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성한] 함께 갈 수 없었던 사람들!

공동체를 위한 한국교회사 읽기(6)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장 15~16절)

6월은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이 있는 달입니다. 1950년 6월 25일은 온 세계인이 다 아는 동서냉전의 결정판이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은, 당시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만, 큰 틀에서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가 좁은 의미에서는 ‘개인 혹은 집단의 생각을 지배하는 배타적인 논리’로 다소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사회변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사용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회든 다양한 계층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를 지배 또는 주도하는 특정 계층에 의해 그 사회 안에 불평등과 착취 등 ‘인권’에 관련된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을 때, 그 사회는 큰 모순에 빠지고, 그 결과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은 그만큼 왜곡되게 됩니다. 이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 사회의 모순과 왜곡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두 가지 , '투쟁‘이 나타납니다. 먼저는 그 모순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를 극복하려는 ’논리투쟁‘이 있고, 다음으로는 그 왜곡된 사회의 구조를 되돌리려는 ’힘의 투쟁‘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쟁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어느 사회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만큼 그 사회에는 다양한 이념들이 있게 마련 아니겠습니까.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민족의 복음화와 자주독립 사이의 관계를 보다 다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생각들은 식민지시기에 한국교회가 일제의 억압에 대해 다양한 방식의 항일운동을 전개하도록 했다’고 말입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복음을 민족문제에 적용하는 방식이 다양해졌고, 그만큼 한국교회가 성숙해져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한국교회는 민족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항일투쟁’의 근거를 복음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적인 투쟁을 식민지 한국사회에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속이념’이라는 도구들이 필요했는데, 그 선택의 폭(스펙트럼)이 매우 넓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볼 때, 복음을 민족의 현실에 구체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그 도구들이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싶어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는 사람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장 18~19절)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얼마나 높은지를 한국사회에 여실히 드러내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1920년대는 한국교회의 사회의식도 매우 높아진 시기입니다. 민족의식이란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민족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문제라면, 사회의식이란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되어 있는 불평등과 착취 등 사회의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물론 당시 식민지 체제 아래 있는 한국으로서는 민족의식이든 사회의식이든 일본 제국주의와 불가피한 관계에 있기에, 독립만 된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민족문제는 그렇습니다만, 사실 사회문제는 좀 복잡합니다. 민족문제는 단순히 외세와의 관계이지만, 사회문제는 외세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오랜 관계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민족문제는 거시적인 ‘큰 틀’의 문제요, 사회문제는 미시적인 ‘작은 틀’의 문제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 두 문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결국 1920년대에 들어와 한국은 그간의 민족문제와 함께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당시 사회문제라면 무엇이었을까요? 언뜻 생각해 보면, 한국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에게서 받는 부당한 착취가 있고, 일본 앞잡이가 된 친일파들의 횡포도 있을 것이며,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양반 지주들의 봉건적인 행태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권력층이나 지주들은 이런 것들을 문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길 것이고, 봉건적인 사회일수록 사회전체가 또 그렇게 여겨주지요. 그렇지만 그 ‘당연한 권리’를 ‘착취’나 ‘횡포’, 또는 부당한 ‘봉건적인 행태’로 여기게 되면 그 권리는 더 이상 소수가 누려할 권리가 아닌 사회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1917년에 우리나라의 북쪽에 있으면서 국경선도 어느 정도 마주하고 있는 러시아에서 소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성공했습니다. 이 혁명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자신의 조국 러시아에 맑스의 사회주의 이념을 적용하여 국가와 사회변혁에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사건이 식민지 아래의 한국인들에게 민족문제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데에 새로운 시각을 더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사회주의에서도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을 위한 이론적 도구를 찾은 셈이지요. 사회주의는 한국인들에게 또 다른 세계관을 제공하였고, 사회경제적 변혁과 민족해방에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전연 새로운 형태의 분석방법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서로 긴밀하게 결부되어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어 그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1928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노동자 조직이 350개, 농민 조직이 166개 존재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민중적 문화요소와 결부되면서 한국인들의 사회의식을 첨예화하고 민족운동을 질적으로 상당한 수준까지 끌어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족과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국 기독교인 가운데에도 사회주의에서 새로운 방법론적 대안을 찾은 사람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몇 사람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항일운동가 중 이동휘(李東輝, 1873-1935년경)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하급관리를 하다 서울에 올라와 무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궁전 친위대 장교(1899년)를 거쳐 1902년에는 참령으로 승진하여 강화도의 군 사령관 격인 진위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동휘는 하급관리 시절부터 한국 정부의 부정부패 문제로 고민도 많이 하고, 심지어는 공개적으로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왕인 고종에게 찾아가 자신의 계급과 지위를 박탁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1904-1905년 무렵 강화도의 지방 전도자에게 복음을 들은 후 교회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열성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강화의 바울’이라는 별명이 그에게 붙여질 정도였습니다. 그를 지켜본 선교사(케이블, E. M. Cable)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실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그는 즉시 담배와 술을 끊었으며 이어 친구들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들의 용서를 구했고, 그들에게 자신이 찾은 심령의 평안을 이야기했으며, 자신의 경우를 따르도록 그들에게 권유했다. 이 섬에서 그가 이교도로부터 받고 있던 존경과 덕망으로 인해 그는 선을 위한 놀라운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 그가 개종한 이후 이 도시의 귀신들은 고통을 겪었으며, 낡고 더러운 귀신들은 파멸에 빠졌다고 나는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귀신들은 강화의 바울에게 굴복했다고 말해질 것이다.”

이동휘가 기독교인이 된 이후 적어도 1910년대까지는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에 남다른 열성을 보이면서 항일 운동과 애국계몽 운동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로 교회나 학교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와 각종 집회를 통해 청중들에게 국가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설교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고 훗날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송창근과 같은 진보인사도 있고, 김린서와 같은 보수인사도 있습니다. 그런 그가 1918년에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에는 조선 공산주의 대표로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첫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가 죽기까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회주의자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반명에 그를 진정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던져준 첫 번째 사람이 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보다는 연령이 20여 살이나 어리나 같은 시대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했던 이대위(李大偉, 1862-1982)의 글(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일부를 오늘의 말체로 옮깁니다.

“본인이 사회주의를 논하면, 듣는 이들 가운데는 필히 무슨 위험한 사상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주의를 인류가 행복을 향유함에 있어서 안녕과 질서를 혼란시키는 한 괴물에 불과하다고만 보는 사람도 없지 않으며, 또한 설교가와 종교가들 중에는 종교의 중요 이론을 거론하면서 사회주의를 무조건 부인하는 사람들이 실로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본인이 금일에 처하여 현실의 사회제도를 찬동하지 아니하며, 또 현실의 여타 부패한 제도를 만들어 내는 차등을 만분의 일이라도 찬동하지 아니하는 바이다. 확언하면 본인은 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평등하지 않은 세계를 부인하고, 본인이 동경하는 어떤 신세계를 조성하려 함에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서로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곤 했던 복음적인 사회변혁 이론은 위에서 인용한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갈릴리 예수의 영성이 그들 삶의 밑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주의 청년들은 교회가 ‘특권층의 편에 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지 못하고 있다’며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한국교회는 사회주의자들의 그런 공격에 신학적으로 교회를 변호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잇따르게 되자,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을 매우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복음과 사회주의를 접맥시키려 했던 노력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제대로 확보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식민지 아래의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나 심지어는 신사 참배 강요도 반대하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식민지시대에 일제에 의해 박해받은 종교집단이 기독교였다면, 이념집단은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하나의 목표, 그래도 함께 갈 수 없었던 길!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 4장 17절)

1945년 8월 15일에 있은, 우리 민족의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은 민족문제와 사회문제를 일시에 다 해결해 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전쟁에 패배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그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국주의 국가들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곧바로 분단되었습니다. ‘해방의 날’이 ‘분단의 날’로 바뀐 것입니다. ‘분단의 날’은 다 해결된 듯한 민족문제와 사회문제를 이전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복잡하게 얽히고 꼬이게 만들어, 이 민족에게 더 큰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해방/분단이 되자 이 민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저마다 이 나라를 제대로 세워보겠다며 ‘국가 재건’에 나섰습니다. 우리나라를 되찾았으니, 그동안 일제 탄압 속에서 고통당하거나 숨죽이고 있던 모든 세력들이 국가 재건 이념을 들고 나온 셈이지요.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해방된 이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기독교적 국가 재건’의 기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저 멀리 신의주에서 목회하고 있던 한경직 목사와 윤하영 목사가 주도하여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습니다(1945.9.18).

한경직 목사는 훗날 그 정당을 결성하게 된 동기에 대해,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인데 할 사람은 없으니 우리라도 손을 대어야 한다는 ‘애국일념’ 하에 새 나라의 건국의 기틀은 반드시 민주적이고 기독교적인 ‘터’ 위에 놓아야겠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북한지역에서 그 의도는 말 그대로 ‘소박한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하여 국가를 재건하려던 세력들이 기독교 이념에 기초하여 국가를 재건하려는 한국교회의 일부세력을 그냥 보아둘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 사회민주당’ 용암포 지구 결당식에서 양측 사이에 폭행사건이 있었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신의주 학생사건(1945.11.18)’이 발발했습니다.

이 사건은 해방/분단 이후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기독교 세력 사이의 첫 유혈 대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곧 북한과 남한 곳곳에 알려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국가 재건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처럼, 해방/분단 이후 한국교회에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도 공산주의 내지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응을 기초로 ‘우파’와 ‘좌파’ 또는 ‘중도파’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우파’란 남북한 지역에서 국가 재건을 위해 반소(反蘇), 반공(反共) 성격의 기독교정당을 결성하거나 그 투쟁을 선도하고 그 과정에서 죽거나 고통을 당한 교회 지도자 및 평신도를 일컫습니다. ‘기독교 좌파’란, 북한지역에서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에 적극 협력하고, 함한 지역에서는 반미(反美), 반이승만 투쟁 성격의 기독교정당을 결성하거나 그 투쟁을 선도하고 그 과정에서 죽거나 고통당한 교회 지도자 및 평신도를 일컫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중도파‘란, 북한지역에서는 반공·반소의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한국전쟁까지 북한의 교회를 지키거나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소극적으로 가담하고, 남한지역에서는 반공 또는 반미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이념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교회재건에 더 큰 관심을 가진 교회 지도자 및 평신도를 일컫습니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에서는 기독교 우파 및 중도파가 ‘미제의 앞잡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았고, 반면에 남한에서는 기독교 좌파 또는 중도파가 ‘빨갱이 동산당’이라는 혐의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우선 북한의 기독교 우파로서 반소·반공 투쟁을 이끌었던 장로교의 김병조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기도 한데, 그 분의 반공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증언이 있어 소개합니다.

“(김병조 목사는) 반공운동은 하늘의 명령이다. 기독교인은 신앙으로 무장하여 교회를 사수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하며,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니 최후의 일각까지 하나님께 바쳐 밀알 하나의 희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목사 장로들도 모두 피난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야 산다고 권유를 하여도 ‘교회를 버리고, 남아있는 교우들을 버리고 나는 떠날 수가 없다’고 피난 권유를 완강히 뿌리치고 교회를 사수하였다.”

또한 남한의 기독교 좌파로서 반미·반이승만 투쟁을 이끌었던 감리교의 김창준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역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기도 한데, 서울에서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1947.2.24). 그 결성 선언문에서 우리는 1920년대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정신에서 살고 또 살려는 모든 신도는 분연히 총궐기하여 옳은 로선을 걸어야겠다. ... 만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인민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참가함으로써 기독교인의 량심적인 사회적 책무를 완수하는 길이다. 우리 기독교 민주동맹은 복음적 신앙에 입각하야 근로인민의 리익을 위함은 물론, 삼천만이 다 잘 살 수 있는 민주독립국가 전취를 위하야 궐기함을 이에 선언한다.”

이상과 같이 해방/분단 이후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대부분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 세력화되어 갈 때, 기독교 우파나 좌파와는 달리 교회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 애쓰던 기독교 중도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사랑의 원자탄’이라 일컬어지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대 환란은 4천년 역사상 초유의 신벌(神罰)이다... 내가 오늘에 이 죄악상을 말하면 우익에게나 좌익에게나 정치가에게나 경관에게나 미국인에게나 교역자 혹은 교인에게 욕을 먹고 매 맞고 죽임 당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대명(大命)이시니 전하다가 죽더라도 내 어찌 안 절할 것이겠느냐? 나는 네 가지 큰 죄악의 원인을 말하겠으니 각각 자기 죄에 비추어서 회개하기를 바란다.”

위의 글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 13일, 그가 여수 애양원의 수요예배를 위해 준비한 설교문 중에 일부입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던 중에 그는 공산군에 의해 붙잡혀 갔고, 곧바로 순교했기에 다 완성되지도 못한 미완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가 계속 이어서 전쟁의 원인으로 지적한 ‘큰 죄악 네 가지’는, 남한의 교회가 무비판적으로 절대 지지했던 이승만 정권과 그 관료들의 실정, 미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잘못된 정책, 일제 당시 신사참배 문제 및 신학 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열, 그리고 우리민족이 범한 죄악들 등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해방/분단 이후 한국교회는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에 기초한 다양한 이념의 틀들이 있어 서로 다투고 있었으나 그들 각각의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위의 성경말씀이 보여주듯, 예수복음에 기초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이념들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과는 다른 이념을 가진 기독교인과 함께 더불어 살며 일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해방/분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민족과 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크고 아픈 상처입니다.

손을 마주 부여잡고 포옹하는 원수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고 안고 목을 어긋맞추며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세기 33장 1-4절)

한국교회는 해방/분단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념이 다른 기독교인들과는 더 이상 함께 더불어 살 수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남한은 기독교 우파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사회주의 북한은 기독교 좌파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남한과 북한 모두 혹독한 독재정권 지배 아래 살다보니 조금이라도 생각을 다시 바꿔 먹어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 양쪽에서 참 어려운 발걸음을 서로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끼리 우리 땅에서 만나기 어려우니 다른 나라 땅에서 우리 모임에 다른 나라 사람을 끼워서 만났습니다. 언젠가는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에 만나긴 하겠지만,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생각이 너무 달라져 있고, 거기에다 과거에 상대방들로부터 얻은 삶의 상처가 너무 깊었기에 아직은 서로를 쉽게 믿을 수 없었던 거였지요. 남한의 기독교 우파든, 북한의 기독교 좌파든, 아직은 서로 잔뜩 경계한 야곱과 에서들이었습니다.

남한의 교회와 북한의 교회가 서로 진심으로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될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반공과 반미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서로의 교회 실체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극복’과 ‘인정’은, 그 동안 서로 상대방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며 원수가 되게 했던 민족과 교회의 큰 상처들을 ‘내 탓’으로 고백해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네’ 탓을 '내‘ 탓으로 고백하면, 오히려 우리들 사이에 ’그것이 왜 우리 탓이냐‘며 분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다 한국교회는 결국 해냈습니다. 남북 분단의 극복을 선교적 차원의 과제로 인식함과 아울러 1988년 2월 29일,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온 민족 앞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을 채택하였는데, 그 선언 속에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25-29일 인천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한반도 평화협의회‘를 통해 같은 내용을 전 세계에 선포해 버렸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본 협의회는 역사의 현시점에서 한반도 북쪽에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여기에서 환영할 수 없는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예언자적 증거에 불충한 죄책을 다함께 고백한다... 한민족 분단의 죄가 곧 그리스도의 몸의 분열임을 통감하면서..., 교회 역시 반공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부에서는 그것을 복음과 동질적인 것으로 곡해하고 있다. 이러한 반공이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화해자로서의 소명을 망각하게 하고 있으며 이러한 반공이념의 악영향은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이 북한에 있는 예배공동체가 지속적으로 복음을 생생하게 증거 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남한의 교회 일부만이 먼저 북한의 형제자매를 꼭 껴안아 버린 사건이었지만, 이 일은 이후 남북한 교회 모두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오고가며 돕고 원수 감정마저 벗어버리게 한 큰 앞걸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1920년 이후 대립만 해 왔던 기독교 이념논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의 정신으로 되돌아갔다는 뜻도 됩니다. 1920년대의 이동휘이든 이대위이든, 해방/분단 이후의 김병조 목사이든 김창준 목사이든, 1980년대의 ‘조선기독교연맹’이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든 복음의 빛에서는 다 그리스도의 몸인 한 지체들일 뿐입니다.
 

글쓴이 : 정성한(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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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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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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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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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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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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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