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그륵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시인(1958- )은 표준어인 "그릇"과 경상도 방언인 "그륵"을 비교하면서 삶의 진정성에 대한 성찰을 나눈다. 어머니가 사용하는 "그륵"은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을 담고 있어서 거기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그것이 진정한 삶이며, 그 삶을 통해 만들어진 말은 비록 비표준적으로 들리기는 해도 삶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준다]." 반면에 그가 사용하는 "그릇"은 그러한 삶의 진정성을 반향하지 못한다. 이로써 그는 표준과 비표준, 즉 올바름의 외형적인 기준을 역전시킨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고 사전에서 찾아서 표준어를 구사하며 살았지만, 그러한 외형적인 세련됨이 삶의 내실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의 "그륵"에 담긴 진정한 삶의 내실 앞에서 그는 "내가 부끄러워진다"고 고백했다.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어머니는 사투리를 쓰며 사셨다. 그 삶은 표준어가 대변하는 교육 혹은, 세련된 형식과는 거리가 있다. 아무리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객관적인 바름의 기준에 따라 교정하려고 해도 이제 "그륵"은 어머니의 삶을 대변하는 객관적 상관물이 되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담은 집이 된 것이다. 어머니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녀의 인격을 드러낸다라기보다 비록 투박한 비표준어처럼 그녀의 삶이 세련되지 못하고 초라해 보이더라도 "그륵"은 그녀가 주체가 되어 만든 삶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이는 그가 어머니의 삶을 되짚어 본 이후에 내린 결론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녀의 삶의 모습이 뇌리에 그려지는 것이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그릇의 밑바닥까지 흔들림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는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가 건넨 한 그릇의 물은 그녀의 삶의 정수를 반영한다. 물은 생명을 상징하므로, 아들에게 물을 건넨 행위는 그녀의 삶이 생명과 상관있음을 암시한다. 그녀의 삶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던]" 이유는 바로 그녀가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그 가치만큼 외형을 꾸미지는 않는다. 그것이 생명의 진정성을 증명한다. 외형을 꾸밀 여력을 두지 않고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그 존재를 투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삶이 그러했다. 이러한 생명의 가치를 우리는 학습하고 전수한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다]." 간접 경험은 무수한 직접 경험의 정수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학습의 자료로 조직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의 상처를 안은 직접 경험보다는 세련된 외양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어머니가 살아온 삶은 직접 생명을 주고 직접 시행착오를 거쳐오는 동안 거칠고 초라한 외양을 갖게 되었다. 간접 경험으로 구성한 표준에 비기면 비표준적인 행색을 띨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그래서" 표준과 비표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이 진정성의 차원에서 다르다. 시인은 그 다름의 내용을 옳게 포착했다. 비록 비표준적 행색 때문에 바르지 않아 보이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삶에 관한 한, 외양은 내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반해, 그 자신의 삶은 어머니처럼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사전에서 찾은 표준어로는 진솔한 삶의 현장을 담아낼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현장의 말을 찾아야 한다. 그 말에 삶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정한 순간들로써 어머니는 말을 만드셨다. 그 말이 어머니의 존재의 집이다.
어머니와는 달리 시인은 만들어지고 정리된 말들을 찾았다. 보편화된 질서를 차용하며 산 것이다. 그는 이를 반성한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그 시인이 삶의 진정성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삶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줄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고 고백할 따름이다. 그는 자신이 시인임을 밝힘으로써 그 반성에 무게를 더한다.
삶의 진정성은 비표준의 초라한 표면 뒤에서 그 가려진 가치를 찬란하게 빛낼 때 확인할 수 있다. 삶에서는 표준에 따라 '바르다,' '그르다'의 평가를 내리는 관행이 역전되는 경우가 잦다. "그릇"이라는 표준어 명칭이 그릇의 개념을 정확히 전달하기는 해도 "그륵"은 그 개념에다 "뜨겁게 살아있[는]" 실존을 입히지 않았나? 실존은 본질과 구별할 대상이 아니라 본질을 "뜨겁게 살아있도록" 만드는 옷이다. 이처럼 삶을 "뜨겁게 살아있도록" 한다면 그 평가는 표준보다는 비표준을 따를 일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평가는 진정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때 인생은 "뜨겁게 살아있[게]" 되니까 무릇 서정시는 이 순간을 읊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진정성을 자신의 신앙의 이력에 적용한다. 만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디모데전서 1:13). 그가 전에 복음전도자들을 비방하며 박해하고 폭행한 이유는 자기 나름의 표준을 절대시했기 때문이다. 그 표준에 따르게 되면 타자를 폭력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회심한 뒤에 과거의 이력을 돌아보았더니 자신이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신봉하여 절대화했던 표준이 자신의 진정한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복음전도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도리어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우침이 그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서]" 주어진 표준을 절대시하던 행습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알게 했다. 그로써 그는 비록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목숨을 거는 확신을 품고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그 복음을 통해 그는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었다]."
※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