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 소망의 뿌리였던 어머니의 희생

최만자의 나의 삶, 나의 이야기(완결)

manja
(Photo : ⓒ최만자 선생 제공)
▲일제 강점 말기 만주에서 태어나 자란 최만자 선생

어머니의 희생과 고난을 딛고 우리 자매들은 잘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고생을 한 분은 어머니만이 아니라 큰언니의 희생이 함께 하였다. 어머니에게 큰언니는 남편이요, 아들이요, 유일하게 자신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피난처요, 위로자였다. 장사 같은 것에 능력이 없으신 어머니를 대신하여 큰언니는 여학교를 나오자마자 곧장 어머니와 함께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그리고 나의 대학 생활까지 그 뒷바라지를 오히려 크나큰 즐거움으로 감당해 주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자주 집을 비우셨고 어린 우리들을 다독거리며 먹을 것을 챙겨 주던 이도 큰언니였다.

우리 가족이 경험한 이 특별한 이야기들은 아마도 한편의 소설로 엮어질 수 있을 정도이다. 요즈음도 어머니와 우리 자매들이 함께 모이면 우리는 만주 이야기를 하고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우리들이 삶의 어려운 고비를 당했을 때마다 우리는 삼팔선 근처에서 두 언니들과 헤어졌을 때를 떠올리면서 지금의 어떠한 상황도 그때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어려운 고비들을 넘기곤 하였다.

서른여섯 청춘에 아버지와 사별하시고 이제 여든 일곱이 되신 내 어머니를 막내딸인 내가 지금 우리 집에 함께 모시고 산다. 사람들은 사위가 장모 모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남편을 칭찬해 준다. 나도 남편에게 고맙게 여기며 남편이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너무도 당연히 해야 할 나의 일이 아니겠는가! 요즘 들어 어머니는 만주를 더 그리워하시고 옛날이야기를 더 많이 하신다. 아버지가 운명하시기전 그렇게 목말라 하셨는데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물 한 사발 마시게 해 드릴 것을 하시면서 자신이 시원한 찬물을 드실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신다. 어머니의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버지와 만주에서 안정되게 사셨던 때였다고 말씀하신다. 어머니에게 내가 곧 만주에 가서 아버지 묘소도 찾아보고 다녀오도록 해 보겠다고 말씀드리면 어머니의 얼굴에 환한 밝음이 퍼져 오르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한없는 자식 사랑과 대범하고 깊으신 마음과 그러면서도 엄격하고 단호하신 성품 등 내 어머니의 훌륭하심을 다 표현하려면 끝이 없다. 이제는 자그마해지신 체구에 인생의 황혼 녘에 서서 먼 허공을 바라보며 옛 추억으로 살고 계시는 어머니! 가끔씩 내 아들들이 할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잔심부름을 해 드리거나 또 가끔 조금의 용돈을 드리면 그 손자들의 작은 효도에 지금의 삶을 만족해하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삶의 뿌리가 바로 어머니임을 발견한다. 나의 윤기 있는 육체와 피어 있는 지식들, 그리고 지금 내가 이루고 있는 이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 내 어머니로부터 흘러내린 자양분들에 의해 양육되고 성장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이름은 만주를 생각게 하고, 나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하고, 내 어머니의 한과 고난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나는 또 한편 <광야에서>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그 광활한 대지를 다시 밟으면서 나의 고향이요 민족의 고향으로 그곳을 환원시켜야 한다는 희망을 내 이름 속에 담고 있을 것이며, 그 희망이 담긴 나의 이름의 이야기를 나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전해 주려고 한다.

지난날의 이야기들은 내일을 위해 바라보는 거울들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험을 통하여 가지고 있는 나의 지난 이야기들은 지금 그리고 내일의 나의 삶을 위한 빛나는 거울로 항상 나를 비추고 있다.

1995년에 쓴 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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