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적극적 윤리의 길은 생존하기조차 버거운 이들, 지적인 배움에 동참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험난한 길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심리적 깨달음은 가족과 사회적 책무와 현실 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고달픈 삶 속에서는 너무도 요원한 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좀 부족한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의 약점과 아쉬운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준다면,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서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인간과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기도하신 대로 하나님이 예수 안에,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요한 교회도 하나님과 예수 안에 있어 서로 완전히 하나 되는 길이라 믿었던 것입니다(17:20-26).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의 대다수 교인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이 세상에서도 모자라 저 세상의 공간도 차지하려는 욕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향린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과 종교적, 대사회적 행위를 통해 유익을 얻고 그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지, 성숙이 있는지, 서로 사랑이 있는지, 주체적 인간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제 성인이고 향린교회도 제 맘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공자의 나이 70세를 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살리며 지구공동체를 죽이는 길과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온 생명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한 알의 씨알이 땅에 떨어져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죽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12:24). 우리가 예수의 말씀에 주체적으로 선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셨던 그분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세상조차도 사랑하셔서 한 알의 씨알이 되었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이 땅 위를 걸어 다니는 하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가 악합니다. 사탄의 세력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내란 수괴가 된 이때, 예상치 못한 고난이 우리 앞에 갑작스레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 그러니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너희는 내가 없어도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이제는 너희가 참 하나님의 형상인 참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가 한 일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신의 친구가 되기 위해 인간의 친구가 되십시오.
사유하는 신앙인, 기도하는 노동자로 거듭 나십시오.
인간의 불완전함을 기억하되,
새 하늘 새 땅을 가슴에 품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십시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세상을 이기신 주님처럼 세상과 싸워 이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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