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앎의 차원에서의 신 인식의 모순
바야흐로 종교적 안전성을 추구하는 종교적 인간은 신 존재에 대한 직접적 확실성을 보장하는 신 인식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신 존재에 대한 확실성 추구는 신의 존재 유무에만 매달리는 존재개념에서 벗어나 신이 어떻게 알려지는가, 다시 말하면 신에 이르는 길에 대한 방법을 묻게 했다. 이러한 신 인식 방법은 보편성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방식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기독교의 계시신앙이야말로 신 인식의 방법론적 측면에서 볼 때 종교적 객관주의의 정점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계시되지 않고 존재만 하는 신은 추상적이고 상상적이며 주관적인 신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계시의 확실성 속에서 신을 찾는 이유는 나 자신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주관적인 신이 아니라 신 자신을 통해 인간 자신에게 인식되는 신이기 때문이며 그런 신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존재를 증명하는 객관적인 신이다.
"신은 스스로를 계시하고 논증했다. 따라서 누가 아직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신 존재의 확실성이 나에게는 계시의 확실성 속에 들어 있다. 계시되지 않고 존재만 하는 신, 나 자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 이러한 신은 추상적이고 상상적이며 주관적인 신에 지나지 않는다. 신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신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존재를 증명하는 객관적인 신이다. 계시에 대한 신앙은, 믿어지고 소원되고 상상되는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데 대하여 종교적 심정이 갖는 직접적인 확실성이다."(<기독교의 본질>, 333-334)
계시신앙의 작동 근저에 깔려있는 요소로 종교적 심정과 직접적인 확실성에 주목해 보자. 확실성을 그것도 어떤 매개도 허락치 않는 직접적인 확실성을 추구하는 종교적 심정에 의해 작동되는 계시신앙에서는 조금의 의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의심은 불확실성을 낳기에 불신앙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진리와 비진리는 확신으로 판가름날 뿐이다. 니체의 말대로 "확신이 진리의 규준"(<니체전집 15, 안티 크리스트>, 226)이 되어 가치 평가의 꼭대기에 선 것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종교적 심정은 이처럼 의심하지 않는 맹목적 성격 때문에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의심과 물음을 배제하는 묻지마 믿음의 강요다.
종교적 심정에 의해서 표상된 것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과정은 또 어떠한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종교적 심정은 그 자체로 이론적인 일이며 실천적인 일이며 또 양심적인 일이기에 곧 하나의 사실(Thatsache)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종교적 심정에서 말하는 사실이라 함은 "감상적인 힘이며 어떠한 근거도 아니다"(<기독교의 본질>, 334)라고 지적하는데 이렇듯 사실과 이성의 관계는 주먹과 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엉뚱한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계시신앙에 있어서 종교적인 심정이 추구하는 확실성이 사실 집착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계시를 이미 알려진 사실로 싸잡으려는 확실성이라는 이름의 앎의 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심정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계시)를 반복적으로 확인할지언정 계시에 모름을 나타내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모호함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을 쫓는 것은 이처럼 계시를 과거에 일어난 일로 옭아매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계시 신앙의 구조에서는 다가오는 계시의 미래, 계시의 개방성은 휘발되어 버리고 만다.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신 인식 가능성을 찾던 인간이 애당초 추구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심정에 근거해 자기가 원하고 믿는 그 표상하는 것이 실제로 대상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히 계시를 확정된 듯한 사실로 둔갑시키는 것에서 종교적 심정에 의해서 인간이 마음대로 계시를 주무르겠다는 의도가 엿보이기까지 하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사실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표상에 다름 아닌데 그런 표상은 하등 이론의 일이 아니고 심정의 일에 불과하다. 종교적 표상을 고려함에 있어서 실은 사실보다 앞서 제기되는 것이 소망이나 욕구이며 이것에 의해 오히려 사실여부가 판가름 난다는 통찰에 다름 아니다.
계시신앙의 전제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신을 알 길이 없고 오직 신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한 것 외에는 신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을 신 자체에 의해 인식하는 이러한 신 인식 방법이 모순인 것은 이러한 신의 계시가 사실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규정된 계시라는 점 때문이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은 천사나 어떤 다른 동물들에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인간에 말을 걸기 때문에 인간적 표상을 담고 있는 인간적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의도와는 다르게 신의 계시가 인간에 의해 제약되고 있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이 다른 본질이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해야 되는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신은 신 자신의 사유능력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능력으로 생각한다. 계시를 계획하는 경우 신은 신 자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력에 의존한다. 신으로부터 나와 인간 속에 들어오는 것은 신 안의 인간으로부터 나와 인간에게 오는 것에 불과하다."(<기독교의 본질>, 337)
신으로부터 출발한 줄로 믿고 있던 계시가 까놓고 보니 인간의 이해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나와 인간 속에 들어오는 것이 신 안의 인간으로부터 나와 인간에게 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한 셈이다. 말하자면 신의 계시가 천사나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나타나고 또 인간의 사유능력이라는 한계 안에서 인간이 이해 가능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 나타나는 것도 인간에게는 당위이고 현실이나 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신 자신이 철저히 인간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록된 계시에 대한 신앙, 즉 성서를 신적인 책이라 숭배하는 성서 문자주의 신앙을 "미신"이라며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장소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계시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손상되지 않은 채로 향유할 수 있도록 문서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계시에 대한 신앙은 동시에-적어도 후세의 사람들에게-기록된 계시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시간성과 유한성의 모든 조건 아래서 씌어진 역사적인 책에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보편 타당한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신앙의 필연성인 결과 및 작용은 미신과 궤변일 뿐이다"(<기독교의 본질>, 340-341)
기록된 계시에 대한 신앙에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보편 타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성서 문자주의 신앙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성서 문자주의 신앙이 문제인 것은 신의 자유를 이미 주어진 계시로, 즉 확정된 문자 속에 속박시키기 때문이다. 이로써 신은 확정된 과거의 사실, 즉 기록된 계시에서 말을 거는 존재일 뿐 미래에서 말을 걸어오는 신은 철저히 유폐된다. 신의 계시의 우발성은 실종된다. 신의 계시가 사실을 소유함으로써 확실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 믿음에 의해 제약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기 우상화 성향으로 인해 신의 계시가 문자 속으로 축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