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2)
라이문도 파니카는 동아시아권 사람이며 힌두교에서 로마가톨릭으로 전향했다가 다시 힌두교로 돌아갔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실험장이 되었는데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개종'이라기보다는 '가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쪽에 다른 쪽이 덧붙여지는 것입니다. 이는 동아시아권에 속해 있고 그리스도교인을 자임하면서도 그 안에 다양한 종교성을 지니고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한국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한국인을 구성하는 종교적 심성의 커다란 부분은 무교와 유교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에 들어온 지 1700년이나 된 불교는 그렇지 않을까요? 연구자들은 불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무속화되었기 때문에 종교적 기층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핵심 종교적 심성은 무교와 유교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어떠한가요? 아무리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해 인구수가 상당하더라도 이 현상은 한국 그리스도교 현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은 배타, 포괄, 다원주의로 이어지는 서구의 관계논리와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켜줍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파니카의 인생실험은 참조할만합니다. 다원주의와 비슷해 보이지만 파니카는 앞서 니터나 스위들러가 말하는 '통일적 다원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결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파니카의 입장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요? 함께 찾아봅시다. 그는 우선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이라는 다소 번거로운 표현을 씁니다. 우선은 이를 따르면서 보다 적절한 표현을 만들어보는 것도 뜻이 있을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은 두루뭉술한 보편주의나 무분별한 혼합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조잡한 배타주의나 헛되고 맹목적인 개인주의도 배격한다. 이와는 달리 에큐메니즘은 보편과 특수의 두 양극을 복되게 결합하고자 노력한다. 이 두 양극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긴장을 이루고 있다. (파니카 44)
보편과 특수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는 니터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파니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무엇을 바꾸고 덧붙였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배타주의는 특수에서 출발해 이를 전제로 잠재적 차원에서 보편성을 추구합니다. 이와 달리 포괄주의는 보편적 기준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다른 아랫것들을 포함합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는 니터의 예를 보더라도 보편과 특수의 긴장을 말하는 데 보편이 특수로만 나타나지만 하나의 특수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방식으로 추립니다. 그러기에 여러 특수가 하나의 보편으로 이어진다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통일적 다원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견주어 파니카는 어떠합니까?
에큐메니즘은 보편과 특수의 두 양극을 복되게 결합하고자 노력한다. 이 두 양극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긴장을 이루고 있다.... 우리 시대가 열렬히 추구하고 있는 자기 동일성은 개체성(이것은 유아론으로 귀결된다)이나 일반성(이것은 소외로 귀결된다)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존재의 씨줄과 날줄의 엮임 속에서 우리를 형성하는 구성적 상대성이다. (파니카 44)
이 부분을 잘 곱씹어야 합니다. 긴긴 역사 속에서 인간은 동일성의 방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그렸습니다. 영어표기에서 identity라는 말이 '정체성'으로도 읽히고 '동일성'으로도 읽히는 것이 좋은 증거입니다. 정체성은 동일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일성이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이념을 반영하는 일상어법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국적이지만 종족 개념과도 자주 얽혔습니다. 한국을 한민족과 잇고 한민족이 동일하게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식의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작금의 현실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은 더 이상 종족 개념으로만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어떤 국가나 종교에서도 통용이 가능한 자기동일적 정체성이 최소 단위로 설정될 수 있다는 그동안의 정체성 이념은 현실이 다양해짐으로써 와해되고 있습니다. 사실 태초부터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태동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지역에서도 1세기 그리스도교와 2세기 그리스도교는 다릅니다. 로마가톨릭이 막 들어왔던 18세기 한반도의 그리스도교와 개신교가 들어온 19세기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나아가 다양한 종파들로 분산되고 더욱이 다른 종교들과 관계가 점차로 더욱 진하게 얽혀가는 20-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나갈까요? 어떤 시대와 장소를 기준으로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가늠해야 할까요? 예수와 그 제자들이 활동했던 당시의 이른바 '시원적 그리스도교'일까요? 한스 큉은 이를 제1 패러다임으로 보는데 그에 의하면 이 패러다임은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도 정착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요? 2천년 후 한국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어떠한 모습이 될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구성적 상대성'입니다. '구성적 상대성.' 이 말은 정체성이라는 것이 지금도 만들어져가고 있으며 더욱이 상대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동일성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완결된 채로 주어져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면 이것이 생동적인 인간의 삶과 믿음을 엮어내는 꼴로서는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이 무수한 다름들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는 현대의 진단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 공간으로 엮여져 가는 삶이라면 움직이고 바뀌면서 만들어져가는 것이니 구성적 상대성이 보다 적절한 범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정체성은 더 이상 단순한 동일적 정체성이 아니라 비동일적 정체성(non-identical identity)이라는 것입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것이 현실에 더 적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구성적 상대성이란 바로 이 비동일적 정체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 상대성은 확정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조정되어 갑니다.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합니다. 파니카는 이것이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종교 역시 '구성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를 현대 문화학자들은 '혼종성'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자기동일성의 방식으로 정체성을 일구어온 흐름에 대한 혁명적 전환입니다. 상대성은 비동일성, 변화, 차이, 가변성을 포함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겠느냐는 공격을 받게 될 것임을 쉬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과학주의가 다르듯 상대성과 상대주의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정반대이기까지 합니다. 이토록 전율적인 통찰을 파니카는 다음과 같이 읊조립니다.
그는 상대성을 인정함으로써 상대주의의 유혹을 극복하였다. 모든 것이 불가지론적이고 무차별적인 상대주의로 전락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모든 것은 철저한 상호 의존에서 비롯되는 궁극적인 상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 안에서의 작용이며 역사의 역동성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니카 45-46)
상대성과 상대주의를 혼동하는 통속적 곡해에 대해 이보다도 더 통쾌한 교통정리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글귀는 좀 새기고 외워두어도 좋을 듯합니다. 이제 구성적 상대성은 현실에서 나의 종교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방식입니다. 돌이켜 봅시다. 내가 내 종교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색창연한 이유를 들이댈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미 익숙하여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고등종교는 '자기'를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만 사실 우리는 종교적인 믿음을 통해 더욱 진하게 '자기'에게 돌아오는 셈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는 더 추적해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시작과 종착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자기'는 과연 정당한가요? 그리고 그러한 정당성 주장에 불교, 그리스도교 등의 종교적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온당한가요? 파니카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존재와 행복, 인간에게 놓여 있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에 관계하고 있다. 종교적인 용어는 번역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와 언어 속에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삶으로 나오는 말이다. 즉 우리들로 하여금 대상의 세계 속에서 자리 잡고 살도록 해주는 인식적 기호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과 신의 세계 속에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똑같은 용어에다가 여러 가지 다른 의미층을 부여하고 있다.... 종교는 용어처럼 번역될 수 없다.... 이 말을 번역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관을 이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적인 통찰력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말을 만들어 낸 통찰력이 함께 이식되지 않으면 안 된다. (파니카 46-47)
말하자면 자기로서의 인간이 단순히 자기동일성으로 엮어지기보다는 이미 자기가 들어있고 자기를 구성하는 세계관과 그 세계관이 지니고 있는 통찰력의 얽힘으로 엮어져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도 그 종교가 터하고 있는 배경으로서의 세계관과 언어 등 이미 종교 자체를 엮어내고 있는 틀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몇 개의 특수용어들을 기계적으로 번역한다고 전달되거나 이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어가 아니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앎이 아니라 삶이 관건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앎에서 보면 종교의 본질과 정체성이 자기동일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앎이 다 잡아낼 수 없는 삶이라는 넓이와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본질적 자기동일성이라는 것이 매우 지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앎으로 다 풀어낼 수 없는 구성적 상대성의 통찰력이 핵심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앎의 형태로 전달되고 이식될 수 없으며 오직 겪어내는 삶의 과정에서 더불어 나누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대화의 장에서 도표를 그려놓고 줄을 긋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소통불가 현상에 대한 책임을 방기해도 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넘어서 통찰하는 것은 종교인의 사명이고 임무입니다. 특히나 타종교인, 혹은 비종교인과 만날 때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역할 책임이 종교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구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말 또는 언어란 단순히 일대일로 교체하여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을 포함한 통찰력을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잠정적인 표현인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도 이것을 가리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종교조차도 자기동일성의 논리가 아니라 구성적 상대성의 방식으로 엮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