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Fide!', '오직 믿음!'. 익숙한 표현입니다. 기독교를 '믿음의 종교'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고, 예수를 믿고, 구원도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에게 믿음이란 당연한 바탕이기에, '믿음'은 기독교인 자체를 나타내는 표지로도 쓰입니다. '믿는 사람이야?'라는 물음은 '기독교인이야?'라는 물음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대전제와 같은 것이어서, 논의나 분석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평가의 기준 혹은 잣대가 되곤 했습니다. '믿음이 있나, 없나' 혹은 '믿음이 큰가, 작은가'와 같은 표현들이 이를 말해줍니다. '믿음'을 가지고 다른 것을 물었지, 믿음 그 자체를 묻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철학하는 신학자 정재현의 저서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을 소개합니다. 책 한 권 전체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정면으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냥 묻지 않고 조목조목 곧 육하원칙에 따라 무엇, 왜, 어떻게, 누가, 언제, 어디서의 형식을 가지고 묻습니다. 믿음이 이토록 해체된 것을 어쩌면 처음 마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묻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물음과 더불어 성찰을 도모합니다. 성찰의 지점이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물음이 있었기에 성찰이 가능했습니다.
'무엇'을 믿는가?,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믿느냐고요.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기서 믿는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성경이 알려주는 창조주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에게 하나님이, 그 하나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창조주는 지금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며, 아브라함을 만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도 만나고 계시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하나님과 더불어 삶 가운데서의 하나님도 믿습니다.
그런데 개인들의 삶의 모양은 천차만별입니다.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서도 다르고, 동시대 이웃이라 하더라도 실존은 제각각입니다. 합리주의적 전통의 신앙에서 신 증명을 시도하고, 신비주의적 전통의 신앙에서 신과의 합일을 갈망하고, 근대 이후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도모하는 것이 그 예가 됩니다. 각도를 바꾸어 오늘날 렌즈로 보면, 어떤 이들은 성경 및 교리 공부에 매진하고, 어떤 이들은 열정적 집회에 참석하고, 어떤 이들은 봉사와 구제에 열심입니다.
다양한 신앙이 인간의 눈에 일치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연구실에서 만난 하나님, 찬양 집회 가운데 만난 하나님, 오지에서 봉사활동 중에 만난 하나님의 상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한한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도 무한한 신을 담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내가 맞닥뜨린 하나님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맞닥뜨린 하나님과 이웃이 맞닥뜨린 하나님 사이의 간극입니다.
그래서 정재현은 묻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정말로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
왜 믿는가?
그런데, 왜 믿으시나요? 저마다 다양한 답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수렴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2022년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신앙 생활의 이유'를 물었을 때 5060세대와 2030대 세대 모두에서 1위로 꼽은 것이 '구원/영생을 위해'였습니다. 이신칭의(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를 핵심 교리로 가지고 있는 개신교회에서 당연하게 나오는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살핍니다. 구원받기 위해 믿는다면, 구원은 목적이 되고 믿음은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구원이 인간이 믿어서 따라오는 결과물인가요? 종교개혁자들이 '솔라 피데'를 외쳤을 때 그것의 방점은 인간이 '믿는다'는 행위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 곧 은총에 있었습니다. 순서를 보자면 구원의 은총이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용납됨을 믿는 인간의 믿음이 있습니다. 인간이 믿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총이 있어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그리고 이미, 구원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믿는가요? 정재현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삶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이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믿음의 목적이 확고했다면, 이유 없는 믿음의 형태가 선뜻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믿음은 다른 말로 조건 없는 믿음입니다. 무조건적인 신뢰의 형태가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고 어린아이는 부모를 바라봅니다. 여기에 이유나 조건은 없고,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해나 부모는 감각하면서 인지할 수 있고, 상호작용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과의 무조건적인 믿음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정재현은 예수가 보여주신 길에 착안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 9:23) 여기서 예수를 따르기 위한 이유나 목적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구원받기 위해' '영생을 얻기 위해'와 같은 조건절이 없습니다. 문장을 살피면 '나를 따르려면'으로 시작해서 '나를 따르라'로 마칩니다. 예수 자신이 아버지를 그렇게 '따르려고 따르셨'던 것이 아닐까요.
다만 예수는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 부인은 다른 말로 자기 비움입니다. 그런데 불가에도 무아(無我)론이나 공(空) 사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자기 비움은 다른 사상들과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요. 두 번째로 자기 십자가도 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찬송가도 노래하듯 '예수가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이고 그래서 '십자가를 볼 때 마음에 큰 고통이 사라지'는데, 왜 굳이 개개인이 또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는 걸까요.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독자들께서 책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까지 다 쓰면 자칫 이 글이 책의 스포일러가 될까 해서입니다.
누가 믿는가?
자기 비움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자기 정체성은 별도로 고찰해야 합니다. 믿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대마다 신앙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중세는 신중심주의적 세계관이었고 인간 자신보다는 신 탐구에 집중했습니다. 근세에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시작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여 인간중심주의가 되었고, 그 결과 소외와 허무를 깊게 겪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그러한 근대의 불안을 고스란히 안은 주체입니다.
실존주의는 바로 불안을 싸안은 현대의 개체적 실존에 주목합니다. 근대를 겪은 실존은 자기 한계를 본 바 있어 겸손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체들의 소중함을 압니다. 나는 타인으로 대체될 수 없고, 타인도 나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이같은 '현대의 겸손한 주체'에 정재현은 기대를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곧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겸손함, 자신에게 익숙한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하나님' 상을 과감히 깨뜨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고 주문합니다.
언제/어디서 믿는가?
언제/어디서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누구나 시공간의 한계 안에 있고, 이는 인간 유한성의 결정적 지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갈대이긴 하지만 그의 생각은 온 우주를 품습니다.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곧 그는 초월을 지향합니다. 이런 초월지향성이 종교성의 시작점일 듯합니다.
정재현은 초월지향적 종교성이 잘못 발동되는 것을 유의하자고 신신당부합니다. 개인의 특별한 체험이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빛나는 지혜와 통찰도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가리킵니다. 때때로 인간은 시공간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넘어섰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도 성육신하셔서 피조물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인간이 뭐라고 이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재현은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까불지 맙시다."
책 정보. 정재현, 《'묻지마 믿음' 그리고 물음》, 동연출판사, 2014. 글쓴이: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Ph.D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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