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베리타스 DB |
예수의 공생활 내내 유다교의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 왔었다(마가 2,1-12.23-28;7,1-15 등). 그러나 예수가 갈릴리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그저 의구심 차원에 머물렀을 뿐 별다르게 심각한 사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만 해도 거리에 많은 현자들이 오고 갔으며, 세례 요한 같은 종말-묵시적인 예언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사도 5,35-37 참조). 그러니 예수 역시 시류를 타는 예언자들 중 하나쯤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자(마가 11,1-10) 이야기가 온통 달라진다. 그는 유다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둘렀으며, 수차례에 걸쳐 스스로 메시아임을 밝혔던 것이다(마가 11-12장). 말하자면 종교지도자들의 코앞에다 칼을 들이댄 격이었다. 만일 예수라는 재야의 존재를 종교적으로 인정한다면 곧바로 유대교 제도권 교회가 송두리째 붕괴될 위기의 상황에 처할 판이었다.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졌던 이 같은 위기의식......, 그것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 죽음에 처해진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들은 예수만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폭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예상 아래, 교묘하게 그를 엮어 넣을 구실을 세웠다(마가 14,1-2). 그들의 계획은 먼저 예수를 유대교 최고 회의에 데리고 가 메시아라는 가면을 벗긴 다음, 당시의 유다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데리고 가 사형을 언도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최고회의에는 사형시킬 권리가 없었음: 요한 18,31). 최고회의에서는 일이 그런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대사제가 옷을 찢음으로써 예수를 메시아 사칭 혐의로 선고할 수 있었다. 유대인이 옷을 찢는 것은 지독한 슬픔이나 고통을 표현하는 경우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미슈나』, 산헤드린편 7,5).
그러나 빌라도 앞에 예수를 끌고 가서는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 언도 내리기를 거부한 탓인데, 예수에게서 이렇다 할 범죄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루가 23,4).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군중 앞에 데리고 나가 ‘해방절 사면’(마가 15,8) 여부를 물었으나, 결국 군중의 압력에 밀려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씌워 예수를 십자가형에 넘긴다. 여기에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로마 황제에 대한 빌라도의 불충을 은근히 꼬집었다는 사실도 사형 언도에 한몫을 했다고 한다(요한 19,12). 오늘날 식으로 보면 높은 사람을 팔아 협박을 한 꼴이니, 종교지도자들은 상당한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예수가 사형에 넘겨지기까지의 과정이 어느 정도나 역사적인 사실에 들어맞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일례로 당시의 ‘해방절 사면’이란 마가 15,8에서처럼 관례가 아니었으며, 피정복지의 주민 한 명을 처형하는데 로마 총독이 그 정도의 행정력을 낭비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게다가 빌라도는 다른 어떤 유다 총독들보다 잔혹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볼 때 예수는 실은 하느님을 모독한 종교 범죄자인데, 정작 사형은 로마 황제에 도전한 정치범이라는 죄목으로 언도 받았다는 점만은 역사적인 사실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