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텍스트 사이에서 16] 『침묵』의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만난 그리스도에 대한 수상

『침묵』(엔도 슈사쿠, 김윤성 옮김), 『망치로 신-학하기』(정재현)

침묵2

1.

17세기 일본의 교회 박해는 절정에 달했다. 교회 당국도 사제들의 일본 선교를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이 와중에 열정적인 젊은 사제들은 일본 입국을 꾀했다. 예수회 소속 오드리고 신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렵게 상부의 승낙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드리고 신부 안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을 향한 순수한 선교의 마음이요, 두 번째는 자신의 스승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을 믿을 수 없어 직접 확인하고픈 마음이었다.

... 오드리고 신부는 일본에서 얼마간 내실 있는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일본 당국에 붙잡혔다. 당국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한다. 그 옆에서 오드리고 신부에게 배교를 권유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앞에서 신부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사람은 신부가 신학생 시절 흠모해 마지않았던 페레이라 신부였다.

엔도 슈사쿠 소설 『침묵』 속의 오드리고 신부의 절망감을 우리 시대 신앙인들이 깊이 공감하긴 어렵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누구도 배교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가 경험했던 '침묵'의 상황, 오드리고 신부 앞에 놓인 '침묵'의 상황은 우리에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쏟아지는 신학 논문과 교회 설교와 기독교 문화컨텐츠 가운데서도 우리는 분명히 '내가 찾는 하나님'이 '안보이는 상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는 기본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논의를 정재현의 『망치로 신-학하기』 렌즈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에는 다음의 문장이 있다.

"...역사상 수많은 순교와 배교라는 종교적 비극이 객관성을 표방한 동일성의 원리를 신격화시켰던 형이상학적 신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면..."(p109)

다소 어려운 문장이지만 두 단어 '종교적 비극'과 '동일성'에 초점을 둔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순교이든 배교이든 이러한 사태가 생기는 것은 종교적 비극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의 원인에 '동일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정재현은 기술한다. 동일성의 원리가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동일성이 절대화되었다는 것인데, 동일성이 무엇이길래 이것이 절대화되고, 절대화된 동일성은 이토록 문제가 되는가.

『침묵』 논의의 맥락에서 우리는 이 동일성을 신-인 관계의 동일성으로 읽어볼 수 있다. 즉 신과 인간의 관계가 동일한 형태, 모범적으로 여겨지는 특정한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훌륭한 모형이 있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모형이 절대화될 때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인간 실존의 현장은 셀 수 없을 만큼의 다양한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영화2

2.

페레이라 신부의 상황이 그랬다. 이상적으로는 인간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기에 더해 '목숨까지 더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막12:30, 요일4:19 참조) 설사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순교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라는 해석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의 상황은, 신부가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의 처참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페레이라 신부 그 자신은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귀 뒤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피가 흐르고 있어도, 배교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자들이 자기가 겪었던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고, 자기가 배교해야지만 신자들의 고문이 멈춰진다. 신자들은 고통을 못이겨 이미 배교하겠다 했지만, 당국은 오직 신부의 배교 선언에만 신자들의 고문을 멈출 것이라 종용했다.

페레이라 신부는 처절하게 기도드렸다. 저 신자들의 고문을 멈춰주시기를,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이제는 침묵을 깨뜨리시기를 그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은 깨뜨려지지 않았다. 인간은 요청하였는데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 대목에서 폴 틸리히가 논한 '인간과 신의 관계'를 뒤적여보면 좋겠다. 틸리히 신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상호관계의 방법'은 신과 인간의 상호적 관계를 강조한 방법론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과 계시의 메시지를 상호관계적인 측면에서 조망한다. 인간의 실존적 '질문'과 신의 계시적 '대답'은 서로에게 여집합일 수만은 없다. 대답이 있기 전에 인간의 '물음'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대답은 돌이 던져지는 것처럼 무심하게 상황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과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상호관계의 방법은 20세기 당시 각광을 받았다. 틸리히 자신도 밝혔듯이 이것은 신의 초월성만 강조하는 '초자연주의적 접근'이나 반대로 인본주의적인 것에 치중되어 질문과 대답 모두를 인간으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 '인본주의적 접근', 그리고 이 둘을 상ㆍ하부 구조로 놓아 서열화하는 '이분법적인 접근' 모두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재현은 상호관계의 방법에 대하여 "종교적 체험 한계 안에 적용되는 개념임은 분명하다"(84)라고 밝힌다. 사실상 이 방법론은 순환적이다. 질문은 대답을 이끌어내고, 대답은 질문에 응답한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의 기도에는 응답이 없었다. 이 때 틸리히의 상호관계의 방법은 힘을 잃는다. 정재현은 "상호관계방법은 질문과 대답을 어떤 식으로든지 이미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용할 수 없"(88)다고 밝힌다. 뿐만 아니다. 과거에 경험하였더라도, 새로운 상황에서 과거의 경험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먼 나라 선교를 결단했던 때 그에게 넘치는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묵묵부답이시다.

망치2

3.

페레이라 신부는 공식적으로 '배교'(背敎)한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배(背)반한 것은 교(敎) 즉 종교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로드리고 신부에게 배교를 권하며 페레이라 신부는 충격적인 말을 한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것이다." 제대로 들은 말이 맞는지 헤깔려할 로드리고를 위해, 그리고 제대로 읽었는지 눈 비빌 독자들을 위해 페레이라 신부는 다시 한번 말한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났다. 끔찍한 형틀 십자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으셨던 그리스도이지만, 눈 앞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는 그리스도를 그는 만났다. 페레이라 신부는 스스로 순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때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 하나님은 신자들의 신음 소리에 함께 우는, 약하고 힘없는 하나님이었다.

정재현은 『망치로 신-학하기』 2부 1장에서 틸리히 신학을 다루고, 바로 뒷장에서 고든 카우프만의 구성신학을 다룬다. 여기서 그는 카우프만의 말을 빌려 신학이 '하나님 개념'에 멈춰 있으면 안되고, "신학을 구성/재구성"해야함을 역설한다. 여기서 신학은 '신앙'으로도 대치하여 읽을 수 있다. 과거의 하나님 개념을 정적(靜的)으로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은 변화무쌍한 실존의 현장에서 오히려 우상이 될 수 있다.

카우프만이 말하는 신학적 재구성은 "단순히 지적, 혹은 사색적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닌...신앙 자체의 삶으로부터 발원하는 요구"이다. 다시 말해, 신학을 정태적인 교리적 신학이 아닌, 실존의 삶에서 의미 있는 살아있는 신학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여기서도 신학을 신앙으로 읽을 수 있다. 원래 신앙과 신학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도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히4:12) 말씀이다.

**

로드리고 신부는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큰 소리로 우는 그에게 페레이라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지금까지 가장 아무도 하지 못한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천천히 아프게 발을 성화 위로 옮겨놓았다. 신부의 이 행위 직후, 어두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귀에 뚫린 구멍으로 피를 흘리고 있던 신자들은 구덩이에서 꺼내져 치료받고 적절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와 하나님의 관계, 로드리고 신부와 하나님의 관계는 '배교'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모든 신앙과 신학의 주제이자, 삶의 주제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특정한 하나의 모형으로 고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실존이 각자의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대답으로 나타나시지는 않는다. "참으로 나를 도와주고 참으로 오른팔로 나를 붙들어주시는"(사41:0)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 무서울 정도로 잠잠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침묵 가운데서 페레이라 신부는 그 이전에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만났다. 로드리고 신부도 새로운 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하나님을 손아귀에 소유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 가운데 이미 계신 그분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아닐까.

 

북리뷰/서평 문의 eleison2023@gmail.com

*책/논문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

이민애 theworld@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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