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생명, 평화, 정의의 가치를 실현해야
지난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4대강 사업 반대와 관련하여 환경과 토목, 운송 등 각 분야 전문가의 인터뷰를 게재해왔는데, 신학자의 견해를 싣는 것으로 본 기획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크리스천 석학들의 견해를 밝히는 기획의 대단원이 왜 “신학”이어야 하느냐는 물음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본지가 만난 “크리스천 석학”들은 책장 앞에만 있거나, 강단에만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언에는 학문적 혜안과 필로로기(Philologie) 뿐 아니라 4대강의 현장에서 땀흘려 얻은 설득력 있는 소신이 담겨 있었다. 본지가 만난 전문가들은 4대강 반대 현장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을 대표할지언정 결코 한 발짝 물러선 연구자들이 아니었다.
본지 역시 학문을 위한 학문이 되어버린 '신학'의 권위를 빌고 싶지는 않았다. 본지의 취지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싣는 것 뿐 아니라, 기독교인 전문가들의 견해와 참여가 지닌 어떤 전형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이로 ‘신학자’는 과연 적절할까.
미국의 사상사가(思想史家) 프랭클린 보머(Franklin L. Baumer)는 그의 저서 <유럽 근현대 지성사>에서 “지성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반영하지만, 아울러 그 사상을 다듬고 명확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지성인들이 사회 내에서 회자되는 사상과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에, 당연히 사상사는 주로 지성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쓴 바 있다. 지성인이 가진 전문가적 자격 혹은 능력보다는 그들이 사회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부분에 주목했고, 이는 ‘신학적 지성’의 인터뷰 대상자 선정 근거가 되게 했다. 되도록 4대강 문제에 대한 생태신학적 견해 등 특정 이론만을 언급하는 것은 지양했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참여와 기고(寄稿), 연구를 병행하며, 4대강 사업 반대에도 소신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이러한 본지의 취지에 잘 맞는 신학자일 것이다. 김경재 교수를 지난 5일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 백석관에서 만났다.
▲김경재 전 한신대 명예교수를 지난 5일 오전 10시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 백석관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4대강 사업 반대 입장을 밝히며, 성서 속의 계약 전승 뿐 아니라 창조 전승에도 주목해야 한다면서 4대강 사업 반대의 신학적 논거를 제시했다. 또한 정교분리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교회는 생명, 평화, 정의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고, 4대강 문제와 같은 문제를 놓고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태양 기자 |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이 종교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이미 토목 사업이 아니라 정치 문제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실제로 주요 종교들의 반대 주장을 살펴보면 고유한 이론적 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도 4대강 사업과 그것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서 신학적 조명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여기서 기독교라고 할 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지만, 여기서는 개신교, 그 중에서도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개신교 측’의 신학적 논거에 대해 묻고자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그 근저에 두 가지 흐름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계약전승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창조전승이라는 것이다. 계약전승이란, 신구약 성서를 꿰뚫고 흐르는 중심 화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가는지로 보는, 달리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해왔고,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에 대해 또 어떻게 대응해오셨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성서읽기 또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대표하는 성서 속의 흐름이 바로 예언자 전승이다. 예언자 전승은 교회 용어로 말하면, 구원사 중심의 사고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신다는 것이다. 좁게 말하면 영혼의 구원이고, 넓게 말하면 결국 인간이 말하는 역사라는 무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관철하려는 관심 혹은 신앙적 흐름이다. 최근까지는 그것이 주노선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부터 한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걸쳐 생태계의 위기가 가중되면서 그 동안에 이미 있었던 것을 보지 못했었다는 반성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창조전승이다.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부터 그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 뿐 아니라 창조 세계 자체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1절을 보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창조전승은 하나님의 관심과 임재가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난다는 입장이다.
서구라파 2천년 역사를 보면, 중세기까지는 이 두 흐름이 공존했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와서 서구라파 문명은 산업화, 도시화를 거쳤고, 제국주의가 발생했다. 이는, 크게 보면, 서구 기독교문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기독교문명권의 정치적 경제적 식민지적 확장의 열기를 타고 기독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지난 3~4백 년 동안 기독교는 대자연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역사중심 그리고 구원사중심의, 다시 말해, 인간중심적이고 인간영혼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흐름에 매몰되어 왔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 지구촌 생태계의 위기가 보편적으로 자각되기 시작했다. 로마클럽 보고서가 나온 것이 70년대니까 약 4~50년 전부터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역사의 구원 못지않게 자연의 구원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지구의 자연 생태계가 존속하고 살아남아야 구원의 역사가 가능하고, 교회도 종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인 것이다. 인간 생존 자체를 위협 하는 생태계의 위기와 자연 환경의 파괴 앞에서 기독교는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며 그 강조점이 역전되어 왔다.
한국교회를 보면, 뒤늦게나마 이러한 흐름을 접한 신진학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옛날 목사님들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대부분 모른다. 그들은 구원사 중심의 신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렇게만 본다.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니까 구원사와 관계된 계열만 눈에 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과 모세오경을 보면 엄존하는 피조세계에 대한 구절들이 있다. 큰 변화에 대해 말하자면 대강 그렇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 반대에 기독교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나는 그런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인간 삶의 총체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순수하게 인간 영혼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개인의 영혼 구원과 같은 종교적 관심을 비롯해 기껏해야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에나 관심을 가져왔지 삶의 구체적인 문제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해왔다. 4대강 문제를 예로 들자면, 자연과 관계된 인간의 변혁과 개조는 순전히 정책 문제 또는 토목공학적 문제라는 것인데,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틀렸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틀렸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진보 기독교의 4대강 사업 반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한기총이 그렇다. (기독교의) 도덕적 윤리적 역할만 해도 한 짐인데, 그러한 일(4대강 사업 반대)은 일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성서가 분명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 중심, 역사 중심, 개인 영혼 중심의, 인간만의 구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도신경 1항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면서, 하늘만 걱정하고 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땅을 구원의 드라마가 전개되는 무대 정도로만 생각한다. 무대를 보라. 스테이지가 있고 그 위에서 각본이 연출된다. 자연은 무대가 아니다. 자연 그 자체가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주체로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관객 따로 연출가 따로 드라마 따로가 아니다. 연극 예술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까지 기독교신학은 개인 영혼의 구원, 역사 일변도의 구원사 중심으로만 흘러왔기에 신학적 지평 자체가 한정되어왔다. 절반의 이야기만 한 셈이다. 온전한 복음으로 돌아가려면 창조전승과 계약전승, 피조세계와 인간을 아우르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관념적 종교가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지표 전체가 사막화되고 북극의 빙하가 녹고 기후변동이 심해져 전염병이 돌고 생명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면, 그러한 와중에서 인간 영혼의 구원만을 부르짖는 전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외도가 아니고 신학이 본래적인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도 신학적 고찰에 포함된다고 봐야겠지만 별도로 하나 묻겠다. 정부 당국과 일부 보수 언론이 종교계의 4대강 사업 반대를 가리키며 주로 "왜 종교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나" 또는 "종교가 뭘 안다고 4대강 문제에 관여하나. 이것은 전문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문제다"라고 되묻곤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교가 왜 반대하느냐는 지적도 같은 문제다. 보수 정치가나 종교지도자들이 이 같은 상황이 불거질 때마다 내놓는 것이 바로 정교분리 이론이다. 6~70년대에 많은 진보 기독교인들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발언할 때 김종필 씨를 비롯한 보수 인사들이 내세운 논리가 바로 정교분리였다. 쉽게 말해, 4대강 문제는 정치 문제인데 종교가 왜 관여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정교 분리의 근본 의도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정치 영역 따로 문화 영역 따로 이렇게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면이 있지만, 삶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어서 별도로 분리되지 않는다. 정교 분리의 핵심 의도는 서로 관계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서양문화사를 보면, 국왕이 가톨릭이었다가 개신교로 개종하면 그 나라의 신민들도 개종해야만 했다. 개인에게 종교 자유가 없었다. 정교 분리의 핵심은 이 같은 역사적 정황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종교의 존엄한 자유를 국가 권력이 간섭하지 말라는 데 있었다(베스트팔렌조약, Westfälischer Friede : 1648년 독일의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체결된 조약. 이 조약은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고 있다 - 편집자 주). 정교분리, 즉 정치와 종교 중 정치의 핵심은 국가 권력이다. 개인의 종교의 양심과 선택의 자유를 국가가 무력적 힘으로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 정교분리의 본래 뜻이다. 종교가 세상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부 망발을 했다는 말인가. 아모스서를 보라. 선지자들이 종교적 문제 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규탄하지 않았는가. 인간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제대로 실현되면 교회가 콩이야 팥이야 할 필요 없다. 국가 권력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정의와 사랑에 입각해서 평화와 평등이 구현되는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교회가 나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정의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고백은 세상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두 그분의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성서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생명, 평화, 정의, 이 3가지 중요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며, 그에 합당한 증언을 해야 한다. 4대강 사업 반대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에게 정교 분리 원칙을 내세우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그 사람들'이 반성해야 하는 문제다.
4대강 사업은 여당의 정책 입안자들과 학자들이 모여서 진지하게 연구하고 반대공청회도 열어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한 일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소신에서 나온 것이지만 집착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감히 그것에 대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 보인다는 데에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 아무런 반대나 토론 협의를 거치지 않고, 막강한 권력과 소신으로 일단 추진하고 보자는 세력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반대 세력의 충돌은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 민주주의의 ABC에 위배되는 일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는 그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4대강 사업 반대에 참여할 가치가 있다. 참고로 민주주의가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다는 말은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모스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가톨릭이 왜 화가 났는가. 주교단은 한 국가에서 로마가톨릭을 대표하는 단체다. 그 뒤에는 전 세계 7억 5천만 명의 신자가 있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보수적인 분들도 많다. 그런 그들이 여러 차례 세미나 등을 열어 초빙한 전문가의 설명을 경청하며 정부와의 대화를 원했으나 아무리 말해도 정부가 안 오니 어떻게 하나. 그래서 가톨릭 주교단이 반대 성명을 낸 것이다. 한 두 사람이 앉아서 성명서를 낸 것이 아니다.
권력자인 대통령 주변에 예스맨이 넘쳐나고 거기에 편승에 이익을 얹으려는 자들 속에는 자연과 국민에 대한 배려는 없는 듯하다. 생태계의 생물종이 멸종할 것이라는 경고는 한가한 소리로만 들릴 것이다. 자연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성경적으로 볼 때 잘 관리하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지금 4대강 사업은 4대강을 개선한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 중심적인, 경제 중심적인 개선이고, 자연 훼손이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인간의 경제적 이윤동기와 인간의 행복에만 강조점을 두고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이 일에 눈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종교인들도 정부의 설계대로 4대강에 보를 세우고 강바닥을 준설하는 일이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전문가들을 초빙해 묻고 따져본 후 반대하는 것이지 이유 없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범종교계의 연대가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불교와 가톨릭 등 다른 종단은 일사불란한 의견 집약을 해낸 반면 기독교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불교계 인사도 만나고 가톨릭 인사도 만난다. 기자와 각 분야의 지성인도 자주 만난다. 그런데 다른 종교계에 있는 분들을 만나보면 개신교는 도대체 왜 그러냐는 무언의 비난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생태나 전쟁, 남북 지원 문제는 어느 한 종단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지구촌 사회다. 모든 선한 뜻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이 싫으나 좋으나 힘을 모아야 해결될 듯 말 듯 한 문제다. 이들 모두가 사는 지구가 건강해야 종교도 번성한다. 생명 자체를 살리는데 공동 전선을 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연대 문제를 보자면, 각 종교의 상층부에서는 연합 운동을 못하고 있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전주 광주 부산 등에 내려가면 불교와 개신교 목사들이 곧잘 협동하곤 한다. 북한강, 영산강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바닥에서는 이미 다 협조하고 있다. 높은 양반들만 모른다. 특히 환경 문제에는 NCCK 목회자들이 정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조금이나마 면목이 선다. 남북평화문제, 생태문제 등은 앞으로 모든 종단이 서로 연대 전선을 펴나가야 한다고 본다.
4대강 사업에 대해 한기총은 침묵하고 있는데, 이 침묵에 대해 논평한다면.
남한인구 4700만 중에서 절반이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약 2300만 명이 종교를 갖고 있다는 말인데, 그 중의 95퍼센트 이상을 불교와 가톨릭, 개신교가 차지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종단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고 발언도 하는 종단으로 천도교도 있고 유교와 원불교도 있지만, 조계종과 개신교와 가톨릭의 비중이 아무래도 높다.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 국민 전체가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4대강에 대해 불교와 가톨릭은 완전히 입장을 통일해서 이런 방식의 4대강 개발 사업은 안 된다는 반대 기치를 내세웠지만, 개신교만 양분이 되어 있다. 개신교는 크게 보면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흐름과 NCCK로 대표되는 진보적 흐름이 있다. 아마 6:4나 7:3정도 될 것이다. NCCK도 그 안에 순복음 등도 있으니까 4대강 사업에 대해 언급을 안 하다가 최근에야 반대 성명을 냈다. 얼마 전 성공회 대성당에서 4대강 반대 연합예배를 드리면서 그 동안 교파별로 진행해오던 활동이 이번에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한기총 보수 그룹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한국 종교 지형을 놓고 봤을 때, 나는 이명박 대통령을 뽑아 세운 보수적 종파가 현 정치권력의 지지세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국가 통계를 보면 그들의 교세가 6~700만 명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국민들 중 상당수가 그들을 대단히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 듯하다. 시청 광장에서 집회라도 하면 몇 만이 모이니까 국민 전부가 지지 세력인지 아는가 보다. 상당수의 전문가들도 양심의 목소리를 저버릴 수가 없어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본래 서울대 교수들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은 잘 안한다. 국립대 교수니까. 그런데 4대강 사업이 워낙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니까 반대하는 교수들이 더러 생기게 되었다. 전문가와 지성인들도 70퍼센트 이상이 반대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기총은 침묵하고 있다. 한기총이 좁게 보면 한국 개신교를 좌지우지하고 실질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해 정치인들조차 그들을 이용하려고 한다지만 냉철히 보면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입장과 행동에 대해서 쉽게 지지를 안 보냄을 알 수 있다. 한기총의 논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따라서 그 분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는 이해하지만, 공무원 신분으로 지나치게 특정 종교를 부각시키는 일로 인해 안 믿는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것을 한기총은 모른다.
4대강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강에 아무 손을 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환경부나 수자원국 등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있다.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강도 오염이 많이 되었는데, 오염된 하천 지류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준설 작업 같은 것은 누가 막겠는가. 멀쩡한 4대강을 강 살리기라는 미명 하에 그 바닥을 파헤치고 보를 쌓기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이는 신학적 문제요 신앙고백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질서 파괴에 대한 정의의 요청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백번 맞다하더라도 그 일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4대강은 이명박 대통령만의 것이 아니다. 다윗 왕도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못 지었다. 4대강 사업은 큰 국책 사업이니까 점진적으로 국민 여론 수렴을 해서 공청회도 하고, 환경평가도 충분히 하는 등 이 대통령의 임기 동안에는 기초만 하고 그 다음 단계는 다음 정권에서 하게 했다면 이렇게까지 반대는 안 했을 것이다. 일처리와 추진 방법 자체가 문제가 있기에 그 타당성을 떠나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독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기독교의 면면을 보면 누가 총회장 되었다는 소식 등 기독교라는 종파 안에서의 이해관계만을 따지며 날이 저무는 듯하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은 그들을 얼마나 비난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전도가 안 된다. 현재 전도란 자기들끼리의 수평이동과 성도 쟁탈전 밖에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개신교에 지성과 양심, 정의가 살아 숨 쉬고 평화가 흘러넘쳐서 젊은이들이 몰려오나. 아니다. 개신교가 전래된 개화기 이후 130여 년이 흘렀는데 요즘처럼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왕따를 당하고 모멸을 당한 시대가 없었다. 교세가 많이 불어나고 부흥이 되었다는데 왜 그런가. 가톨릭과 불교는 4대강에 대해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고 있다. 그들 안에 다 전문가가 있다. 그런데 한기총은 4대강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침묵해서는 안 될 때 침묵하는 것은 불의한 정책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나중에 역사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 그들은 오늘의 우리 시대를 잘못 읽고 있다. 다른 모든 선진 국가들은 4대강 사업을 포기한지 오래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왜 하려고 하는가. 청계천 복원 사업을 해낸 이명박 대통령이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지금 반대하지만 나중에 잘 한 일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자연은 한 번 잘못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그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대해 모른척한다는 것은 신앙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대신학에서 생태학적 신학 영성이라는 것은 거의 유행이 되어 있다. 생태학적 관점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논의를 하기 어렵다는 추세다. 생태학적 관점의 논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한가한 때가 아니다. 4대강 문제를 떠나서, 인간 문명의 지속 여부의 문제가 점점 다가와 수면에 떠오르게 되면, 설혹 10~20년 이후 인류가 각성을 해서 대대적인 생태환경 운동이 일어나더라도, 그 때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구 생태 환경을 복원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복원 이전에 이미 자연생태계에 위기가 닥쳐 올 것이다. 이미 모든 문제가 생태학적 관점에서 재구성되고 있는데, 4대강 사업은 그러한 흐름을 역행하는 고색창연한 이전 시대의 산물이다. 말은 생태학적이라고 홍보하는데 본질은 자연훼손이다.
하다못해 기업도 생태친화적인 제품을 만드는 등 환경문제에 고심하고 있는데, 생명과 환경을 가장 중요시해야 할 기독교(개신교)가 생태학적 영성과 신학에 이렇게 둔감한 것은 이만저만한 시대착오가 아니다. 역사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 말은 하지만 나도 그런 정도의 용어를 안다는 정도다. 속이 썩어 있으나 겉은 파란 춘천 호반의 수변 도로에서 자가용으로 드라이브하며 '물이 깨끗하고 좋기만 하네'라는 식으로 말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자연을 풍경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물가로 내려가 보고 직접 물에 들어가 봐야 비로소 실태를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