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우리는 서구신학을 충실히 소개하는데 불성실했다”

한국신학 연구를 살리자④- 김균진 교수편(上)

조직신학자 김균진 교수(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명예교수)는 지난 1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적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했다. 지난 기사로는 다 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편집자의 손을 거칠 수 있기 때문에 대담 전문을 게재, 독자들의 풍부한 이해를 돕기로 했다. 다음은 김균진 교수가 한국적 신학에 대해 언급했던 전문이다. 상, 하편으로 구성된다.(도중 [ ]표시는 김균진 교수의 의도를 더 자연스럽게 살릴 수 있는 쪽으로 보정한 것이다. 그 외에는 전문 그대로를 게재했다.)- 편집자주
 
▲한국적 신학 연구의 방향성을 놓고, 조직신학자 김균진 연세대 신과대 명예교수(위 사진)와 본지 김진한 편집국장, 권헌일 객원기자가 대담에 참여했다. ⓒ베리타스

- 한국적 신학의 기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공통질문)
 
한국에서 “학문적 신학”은 1950년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예수교장로회로부터 분리되면서 겨우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때 한국 기독교는 신학의 불모지에 다름 없었다.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도한 서구 선교사들은 대개 보수교회 출신으로서 “학문적 신학”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의료와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인을 실질적으로 돕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한 한국 기독교의 “학문적 신학”은 서구신학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신학”이란 학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1960년대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칼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 등, 서구 신학자들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서구신학을 공부하면서 차츰 한국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심이 눈을 뜨게 되면서 이른바 “한국적 신학”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한국인인데, 왜 서구 신학자들의 신학을 공부해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언제까지나 서구신학의 식민지 노릇을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이리하여 이른바 “한국적 신학” 혹은 “토착화 신학”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성범, 변선환 등, 주로 감리교신학대학의 몇 신학자들을 통해 이른바 “한국적 신학”, “토착화 신학”이 시도되었다. 오늘날 이 시도는 유동식, 김광식, 이정배 등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및 허호익, 김흡영 등 문화신학회 소속 교수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창되고 있다.
 
이 신학자들은 주장에 따르면, 한국의 신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서구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서구의 신학을 수입하고 소개하는 일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한국 신학계는 서구신학의 식민지일 따름이다. 비록 “한국적 신학”을 시도한 신학자들도 “진짜” 한국적 신학을 하지 못하고, 서구신학의 사고방식에 한국적인 옷을 입혔을 뿐이다. 서구신학은 서구의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서양 양복이 동양권에 속한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몸에 맞는” 신학, 우리의 “한국적 상황에 맞는” 신학, 곧 “한국적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적 신학”이 과연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데 있다. 지금까지 시도되어진 이른바 “한국적 신학”을 살펴볼 때, “한국적 신학”은 샤마니즘, 불교, 유교, 도교, 이기론 혹은 동학사상 등 동양과 한국의 전통 종교사상을 기독교 신학의 이름으로 소개하거나, 이들 종교사상의 일부 좋은 내용들을 “한국적 신학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접목시키는 신학적 작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한국이나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적 신학”이요, 그렇지 않는 모든 신학적 작업들은 “한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서구신학의 아류로,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맞지 않는 서구신학의 식민지화된 신학으로 분류될 정도이다.
 
이 같은 신학적 상황 속에서 필자는 한국이나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에 대해 반드시 배타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폐쇄는 자기빈곤을 초래하는 반면, “다른 것”에 대한 개방과 수용은 자기를 더욱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에서 배워야 할 점이 발견될 때, 신학은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 내지 철학사상의[을] 수용하는 신학적 작업만이 “한국적 신학”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의 신학적 작업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지만, 한국 기독교 신학의 전부라 말할 수 없다. 불교나 도교 등 타종교의 사상에 “기독교 신학”이란 간판을 갖다 붙이고 이를 가리켜 “한국적 신학”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타종교 사상에 대한 신학자들의 발표에 대해 “결국 그것은 불교나 도교의 얘기이지, 어떻게 그것이 기독교 고유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느냐?”, “그것은 사실상 중국이나 인도에서 오는 것이지 한국 고유의 것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반응을 들을 수 있다.

- 그럼 “한국적 신학”이 형성되고 발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과 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른바 “한국적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공통질문)
 
▲조직신학자 김균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적 신학이 나아갈 방향성으로 부조리한 우리의 현실에서 참으로 "잘 맞지 않는" 신학을 함에 있다고 역설했다.ⓒ베리타스
“한국적 신학”을 주장하는 여러 신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한국적 신학”은 “한국적 상황”에 잘 “맞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 잘 맞으면 한국적 신학이요, 한국적 상황에 맞지 않는 신학, 곧 한국적 상황과 무관한 신학은 “한국적 신학”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한국적 상황”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한국적 신학”을 제창하는 신학자들을 한국인들이 가진 전통적 의식과 사고방식, 한국인들의 전통적 세계관을 가리켜 “한국적 상황”이라 생각한다. 서구신학은 한국인의 의식과 세계관,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들 신학자들은 이에 잘 “맞는” “한국적 신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통적 의식과 세계관과 사고방식은 “한국적 상황”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것은 문화적, 종교적 상황을 가리킬 뿐이다. 과연 오늘 한국인의 삶을 결정하는 “한국적 상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불의와 불공정과 부패, “을”에 대한 “갑”의 비인간성과 냉혹함, 억압과 착취(“갑을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 법의식의 부재, 천민 자본주의의 저질적 물질주의, 돈과 힘, 외모와 명품 등,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천박한 가치관, 상위 1%의 근로자들과 하위 20%의 근로자들의 임금격차가 60배나 되는 사회 양극화, 더욱 더 살벌해지는 사회범죄와 자살자 수의 증가, 생태계의 위기와 자연재난 등이 오늘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한국적 상황이 아닌가? 중국은 언젠가 북한을 삼키고, 일본은 남한을 삼키려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한국의 상황이 아닌가?
 
“참 한국적인 신학”은 단지 한국이나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 내지 철학사상을 수용하고 이에 “한국적 신학”이란 이름을 갖다붙이는 신학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을 결정하는 이같은 현실의 상황을 직시하고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을 시사하는 신학일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처한 구체적 상황에 눈을 감아버리고, 단지 한국과 동양의 전통적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수용하는 것을 가리켜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한국적 신학”을[이라] 한다면, 그것은 “한국적 신학”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 상황과 관계없는 “비한국적 신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맞는”이란 개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한국적 상황에 “맞는” 신학, 한국인의 몸에 “맞는” 신학이란 개념은 좋은 개념이 아니다. 신학은 주어진 것에 적응하고 거기에 “맞는” 학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거기에 “맞지 않는” 학문, 진리를 향해 새로운 변혁을 유도하는 학문이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변혁을 유도하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고 거기에 잘 “맞는” 신학은 주어진 상황을 고착시키며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나쁜 신학”일 것이다.
 
참으로 “잘 맞는” 것은 “잘 맞지 않는”데 있다. 기존의 것에 모순되고 그것의 거짓을 밝히며 진리를 향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참으로 “잘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어가는 것, 망해가는 것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의 나태와 복지부동,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지 않는 이기주의와 부패는 나라를 멸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공직자들이 부패하고 법을 지키지 않을 때, 국민 전체가 차츰 부패와 무법의 늪에 빠진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신학은 이같은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학문이 아니라 “맞지 않는” 학문이어야 한다. “맞지 않음” 곧 “모순”이 있어야 비판과 발전이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참된 한국적 신학”의 과제와 전망이 있다.
 
- 한국적 신학의 주요 전거, 즉 리소스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공통질문)
 
신학의 기초는 성서에 있다. 따라서 신학은 성서에 근거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성서의 중심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근거되어야 한다. 성서와 성서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그의 삶과 말씀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되지 않을 때, 신학은 잘못된 종교사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 근거와 규범은 타종교나 철학사상이 아니라, 성서의 중심이 되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성서 속에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들이 숨어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명보호를 명령하는 안식일의 계명, 땅 곧 생태계의 보호를 명령하는 안식년 계명, 종의 해방, 부채탕감, 부의 사회적 환원을 명령하는 희년 계명,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사회정의를 요구하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 죄와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 예수의 십자가의 자기희생과 부활에 관한 말씀 등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들이다. 참 “한국적 신학”은 이같은 보물이 숨어 있는 성서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 속에는 수천 년의 기나긴 역사 과정을 통해 주어진 다양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다. 때로 상충되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더 이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신학에게 어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신학을 전개할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조직신학자 김균진 연세대 명예교수는 성서만이 텍스트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으며, 동양 철학사상은 컨텍스트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신학자들이 한국적 신학 함에 있어서 텍스트와 컨텍스트 간 상호 혼동해선 안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베리타스 

따라서 신학이 성서에 근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서 구절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하거나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제반 상황에 대해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데 있다. 바로 여기에 한국적 신학의 과제와 전망이 있다. 한국적 신학이 올바른 한국적 신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은 한국이나 동양의 전통적 종교사상 내지 철학사상을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 성서에 근거하지 않을 때, 한국적 신학은 기독교 신학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구약의 창세기에서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성서의 중심적 관심은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세우는 데 있다. 바로 여기에 성서의 생명선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메시아적 악속의 전통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을 그의 모든 말씀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는다.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 출애굽과 계약(언약), 희생제물의 제의와 율법,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약속, 이 모든 구약의 내용들도 하나님의 나라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한국적 신학”은 한국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서의 메시아 전통에 충실한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국적 신학은 한국이란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한국 신학자들의 모든 신학적 작업은 동양사상을 수용하든 서양사상을 수용하든 간에 한국적 신학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관심하는 모든 신학적 노력들을 무시하고, 단지 한국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에 신학의 옷을 입히는 것을 한국적 신학이요 그렇지 않은 모든 신학적 작업들은 한국적 신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옹졸한 생각이요 비성서적 생각이다.
 
여기서 한국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수용하느냐 아니면 서구신학을 수용하느냐는 비본질적 문제이다. 본질적 문제는 한국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성서의 주요관심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수용한다할지라도, 또 서구신학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성서의 주요관심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된 의미의 “한국적 신학”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한국적 신학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에 주요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적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그동안 한국의 신학자들이 서구신학을 수입하고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우리가 그동안 서구신학을 수입하고 소개했다면, 얼마나 충실히 수입하고 소개했는가? 이 질문과 함께 나는 한국의 신학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 곁에 있는 일본에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루터전집 등이 오래 전에 번역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그동안 한국어로 번역된 많은 서구신학의 번역서들도 신학자들 자신의 손으로 번역되지 않고 학생들의 손으로 번역된 것이 상당수에 달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서구신학을 제대로 수입하지도 못했고 소개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불성실하였다.
 
이 같은 지적은 한국적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에게도 해당한다. 오랫동안 “한국적 신학을 해야 한다”, “토착화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서구신학자들의 신학저서에 견줄만한 신학저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다. “한국적 신학을 해야 한다”, “토착화 신학을 해야 한다”고 변죽만 울리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른바 “한국적 신학”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서구신학을 배타한다면, 한국 신학계는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있을 것이다. 신학 강단에서 불교나 도교나 샤마니즘의 사상들을 가르치면서 이것을 “기독교 신학”이라 부르겠지만, 성서의 메시아 전통에 충실한 참된 “한국적 신학”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을 포함한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수용하고 거기에 신학적 옷을 입히느냐 아니면 서구신학을 도입하느냐에 있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수용하든 간에 한국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데 있다. 이 일에 도움이 된다면,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이 수용될 수도 있고 서구신학이 수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이 수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같은 시대에 서구교회와 동방정교회의 전통신학은 물론, 생태신학, 생명신학, 여성신학, 해방신학, 흑인신학 등 현대의 다양한 상황신학들을 “서구신학”이라 배타하고, 수백, 수천 년 된 동양의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만을 수용하고 이에 신학의 옷을 입히는 것을 “한국적 신학”이라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이 모든 것에 대해 자기를 개방하고 이들을 포용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고자 하는 성서의 관심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성서적인 동시에 보다 더 풍요로운 “한국적 신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서구신학은 주체와 객체의 주객도식에 따라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이분법에 기초한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분리되고, 이로 인해 철저한 개인주의, 공동체 의식의 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사회의 양극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서구신학의 주객도식은 세계적 차원에서 민족과 민족의 분리, 이로 인한 민족들 사이의 대립과 착취,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서구신학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차별적 파괴와 착취, 이로 말미암은 자연의 파괴와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가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지 않고 이들을 일치와 화합의 관계에서 보는 동양종교의 유기체적 사고방식, 유기체적 세계관을 도입해야한다. 위기에 처한 오늘의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 모든 것을 일치와 화합의 관계에서 보는 동양의 유기체적 사고방식과 유기체적 세계관을 회복하는 데 있다. 우리가 세계 신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전통종교의 좋은 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서구신학에 대한 이 같은 비판 내지 배타적 태도와 함께 한국의 일부 신학자들은 이른바 “한국적 신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매우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전통 종교와 철학사상이 지배했던 동양사회, 유기체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동양사회, 구체적으로 우리의 한국사회는 정말 이상적인 사회였던가? 모든 인간이 유기체적 관계성 내지 유대 속에서 화합하고 일치하는 사회, 대립과 갈등 대신 조화와 일치가 있고, 불의와 불공정과 부패 대신에 정의와 공의와 청렴이 가득했던 사회였던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전통사회는 소수의 지배계층과 대다수의 피지배계층, 힘을 가진 “갑”과 힘이 없는 “을”이 분리되어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 불의와 불공정과 부패, 강자에 대한 약자의 탄식과 울분이 가득한 사회가 아니었던가? 경조사를 통해 떼돈을 챙기고, 시집 온 며느리에게 더 많은 예단을 요구하고, 며느리를 종 부리듯 부려 먹으려는 더럽고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이 오늘도 우리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한국과 동양의 전통 종교나 철학사상에 이 같은 문제의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 종교나 철학사상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마치 구원의 길이 전통 종교나 철학사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것을 텍스트로 삼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 “한국적 신학”이 참 “기독교적” 한국신학이 되고자 한다면, 성서를 텍스트로, 전통 종교나 철학사상은 컨텍스트로 삼아야 할 것이며, 성서의 중심문제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에 초점을 두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적 신학의 주요 문제는 전통 종교사상이나 철학사상을 수용하느냐 아니면 서구신학을 수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 위에 세우는 일에 있다. 바로 여기에 한국적 신학의 과제와 전망이 있다. 계속.
 
[대담 및 편집 정리: 김진한 편집국장, 권헌일(연세대 신과대 4학년)·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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