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 에스테야(Estella): 5시간 (22.4Km)
어제 묵었던 마을을 빠져나오다보면 아름다운 다리 하나를 건너게 되는데, 이 다리의 이름은 마을의 지명과 같다. 마을의 이름이자 다리의 이름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즉, '여왕의 다리'이다. 이 다리는 여섯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있고 10-12세기 사이 유럽에서 유행한 로마네스크의 양식을 띠고 있다.
전해지기로는 11세기 나바라 왕국(Reina de Navarra)의 여왕이 순례자들을 위해 이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여왕의 다리.' 이곳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여왕님께 조용히 감사인사를 드려본다.
산티아고로 떠나기 전에 가졌던 염려 중 하나는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을까, 였다. 하지만 기우(杞憂)였을까? 앞선 걱정과는 달리 며칠 만에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길에 관한 것은 그리 큰 걱정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계절에 따라 풀과 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란 통에 표지판이 잘 보이지 않을 순 있다. 때론 화살표를 잘 표시해 두었어도 못 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건 순례자 자신이 어떤 생각에 깊이 잠겨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니 까미노 화살표와는 무관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순례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나 화살표를 발견하지 못해 길을 잃은 것만 같을 때에도 의지할만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동료 순례자들'이다. 나의 앞뒤에서 걷고 있는 이들이 길의 새로운 표지판이자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순례자들을 나침반 삼아 걸으면 된다. 그럼 자연스레 나 또한 뒤에 걷는 사람의 앞선 지표가 된다. 이는 감각의 차원이기에 본능의 레이더만 잘 켜두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걷게 되는 곳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밤삼킨별이라는 별칭을 가진 작가 김효정은 그녀의 책에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놨다. "그저 가까이 혹은 멀리에서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마음의 유대는 더 특별하게 완성된다." (김효정, 『미래에서 기다릴게』, 허밍버드, 2014, p.42)
그랬기 때문일까? 국적과 나이, 신분과 직업이 달라도 순례자들 서로는 눈빛과 미소로 마음의 유대를 나눈다. 이 유대감이 서로의 현존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참 이상하지. 일상을 벗어나면 사람들은 어찌 이렇게 마음이 넉넉해지는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다.
사실 오늘은 엄청 짜릿한 날이기도 하다. 전날 맞은 비 때문에 감기를 선물 받았고 Bar에서 먹은 상한 빵과 카페 콘 레체(café con leche, 스페인식 밀크 커피를 말한다) 때문에 배탈이라는 사은품까지 받게 됐으니 말이다.
빠져나간 몸 속 수분의 균형을 맞추고자 음료를 마시자니 당장 밀밭으로 뛰어가야 할 것 같고 아무것도 먹지 않자니 탈수현상으로 정신마저 혼미하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걷기 위해선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를 충전하자니 몸이 받아들이질 못하니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이토록 새로울 수가 없다.
더구나 배탈 때문에 밤새 한숨도 못 잤으니 오늘의 순례는 기적의 순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그렇게 오늘은 열심히 걸어 흘린 '땀'과 컨트롤 미스miss로 민망함을 당하지 않으려는 긴장의 '땀'이 조화를 이룬 날, 그 민망한 은총이 온 몸을 적신 날이다.
아, 물론 원하면 어디서든 하루 더 쉴 수 있고 언제든 자신이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춰도 되는 곳이 바로 이곳 '까미노'이다. 미련한 순례는 하루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