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6)
나의 의도는 그리스도교나 힌두교에 대한 호교가 아니다. 나는 이러저러한 종교나 주의 주장을 변호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중간자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 즉 어디에도 발붙이지 않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처하게 된 실존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파니카 112)
앞서 말한 '인간의 종교적 뿌리'에 대한 서술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뿌리가 '우연히 처하게 된 실존적인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연,' '실존,' '상황,' 이 세 단어에 주목합시다. ('우연,' '실존,' '상황'과 관련해 한 마디 예를 든다면, 폴 틸리히라는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말년에 일본에 가서 교토학파의 선사들을 만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거기서 틸리히는 선사들에게 자신이 유럽지역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불교 문화권에서 태어났다면 선승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틸리히가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되는데 개인의 자각, 선택, 결단이 작용할 여지가 없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 정권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고 그곳에서 신학적 작업을 지속해 나갔을 때 우연, 실존, 상황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묶으면 사람이고 삶입니다. 파니카는 이처럼 종교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철저하게 인간에서 시작하고 인간으로 끝맺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도 '이성적 동물'이나 '생각하는 갈대'가 가리키는 이성이나 사유 뿐 아니라 그것이 다 싸잡을 수 없는 우연, 이를 겪으며 살아야 하는 실존, 그래서 그런 삶을 살아갈 뿐인 상황에서 종교를 읽고 종교간 관계의 마땅한 틀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연, 실존, 상황으로 엮어진 인간이 출발이라고 해도 이것으로 문제의 첫 단추가 충분히 잘 꿰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인간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로 구분되니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하늘과 땅이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해 적용한다면 내부와 외부로 구분될 터이니 파니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서로 다른 성질의 요소를 비교하기 때문에 야기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한 종교적 전통은 내부로부터 판단하고 다른 종교적 전통은 외부로부터 바라보는 데서 오해는 비롯된다. 한 종교에 대한 신앙과 인격적 참여를 가지고 하나의 사실을 안으로부터 바라볼 때에는 그 특수한 종교가 갖고 있는 구체성과 (그리고 그 한계) 그 종교가 구현하고 있는 보편적 진리가 동시에 파악된다. 그러나 한 종교를 외부에서 바라 볼 때에는 이와 같은 구체성과 보편성의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단지 객관화된 가치에 의해서만 그 종교를 판단하게 된다. (파니카 113)
특정 종교 안에 있는 자기는 타자가 속한 다른 종교의 바깥에 있습니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종교에서 내부와 외부로 나뉘는데 종교 안에 있는 자기에게는 구체와 보편이 한 묶음이나 나의 외부인 타자의 종교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종교는 구체성이 보편성인 반면, 타인의 종교는 구체성이 개체성에 머뭅니다. 자신의 것은 보편적이고 남의 것은 개별적입니다. 나의 같음은 남을 지배할 수 있지만 남의 같음은 다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타관계에서 자기가 타자에 대해서 '타자의 자기화방식'이, 자기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방식이 집요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자기와 타자를 천칭저울에 올리면 결코 평형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종교는 특수이면서 보편이고 타자의 종교는 특수이고 개별입니다. 서두에서부터, 그리고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결국 '인간,' 그리고 그것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인간을 재껴 놓고 종교 간 대화를 나누면 서로 원론적 당위성만 말하니 일원적, 통일적 다원주의를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판단중지를 표방하다가 결국 아전인수에 이르게 됩니다. 앞서도 논했지만 아전인수가 부적절할 뿐 아니라 판단중지가 불가능하다는 지론은 이제 파니카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기독교 교리는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유유형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의 표현이었다.... 그 때까지 적합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기독교 제 1 세대들은 당시의 그리스나 다른 어떤 사유유형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바로 이와 같은 유태교적-이교도적 범주의 도움을 빌려서 비로소 기독교적인 경험을 표현하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의 단일한 기독교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스적 개념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적 사실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던 것이다. (파니카 117-8)
한 이름의 종교를 한 단위로, 즉 '하나의 종교'로 설정할 수 없는 역사적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애당초 하나의 동일한 원초적 체험이 있고 후에 각종 개념들을 동원해서 표현하고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해석의 틀 안에서 체험해가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진화하는 가운데 그 종교 자체의 신앙으로 동화되어 들어간 '낯선' 생각에 의해 주로 성립해 왔다"(파니카 124). 그러니 원초적 다름일 수밖에 없고 이는 우연한 상황을 살아갈 뿐인 실존들에게서 벌어지는 체험과 해석의 얽힘 때문인 것입니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인간단위로 더 쪼개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인간도 자기동일적 정체성이 아니라 구성적 상대성으로 살아가는 실존이니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전제하는 기존의 종교간 관계유형이나 종교의 자기동일성을 전제하는 만남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대부분 범주 오류에 해당합니다.
전체적으로 추려봅시다. '무엇' 물음이 동일적 정체성을 요구하면서 나왔고 배타주의가 되었습니다. '누가'의 등장과 함께, '누가'와 '무엇'의 관계에서, '누가'를 근간으로 '무엇'과 '어떻게'가 결합하는 근세적인 사고방식이 확립되었고 저 세 물음이 역학구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포괄주의가 생겨났으며 초기 다원주의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집요하게 관철되어 온 '무엇'의 물음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즉 자기동일성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적 상대성'을 제안하는 후기 다원주의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흐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자기 동일성'에서 '구성적 상대성'으로의 전환입니다. '벌거벗은 순수한 신앙'에서 '다종교적 체험에 의한 역동적인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현실에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자기동일성'을 가능한 것처럼 착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오늘날 일상에서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직하기만 하다면, 아니 볼 눈만 있다면, '구성적 상대성'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종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다종교적 체험'입니다. '다름'이 들어와서 '같음'이 되어갑니다. 기존의 배타, 포괄, 다원이라는 입장들은 하나의 종교가 지니는 자기동일적인 정체성을 전제로 이름이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 전제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종교의 역사를 볼 때도 그러하고, 그보다도 앞서 인간이 이미 우연, 실존, 상황에 얽혀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자기와 타자의 경계를 잘 설정하는 것이 자기를 잘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자기폐쇄성의 족쇄이고 억압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류가 경험하면서 이르게 된 오늘날의 통찰입니다. 이 통찰을 이어받아 파니카는 종교와 인간을 새로이 볼 것을 요청합니다.
종교적 의식이 어떤 정체적인 것이라면 ... 지금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은 이미 잘 "접혀져 있던" 것을 그저 펼쳐 보이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종교적인 의식 안에는 발전이 있다.... 이미 완성된 형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죽은 언어일 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언어는 내일이면 규칙이 될지도 모르는 오늘날의 실수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갖고 있다.... 성장 안에는 새로움 뿐 아니라 과거와의 연속성도 자리 잡고 있으며 ... 성장, 그 속에는 자유가 있다.... 성장은 연속성과 발전을 의미하여 또 변형과 혁명까지도 함축한다.... 성장은 또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파니카, 132, 133, 134, 135)
계시라는 표현에 이미 그럴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계시에 대한 천박한 오해가 종교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완제품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담은 종교란 우연한 상황을 살아야 하는 실존과 궤를 같이 하니 발전, 성장, 실수, 연속성, 새로움, 변형, 혁명, 삶, 죽음, 부활 등의 넉넉한 공간에서 엮여 가는 것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그러니 어느 때나 어디서나 종교는 절대라는 이름으로 거기 그렇게 머물러 있는 우상이 아닌 것입니다. 발전과 성장 뿐 아니라 실수와 넉넉함이 우상화를 거부합니다. 인간의 집요한 우상화경향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실 우연, 실수, 삶, 죽음 등이 우리로 하여금 안정을 제공해 줄 것으로 여겨지는 우상을 숭배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우상파괴를 마땅한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죽음과 얽힌 삶이란 과연 그렇게 역설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파니카는 지금까지 추려낸 그의 긴 논의를 '우상파괴'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 구성적 상대성, 다종교체험, 체험과 해석의 불가분리, 아전인수의 부당성, 판단중지의 불가능, 종교적 성숙 등 모든 논의는 결국 우상파괴를 귀결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종교간 관계 논의가 결국 신앙성찰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마땅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새로운 삶과 함께 동시에 죽음도 갖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우상을 우리가 끊임없이 파괴해야만 한다는 사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의 눈과 귀를 막아 스스로를 폐쇄시킨 채 하늘만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과거만을 뒤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이웃을 무시하고 다른 아무것도 더 배울 것도, 또 변화시킬 것도 없는 불요불굴의 종교를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그는 다리가 비틀거리고 마음이 두려움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바다로 뛰어들어 걷기 시작해야 한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이기에 자라나는 씨를 억누르고 겸손한 인격적인 싹을 꺾으며 피어나는 심지를 꺼버린단 말인가? (파니카 136)
'사방에서 밀려드는 우상을 끊임없이 파괴해야만 한다는 사실,' 즉, 우상파괴는 우리의 과제입니다. 파니카는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 줄기차게 목청을 돋우어 왔습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가진 기존의 인간관, 종교관 등 이 모든 것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우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요불굴의 종교'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제 우상파괴는 '두려움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업입니다. 파니카는 이 우상파괴 선언을 의문문의 형태로 끝맺습니다. 이는 우상파괴라는 요청이 삶의 특정 순간에 완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우연, 실존, 상황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며 끊임없이 해 나가야할 과제임을 일깨워 줍니다. '종교간 대화'로 표현되는 다름과의 만남은 결국 우상파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타자에게 무엇을 베풀거나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윤리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자신의 깊이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동일성의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니 오히려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위해 종교간 만남과 이것이 귀결시키는 우상파괴는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부수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는 믿음이 참될 수 없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이제 이를 깨닫고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이와 같은 다종교상황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가장 맞갖은 뜻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