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이건청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시인(1942- )은 욕망과 본래적 자아에로의 회귀를 성찰하고 있다. 다만, 소금을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그 욕망은 쾌락과 탐욕을 연상시키지는 않는다. 소금은 건실한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은 변용을 거듭한 끝에 그 과정 자체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이유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때문인지 허무주의 때문인지 규정하기는 어렵다. 변용하는 욕망들이 도덕적으로 미화되지 않더라도 그저 부질없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해탈보다는 본래적 자아에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그 과정에 작동하는 듯 보인다. 그 본래적 자아는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기]" 때문에 원초적인 생명에 상응한다. 그 생명은 아마도 소금이 변용을 거듭해왔던 욕망들을 모두 포용하는 원형일 것이다. 욕망이란 원래 원형이 상황과 만났을 때 그 주체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구체화되기 때문에, 원형 속에는 그 욕망들의 가능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본래적 자아에로의 회귀는 원형의 부활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고 해도 소금은 무한반복의 윤회를 염두에 두기보다 지나온 욕망의 모습들을 "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소금을 의인화했다. 마치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듯이 소금은 지나온 시절을 회상하며 현재의 소망을 피력한다. 아마도 그 소금은 시인일 것이다. 왜 하필 소금이었을까? 소금의 딱딱하고 쓰고 짠 속성에서 자신의 인생의 모습을 연상했을 수 있겠다. 자신이 그만큼 정석적이고 진지하게 살아왔다고 평가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 삶들을 욕망의 연속으로 간주하며 버리고 싶어 할까? 그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한때 "폭양 아래서 마르고 말라, 딱딱한 소금이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는 지나온 삶의 궤적에서 욕망의 흔적을 본다. 지금 돌이켜보니까 삶의 동력은 욕망이었다. 애초에 물로서 존재할 때는 형체가 없었는데, 그 물이 딱딱한 형체를 갖기를 욕망한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그의 삶이다.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장 원초적인 조건은 폭양이었다. 폭양은 아마도 그의 욕망을 대변하는 객관적 상관물일 것이다. 딱딱하게 결정화되는 데는 그 아래서 마르고 마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체성은 욕망과 시간이 만드는 화학적 공정을 통해 형성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 공정이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성은 외적 형체만으로 확인할 수 없다. 목적이나 속성이 정체성의 내적 형체이다.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이 되어 마대 자루에 담기고 싶던 때가 있었다." 그는 외형 안에 제일 쓰고 짠 것으로서의 속성을 담았다. 그렇게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가 갖추어졌다. 여기서 그의 욕망이 과거형으로 표현된 점은 그가 욕망한 대로 살았음을 알린다.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욕망하는 바들을 그와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체성은 쓸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마대 자루"가 그의 쓸모를 암시한다. 이제 그는 "마대 자루"에 담겨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으로서 쓰이게 될 것이다.
실제로 구체적인 쓸모들이 확인되었다. "한 손 고등어 뱃속에 염장질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고 싶던 때도 있었다." 고등어 뱃속을 염장하여 간고등어를 만들어서는 내륙 지방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게 했다. 한 손에 잡을 분량씩 한 가족의 저녁 식탁에 오르기까지 그 육질의 부패를 지연시켰다. 산굽이를 따라가면서 "상한 날들"을 저지함으로써 고등어의 눈동자가 흐려지지 않게 했다.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고 싶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쓸모를 증명하며 "딱딱한 결정"으로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 딱딱한 결정을 버리고 싶다." 폭양을 견디며 "딱딱한 결정"으로 만들어져서는 그 쓸모대로 살고자 욕망했지만, 그 욕망이 임계점에 달했다. 정체성을 유지하고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그라들었다. 과거형 표현이 그 욕망대로 살았음을 알린다면, 지금의 욕망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기대이다. 그 기대가 초월적이다. 욕망 자체를 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해안가 함초 숲을 지나, 유인도 무인도를 모두 버리고, 수평선이 되어 걸리고 싶다." 해안가 함초 숲, 유인도, 무인도 등 소금이 결정화되는 정체성의 터전을 버리고 저 멀리 수평선으로 도피하고 싶다. 이제껏 욕망해온 자기의 정체성을 과거의 것으로 규정한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던 "이 마대 자루를 버리고,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다." 이제는 외적 형체조차 해체하고 무형의 원형으로 회귀하고 싶다. 새로운 정체성을 다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가 무형이었던 원형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해탈을 희구하는 듯이 비치지만, 과거의 욕망 가운데 번민과 고뇌에 대한 암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해탈을 염두에 둔 듯하지는 않다. 그는 그저 원형을 희구한다. 본래적 자아로 부활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활이란 전혀 다른 생명체로의 변용보다는 본래적 자아의 회복을 가리킨다. 비록 삶이 욕망의 변용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확인하는 과정이기는 해도, 욕망이 만들어낸 정체성을 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은 현재 그 삶이 본질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에게 삶은 욕망의 변용이라는 객관적인 현상이기는 해도 "다시 물이 되어 출렁이고 싶[은]" 초월적 욕망에 따라 버려질 것이므로 비본래적이다. 본래적 자아는 비본래적이라고 규정된 모습을 버림으로써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마르고 말라 딱딱해진 결정이 다시 무형의 물이 되니까 본래적 자아로의 회귀이다. 소금이 수분을 만날 때 짠맛을 내게 되니까 "다시 물이 되[고자]" 하는 것은 짠맛이라는 속성 자체가 되는 것이다.
부활의 이러한 성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투영되어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리를 떠나 폭양 같은 욕망의 굴레에 매여 사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셨다. 그 폭양 같은 욕망에 따라 그분은 "세상에서 제일, 쓰고 짠 것"으로 살며 죄로 인한 부패를 저지하고자 하셨다. 그러다 "저물녘 노을 비낀 산굽이를 따라가[다가] ... 형형한 두 개 눈동자로 남아 상한 날들 위에 뿌려[지셨다]." 그러나 그렇게 산화한 자리에 새로운 소망이 돋았다. 원래의 자리로 회귀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아가셨다. 이처럼 부활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이다. 그래서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 본래적 자아의 회복을 소망할 것을 격려한다. 하나님은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베드로전서 1:3). 거듭나는 것은 본래적 자아의 회복을 지향하며, 그 자아는 태초에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원형으로 품고 있다. 죄가 없었던 원형의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산 소망"이 부활의 동력이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