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포괄주의(4): 트뢸취
트뢸취의 글은 '세계종교들 가운데 처한 그리스도교의 상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앞에서 슈바이처는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개했는데, 이와 비교해도 꽤 다른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슈바이처의 글이 세계종교와의 비교에서 그리스도교가 나름대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면, 트뢸취의 글은 그리스도교의 배경으로서 다른 종교들이 갖는 비중이 더욱 커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제목부터 거슬릴 것입니다. 배타주의로 분류되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인'은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들, 말하자면 '비그리스도교인'(non-Christian)을 가리킵니다. 배타주의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 아닌 것만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그 기준입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라 하지 않고 '비그리스도교적인 종교들'(non-Christian religions)이라는 표현을 쓰는 배타주의의 입장에서는 '세계 종교들 가운데'라는 묘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포괄주의는 '다른 종교'를 말합니다. '세계종교들'이라는 표현으로 말입니다. 포괄주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비그리스도교라고 불렸던 것들은 단순히 비그리스도교로 묶여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세계를 구성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다른 종교들'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다름'이 어떻게 될까요? 배타주의에서는 '같음'만이 옳음이고 다름은 '그름'이었습니다. 이와 견주어 포괄주의에서는 '같음'은 우월하고, '다름'은 열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포괄주의는 '다름'과 관계하고 비록 우월성을 근거로 할지언정 다름을 감싸 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100점이라면 다른 종교들은 80점, 50점, 20점짜리라는 식입니다. 그리스도교는 100점이기에, 20점짜리 종교에게는 80점만큼 가르쳐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포괄주의가 말하는 '선교'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트뢸취를 보십시오. 자세히 보기 위해 그의 자전적 회고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나는 이제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 나의『절대성』(Absolutheit)라는 책에서 신학의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들을 시험해 보았다. 그것은 모든 신학 전반의 근본개념들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서 역사의 상대성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절대적 가치를 근거지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두 개의 개념을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86)
말하자면, 트뢸취는 사상사적으로 전통형이상학의 뿌리인 이성의 보편성을 근거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이를 새로이 부상한 역사의식이 뿜어내는 상대성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성립 가능한 것으로 설정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트뢸취가 쓴『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라는 저작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트뢸치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절대성의 근거로서 기적과 진화를 들고 있습니다. 트뢸취는 기적이라는 초자연적 사건이야말로 그런 역사적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헤겔식의 역사 진화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입증한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그 무엇이다"(86). 그는 이토록 단호하게도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상정한 후에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엮어보려고 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증거는 전체 종교사이며 그 종교사의 명백한 진행과정이다. 역사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통일성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크기와 모든 것을 움켜쥐는 힘의 예증이다.(88)
나는 그리스도교의 보편타당성이 그리스도교의 계시신앙과 진리 주장이라는 방법 속에서 특징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법 속에서 그러한 기초 세우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92)
바로 이것이 트뢸취가 일찍이『그리스도교의 절대성』에서 주장했던 바입니다. 과거에 그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완성으로서 보편적인 절대성을 지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포괄주의의 고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교에서 나타나는 기적이 역사성, 상대성, 유동성을 다 넘어설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라고 보고, 역사의 완성으로서, 특별히 진화론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역사의 성취로서 그리스도교의 위상을 잡은 것입니다. 일견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 스스로 전환을 겪습니다. 아니 역사의식의 급격한 부상과 인간자화상의 전환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은 결국 그를 이성의 보편성만 붙들고 늘어지는 고전적 사유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회심이지만 21세기 이 마당에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무수한 영혼들에게 귀감이 될 만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 연구의 의미는 규범적인 진리 및 가치들의 연속과 역사적 사유 사이의 충돌을 깊이 느꼈다는데 있다"(84). "규범적인 진리 및 가치들의 연속"과 "역사적 사유"가 충돌한다고 합니다. 핵심적인 주장의 비교라는 점에서 보면, 전자는 배타주의에 해당하고 후자는 포괄주의에 해당합니다. 트뢸취가 이렇게 진리와 역사를 대비구도로 보고 그 사이에서 긴장과 충돌을 느꼈다고 고백한 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합니다. 이미 근세라는 시대가 과학에 힘입어 고전시대의 초자연에서 자연으로 차원의 전환을 이루었지만 인간을 주체와 중심으로 설정하려는 근세가 진행함에 따라 자연이라는 차원이 점차로 인간 이해의 범주로 부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 자체의 자기전개과정으로서의 사회와 역사로 뻗어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초기인 16세기에 과학이 추동하는 자연으로의 전환이 18세기에 사회로, 19세기에 역사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은 좋은 증거입니다. 시대의 사상적 흐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흐름의 정점에 나타난 헤겔은 전통형이상학과 근세전기 인식론이 여전히 소중히 모시고 있었던 이성의 보편성과 이제 자연의 자기전개로 부상한 사회/역사의 구체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그의 역사철학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해석을 시대정신으로 공유한 당대의 사상가들이 새삼스럽게 역사를 공통화두로 가지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트뢸취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니 과연 고전적 이성의 보편성에 대한 향수를 아직 진하게 간직한 채 새로이 부상한 역사의식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전환으로 가봅시다. "규범적인 진리 및 가치들의 연속"은 배타주의에 해당하고 "역사적 사유"는 포괄주의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종교간 관계유형은 사상의 흐름과도 상당한 정도로 궤를 같이 합니다. 포괄주의는 근세의 지적 성취와 같은 맥락에서 개진된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고-중세적 사고인 배타주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트륄취는 이를 "규범적인 진리 및 가치들의 연속과 역사적 사유 사이의 충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자체'와 '대상' 사이의 충돌, '객관'과 '주관'의 충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어서 그는 "역사적 사유"의 구체적인 항목을 말합니다.
역사 비평과 역사주의가 합리적이든 전통적이든 간에 단순히 규범적인 가치들의 의미에 충격을 가하고 위협한다는 사실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 만연되었다.... 우리에게는 모든 문화적 가치 또한 최상의 문화적 가치의 상대성과 유동성에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유럽 문화권의 연구가 더 많이 존재한다.(85)
여기서 주목할 만한 표현은 "상대성," "유동성"입니다. 역사라고 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의 새로운 범주가 등장해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포괄주의는 우연히 발생한 유형이나 입장이 아닙니다. 고-중세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시대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초시공적으로 설정되는 규범적 가치와 역사적인 상대성 또는 유동성 사이의 거리에 주목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배타주의와 다원주의 사이에서 이 입장은 얼핏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배타주의의 유산과 다원주의의 맹아 둘 모두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제 트뢸취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뒤로 하고 이 글에서 자신이 과거에 했던 작업을 스스로 깹니다: "그런데 나는 이 기적과 진화론적인 역사관이라는 두 이론들이 불안정한 것으로 특징지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88). 역사의 눈으로 현실을 보니 이념이란 '추상'일 뿐이라고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그 추상적 이념 안에서 '하나'라는 통일성을 전제로 설정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발상인가를 폭로하면서 개탄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가능성과 성향들이 엮여 역사적인 과정을 이루어간다는 데에 본격적으로 주목합니다. 이 점이 앞서 살폈던 슈바이처와도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실제의 종교사는 모든 종교의 이러한 동질성, 이러한 자연적인 노력으로부터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교의 이념은 자체가 하나의 추상이다. 그것은 결코 통일성이 아니며, 즉, 그리스도교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이다.... 모든 시대마다 다른 무엇이며 게다가 신조들로 쪼개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철두철미 최후에 도달되는 종교적 이성의 통일성과 명확성으로 특징지워질 수는 없으며 자기 편에서 자체 내에 상이한 가능성과 성향들을 내포하고 있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역사 원리이다.(89)
역사를 읽는 대조적인 두 방식을 보십시오.『그리스도교의 절대성』에서는 역사가 진화하는 가운데 그 정점이 있고, 최고도의 완성이 있습니다. 역사는 정점을 향해서 진행됩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낙관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이에 따르면 마지막 때에 모든 부정적인 계기가 지양되고 최종적인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최종적인 완성은 마땅한 실체가 역사의 과정을 거쳐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정-반-합이 그러했고, 창조-타락-구원이 이런 도식으로 묘사되고 이해되어 왔었습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정신의 자기회복을 통한 완성입니다. 헤겔은 이 정점에 그리스도교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연대기적으로 그리스도교 이후에 등장하는 종교라고 하더라도 최고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판정될 따름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역사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이미 완성의 절정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역사와 함께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