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산티아고 순례기] Day 10. 파도 위에서 균형 잡는 삶

글·이재훈 목사(쓰임교회 담임)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 벨로라도(Belorado): 5시간 30분 (23Km)

내게 설렘을 준 그 친구가 마음에 들긴 들었나보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지만 더 같이 걷고 싶었다. 함께 걷고 싶다는 말은 그녀를 알고 싶다는 욕구와 맞닿아 있다. 이 아침, 앎에 대한 나의 욕구가 그녀를 향해 등 떠밀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용기'와 '모험'이 필요하다.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용기)과 시도의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모험)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생(生)이 주는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잘 새겨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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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한가로이 맥주를 마시는데, 아저씨 한 분이 내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신다. 카메라를 요리조리 만지던 아저씨가 갑자기 와인을 내 가방에 쏟아 버렸다. 이 상황에 당황하셨는지 오히려 본인이 발끈 화를 내신다. ‘아니 아저씨, 화는 제가 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순간의 감정을 전환해 이것도 인연인데 사진이나 한 장 찍자고 말씀드렸더니 금세 ‘따봉’을 날리신다.

다음 목적지까지 같이 걷고 싶다는 나의 말에 선영이는 좀 당황해하는 듯했지만 일행이 모두 먼저 떠난 터라 이 제안을 피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어쨌든 서툴 긴 했지만 제안이라는 용기를 냈고 거절이 두려웠음에도 모험을 감행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늘 머뭇거리고 매사 신중하기만 했던 나에게 주는 칭찬이었다.

그런데 오늘 날씨와 상황이 최고의 방해꾼이었다. 벨로라도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평지가 끝없이 지속된다. 더구나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마저 주어진 하루라니! 그녀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욕구를 조롱이나 하듯 하늘과 땅은 나의 감정과 체력을 롤러코스터에 태웠다.

산토 도밍고에서 벨로라도까지 가는 길은 순례자들을 고속도로 바로 옆, 갓길로 인도한다. 이 길은 순례자들을 언덕으로 안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산이나 들로도 인도하지 않는 정말 '무채색'의 길이다. 험한 길이 그리워진다. 언덕 총각과 내리막 처녀를 번갈아 만나면,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몸의 각 부위로 분산될 테고 그래서 몸의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길'이란 한 없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 적절한 높낮이가 있는 길임을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경험이 참 교사다.

감명 깊게 봤던 책 중에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책이 있다. 저자 페터 제발트는 수도원 정신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비롯해 여러 수도원을 가보는데, 그곳에 머물며 체험한 수도원 전통과 정신을 생생한 언어로 전한다. 그는 그곳에서 한 신부를 만나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고난을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인간을 유연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를 둘러싼 딱딱한 껍질을 깨부수지요."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문학의숲,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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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가파른 언덕을 힘들게 오르던 ‘나다’ 할머니. 난 조용히 뒤로 다가가 배낭을 밀어드렸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 기약 없는 만남을 남긴 채 헤어졌다. 며칠 뒤, 우연히 같은 알베르게에서 마주친 우리는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내게 선물이라며 내민 목걸이. “현수 이거 산티아고 돌멩이로 만든 목걸이야. 너에게 주고 싶어” 지금도 가끔 페이스북으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있다.

오르막이 심한 산이나 내리막뿐인 길을 걸을 때면 어서 그 길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끝이 보이지 않는 밀과 보리밭을 지날 때면 어서 이 지루한 들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 것, 잘 닦여진 콘크리트 길 보다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있어 조금은 험해 보이는 길이 더 '좋은 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속도로 옆, 갓길을 계속해서 걸으며 얻은 육체의 고통이 딱딱한 사고의 껍질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네 삶이 꼭 이 같지 않던가? 삶에 우여곡절이 없길 바라고 위기 없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행복이란 이와 같은 것일지 의문이다. 지당한 생각에 의문부호를 붙여본다. 물론 사람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 삶의 균형을 맞추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불안하다면 안정을 쫓게 된다.

그런데 과연 안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며 안정은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이 무서워지는 건 우연히 얻은 안정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할 때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를 많이 보았다. 그 사람이 그랬고 또 우리가 그랬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생에 어디 내 뜻대로 되었던 게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인생은 모험과 안정을 끊임없이 오가는 줄타기 같은 것일 런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학생은 바로 이런 학생이 아닐까? 내게 닥친 크고 작은 파도를 피하지 않고 그 위에 보란 듯이 올라타 균형을 잡는 학생. 이 인생이 정말 멋진 삶, 잘 사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이 학교의 학생이자 수련생이다. 밥 먹듯 나머지 공부를 하던 한 학생(순례자)이 길 위에서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하는 중이다.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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