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사이에서 17~19]은 영국 성공회 주교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를 3번에 걸쳐 3가지 주제로 살핀다. ① 첫 번째로는 책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틸리히, 불트만, 본회퍼의 주장을 소개한다. ② 두 번째로는 앞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신 이해를 살핀다. '초자연적이지 않은' 신 이해가 가능한가? ③ 세 번째로는 예수에 대한 이해를 본다. 초자연성과 신화성을 걷어냈을 때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① 『신에게 솔직히』①,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실존에서 울림이 있는가
② 『신에게 솔직히』②, '초자연적 하나님'과 '초월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
③ 『신에게 솔직히』③, 예수가 실존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존 로빈슨(John A. T. Robinson, 1919-1983)은 틸리히의 주장을 받아들여 초자연적 하나님 개념을 확실히 거부했다. 초자연주의적 신 이해는 신을 자연 위에, '더 높은 곳'에 모시는 표현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신을 오히려 자연과 비교선상에 놓아, 오히려 인간이 신을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되게 하기도 한다. '신 존재 증명' 시도도 그러한 면이 있다.
그렇다고 신 존재 증명 시도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이 논의에서 중요한 논점은 신이 인간의 '대상'이 되고, 인간이 자신의 관념을 '투영'하여 신 개념을 구성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같은 신 이해는 20세기 격심한 상황에 처한 실존들에게 의미를 주지 못했고, 이에 이 시기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기존의 신 이해에 저항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 이제 현대인들이 신에 대하여 초자연적 이해도 버리고 신화적 용어도 버린다면, 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로빈슨은 "초월"(transcendence)을 붙든다. 초월은 '뛰어넘음' 혹은 '넘어있음'이다. 초자연은 자연을 넘어있는 것이지만, 초월은 그저 자연만을 넘어있는 것이 아니다. 로빈슨은 초월에 대한 이해, 그리고 초월과 인간 사이 관계의 이해를 틸리히의 한 설교에서 발견하여 소개한다.
틸리히는 초월의 하나님을 139편을 통해 소개한다. 시편 139편에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여호와'가 나온다. 그 여호와는 나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있기도 전에부터 나를 아셨다. 그는 나를 '넘어서' 있는 분으로,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 내가 그분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할 방법은 없다. 그는 초월자이시다.
이러한 초월적인 하나님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표상이다. 초자연적 하나님의 표상만큼이나 친근하다. 그러나 틸리히의 분석을 기준 삼아 이 둘의 차이점을 엄밀하게 구분해서 보는 것을 시도해보면, 이 둘의 차이는 작지 않다. 초자연적 하나님은 자연 사이에 들어와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상태일 때 신은 인간과 떨어져 있다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임재하게 된다. 그러나 시편 139장이 말하는 초월적 하나님은 이러한 개념이 아니다. 그는 없으실 때가 없다. 그는 언제나 나를 감찰하시고 내 현재의 존재를 넘어서 나를 아신다. 틸리히는 이를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흔들리는 터전, 73)라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감찰하여 그것으로부터 도피가 불가능한' 신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로빈슨의 말마따나 조지오웰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big brother, 『1984』)의 감시체계와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이 면에서 틸리히의 시편 139편 해석은 놀랍다. 틸리히는 이같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가 '감시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의 "존재의 근거"(흔들리는 터전, 86)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밝힌다. 초월자는 '저쪽에'만 계신 감시자가 아니라, 우리의 '지금 여기서'도 존재의 기반이자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인간이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 근거로부터 이탈될 수는 없다.
근거이자 기반이 되시는 신은, 초월이지만, 우리에게 "가깝다." 초자연적 신은 이따금씩 비일상적으로 나타나지만, 존재의 궁극적 기반이 되시는 신은 언제나 우리의 기반에 계신다.
그런데 신이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신다는 이 해석이 또 하나의 형이상학적 전제에 그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근거와의 관계를 실존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길이 있을까? 로빈슨은 이것을 신약성서 중 바울의 기록에서 발견한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27)
인간이 존재의 궁극적 기반 위에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존재의 기반과 인간이 같지는 않다. 초월은 인간의 근거이지만 또한 인간을 넘어서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성도'를 '성령'이 연결한다고 말했다. 로빈슨은 이에 착념하여 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영'은 우리의 개별적인 존재의 깊이와 신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무궁한 심연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이 인간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인간에게 가깝다는 것, 그는 초월자이시나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는 것, 이것은 역설인데, 이것에 관하여는 로빈슨의 표현처럼 "역설적인 논법으로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애초부터 인간의 인식능력이나 논리력은 한계 안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우리 한계를 넘어 있는 초월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 역설일 수도 있다.
초자연적 하나님과 초월의 하나님을 섬세하게 구별해내는 일의 종착점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부정이 아니다. 초자연적 하나님 표상에 갇혀 있는 신 이해를 해방하는 것이다. 이 해방은 신의 해방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해방이다. 예컨대 한 사람의 신앙이 초자연적 능력만을 '구하는' 신앙으로부터 늘 우리 가운데 존재의 근거로 계시고 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 하나를 남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시작점인 예수에 대한 이해의 재고이다. 교회의 일반적인 예수 이해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 '신이 육화되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표현들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는 초자연적인 존재이고, 초자연적인 일들을 하고 초자연적인 퇴장을 하였다고 통상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가 '초자연적' 표현을 걷어낸다면, 어떤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③번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글쓴이 소개:
종교철학을 공부하고 Ph.D를 받았다.
*책/논문에서 직접 인용한 어구, 문장은 큰따옴표(", ")로 표시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