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4)
다종교적 체험이 일으키는 의심과 모험이 신앙을 오히려 역동적이게 한다는 역설적 통찰은 물론 파니카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더욱 입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체험과 해석의 관계에 대해 논의합니다. 이 둘의 불가분리관계로부터 신앙의 역동성은 일상적인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비단 의심이나 모험과 같은 비일상적인 계기들에서만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역동적인 신앙과 이를 정형화시켜온 교리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이 교통정리를 시도합니다.
먼저 체험과 해석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하면서 그를 겪습니다. 이를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겪을 때 인간은 동시에 '해석'합니다. 경우의 수는 상당히 복잡하지만 적어도 아무런 전제 없이 그 사람을 그냥 겪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 사람만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겪고 있는 나 자신도 겪어갑니다. 이를 놓고 파니카는 어떻게 말할까요? 해석하면서 체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곧 해석이라는 데에 이르려는 목적 아래 어떠한 작업을 시도하는지 봅시다. 거칠게라도 체험을 '하나'로, 해석을 '여럿'이라고 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봅시다. 통속적으로 하나의 체험에 여러 해석이 덧붙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다시 동일성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삶을 묻는 여섯 개의 물음인 '무엇,' '어떻게,' '왜,' '누가,' '언제,' '어디서' 중 '무엇'이라는 물음으로 학문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 '누가'가 등장하고 '누가'와 '무엇'의 관계를 향한 '어떻게'가 나옴으로써 세 개의 물음이 새로운 역학을 엮어냈지만 여전히 '무엇'을 향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고전기를 결정적으로 붕괴시키고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근세 인식론조차 결국은 '무엇' 물음에 봉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로 해결이 안 된다는 틈새는 보았지만 결국 '하나'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말한 헤겔 사상은 그 좋은 예입니다. 이를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비판한 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이니 길게 잡아야 이제 한 세기 반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하나에 대한 반동은 인류 문명사를 놓고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현실 종교는? 여전히 '무엇' 물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경향이 강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종교영역에서 '무엇'에 대한 지극한 향수를 갖습니다. 하나가 주는 안정감이란 이루 말할 것 없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감이라는 것이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자기기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 읽고 들으며 그래서 아는 대로, 보이는 만큼 새깁니다.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종래 동일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접수가 안 됩니다. 동일성의 관점에서는 체험이 먼저 있고 해석은 체험에 대해 덧붙여진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하느님 체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차후에 마태의 해석이나 바울의 해석이 있듯이 각자의 해석이 벌어진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 뜻을 풀며 새기는 해석의 꼴과 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시는 장면과 계기가 성서를 이루고 있는 여러 문서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것은 좋은 증거입니다. 이토록 체험과 해석은 분리불가입니다. 인간은 체험할 때 이미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겪습니다. 체험하면서 해석하고, 해석함으로써 체험합니다. 동시에 함께 엮어지니 '구성적 상대성'입니다. 삼라만상이 그렇습니다.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 믿음을 이루는 '다종교적 체험'도 바로 그렇게 구성적 상대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구성적 상대성과 이를 토대로 한 다종교적 체험은 그러한 하나의 허상을 깨고 기만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반복하지만, 구성적 상대성으로 인해서 우리 믿음은 다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진리와 해석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전적인 사유에서는 진리는 오로지 하나였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하게 다가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리관이 현대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폭력이었습니다. 억압이었습니다. 이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도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진리'를 내세워 그들의 현상유지를 위해 그렇게 억압의 폭력을 휘둘러왔었습니다. 못 가졌고 힘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항거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수가 급팽창하게 된 현대에 와서의 일입니다.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영아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인구가 급팽창하게 되었고, 의학을 포함한 과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불가피하게도 못 가진 자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분연한 항거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가진 자를 기준으로 하는 동일성이 진리의 원형으로 군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같음의 지배가 아니라 다름의 항거가 진리의 얼과 꼴, 틀을 뒤흔들었습니다. 힘없이 속박당하는 무수한 다름들을 자유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진리가 아니라는 분노의 절규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여기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실현될 가능성에 더욱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진리는 현실 상황에서 자유케 하는 사건으로 새겨지는 해석의 과정에서 엮어진다고 이해됩니다. 진리와 해석과 불가분리 관계란 이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교리와 신앙에 관한 파니카의 설명을 살펴봅시다.
신앙은 관념이나 형식으로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신앙은 인간의 신앙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을 우리는 교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나의 신앙이 나를 다른 사람들과 결속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떼어낼 수도 있다. 신앙은 인간을 하나로 묶지 않고 소외시킬 수도 있으며, 또 종교도 수직적인 결집이 아닌 수평적 이산을 야기할 수도 있다.... 실재적인 종교의 진화에 있어서의 이 두 가지 경향 ... 그것은 단지 신앙이 교리와 혼동되어 왔음을 시사할 뿐이다. 대화가 중단되고 사람들이 서로 격리된 채 살아가는 순간 신앙은 어쩔 수 없이 교리로 변하여 배타주의를 조장하게 된다.... 신앙이 신앙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교리를 필요로 한다. 교리는 신앙은 아니지만 신앙을 전달해야만 한다. 구체화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줄 모르는 교리, 나아가 스스로를 파괴시킬 줄 모르는 교리는 교리라기보다는 열광주의이다.(파니카 64)
교리가 어떠한 과정으로 만들어졌습니까? 바울 서신에서 살펴볼 수 있듯 초기 교회에는 이미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서신을 통해서 교회를 관리했고 사도 시대 이후에는 교리 논쟁이 있었으며 이후 정경이 확립되었습니다. 2-3세기에 교리 논쟁이 먼저 있었다가 4세기에 정경이 확립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먼저 있는 경전을 바탕으로 교리를 파생시키거나 취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리가 먼저 있었고 경전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원적 그리스도교 시대 때만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단일한 제도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신앙공동체들의 연합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각기 다른 색깔의 공동체들에 일관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부응하여 교리가 제정되었습니다. 후에 정경화 과정에서 많은 상충하는 문서들 중에서 선별하는 데에 교리가 준거로 작동했다는 역사가 시사하는 바는 실로 지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모습은 이를 근거로 교리를 남용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람이 들어오면 우선 교리부터 가르칩니다. 한 사람이 이런저런 삶의 동기와 절박한 이유를 가지고 신앙 영역에 문을 두드리면 그때부터는 바로 거기에 교리의 틀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꽤 오랜 세월동안 이런 방식이 작동했었지만 이제는 별로 먹혀들지 않습니다. 같은 교리가 아니라 다른 신앙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아직도 교리타령하고 있는 교회들이 적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파니카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지적 합니다. "구체화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줄 모르는 교리, 나아가 스스로를 파괴시킬 줄 모르는 교리는 교리라기보다는 열광주의이다"(파니카 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 구성원들은 예배드리고 삶의 체험의 상당부분을 교리적 표현으로 환원하여 나눕니다. 여기서 '동질감'을 느끼고, 안정을 느끼는데 그러다보니 신앙 사이의 실질적 차이와 이로 인한 긴장이 아예 없는 것처럼 길들여집니다. 혹시라도 이런 긴장을 꺼내놓지도 못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꺼내는 순간 불신앙으로 매도되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질의 문화적 세계 속에 살고 있을 때는 대부분 신앙과 교리 사이의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교리의 권위주의적인 공식화에 불과한 도그마를 마치 신앙 그 자체로 여기기 때문에 사실상 그 도그마가 신앙의 도그마라는 사실을 절반쯤 망각하게 된다. ...문화적인 변화나 종교간 만남을 통해서 지금가지 신앙과 결속되어 있던 개념이 그 확고함과 일치성을 잃어버리게 될 때 위기가 도래한다. ...이는 교리의 위기이나 이내 신앙의 위기로 전환된다. 이 위기는 대개 ...비타협적 태도로 말미암아 야기된다.(파니카 64-65)
교리가 자신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이를 살생부의 기준으로 삼았던 역사를 고수하려는 듯 교리열광주의가 아직도 판을 치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하는 데도 아랑곳없이 진리의 이름으로 착각에 빠져있는 교리주의자들을 구원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진실로, 교리는 강을 건너는 배와 같은 것입니다. 강을 건너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건너서 산으로 올라가는데 짊어지고 갈 것은 아니겠지요. 교리를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내려놓자는 것입니다. 교리도 못 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교리 초월입니다. 그래야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리가 신앙에 대해 지니는 역할과 의미는 그러한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이미 다종교적 체험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리라는 형식의 용어묶음에 더 이상 기만당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추리자면, 진리와 해석의 불가분리 관계에서 '하나의 종교'는 논리적 근거를 잃습니다. 체험과 해석의 불가분리 관계에서 '하나의 종교'는 현실적 근거를 잃습니다. 현실에서 구성원 각자가 지닌 신앙의 결을 따라 자기신앙, 자신의 종교적 욕구와 관련해서 교리의 뜻이 새겨집니다. 체험과 해석의 분리불가능성을 교리와 신앙에 적용시키면 이렇게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근본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 식으로 풀자면 '있음'이나 '앎'이 아니라 '삶'이 기본단위입니다. 이에 호응하듯이 파니카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해 줍니다:
그리스도교인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어디에나 현존하는,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경험 영역 밖에도 현존하고 있는 진리의 실재[있음]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이 진리를 자기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언어[앎]로 전달한다. 나아가 그는 이 진리의 의미[삶]를 오직 그 전통적인 용어로써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파니카 65)
그러니까 있음으로서의 실재도 앎으로서의 언어로 전달되지만 삶으로서의 의미로 새겨짐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뜻이 엮어지는 것이니 이 층위들의 얽힘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은 교리로 축소될 수 없고 살아갈 뿐인 생동성을 핵심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교리는 하나의 동일한 신앙에 대한 이러저러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극단주의"는 배격되어야 하며 "바로 이 때문에 종교의 초월적 통일성을 운운하는 것은 그것이 논의되는 제반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이 갖고 있는 내재적 교리로 머물러 있지 않는 한에서 참될 뿐"(파니카 67-68)인 것입니다. 이처럼 파니카는 교리와 신앙의 긴장관계를 파고들어 분석하고서는 이를 토대로 서구 그리스도교가 귀결시켜 온바 교리들의 비교를 중심으로 공통성을 추려내려는 통일적 다원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구성적 상대성이 드러내주는 다종교적 체험에 뿌리를 두고 신앙의 역동성을 강조하려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