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민족 이야기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시편 20편 9절)
한국의 개신교는 19세기 후반인 1879년에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형태로 이 땅에 생겨났습니다. 이때는 우리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참 위태로웠습니다. 민족 내부적으로는 나라 안의 오랜 모순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쌓이고 쌓여 그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민족 밖 국제적으로는 산업혁명과 과학혁명과 정치혁명까지 두루 맛본 서양 제국주의 세력들 및 어느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이 그들 나라의 국가적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고 손에 넣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 민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를 공부하면서 흔히 나누는 주제들 가운데, ‘이 시기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하는 질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대부분의 한국교회사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계층상 하류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개인과 가정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신분의 상승을 추구하려는 이유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계층상 상류에 속하는 사람일수록 민족의 자주독립과 번영을 위해 도움을 받으려는 애국적 뜻을 가지고 기독교에 귀의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시대정황에서 볼 때, 개인과 가정의 하루하루 삶이 불안정한 계층들과, 개인의 삶보다는 민족의 내일이 더 걱정될 수밖에 없는 계층은 분명 삶의 규모나 내용이 달랐을 것이기에, 위의 결론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래도 끝까지 삶의 터전에 남아 고향을 지키며 민족의 운명과 자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로 여긴 사람들은 상류계층보다는 오히려 이름 없는 평민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개신교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한국개신교는 그 출발부터 민족의 종교였습니다. 초기 ‘자생적 신앙공동체’의 성격도 그렇지만, 그 시대에 이 민족이 마주 대하고 있는 운명 자체가 신앙인들로 하여금 민족의 운명과 자신을 하나로 여기도록 했습니다. 아직은 조선시대 봉건적 사고의 틀을 깨뜨려 벗어 버릴 수 없던 그들은, 왕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동일시했고, 그렇게 자신들의 민족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1986년 7월의 23~24일자 <독립신문>에는 기독교인들이 지어 부르고 있던 ‘애국가’가 실렸습니다. 옛글 원문의 일부를 그대로 옮기고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의 해석을 달아봅니다(편집자-옛글 표기가 안 되어 해석만 올립니다).
하나님께 성심기도 나라태평과 백성평안을
임금봉축 정부사랑 학생 병사 순검사랑
사람마다 사랑과 자비품어 공평정직 힘을 쓰세
육신세상 있을 때에 나라태평이 제일 좋다
국기잡고 맹세하여 대군주의 덕을 돕자
이처럼 애국가를 지어 부르던 한국 기독교인들은 더 나아가 대나무 끝에 국기를 달아 자신의 집이나 교회에 세워놓았습니다. 또한 1896년 9월 2일 탄신일을 맞아 교회가 연합으로 축하식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날의 일들을 지켜본 <독립신문>은 이렇게 모임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 말체로 옮깁니다.
서울 예수교회 교인들이 대군주 탄신 경축회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약 천 명이 모여 애국가를 부르는데, 대군주 폐하의 성체 안강하심과 조선 인민의 부강함을 축원하고 전국 인민이 한마음 협력하여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여 아무쪼록 조선이 자주 독립이 되고 인민이 타국 인민과 같이 세상에 대접을 받고 학문과 재능이 늘며, ... 나라 명예와 영광을 다른 일보다 먼저 생각하고 모두 하나님께 축원하되, 조선을 불쌍히 여기사 세계 각국과 같이 복을 받게 도와주소서 하고...
이런 일들은 분명 선교사들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가진 가장 흥미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애국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애국심이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한국교회만 유난히 애국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삶과 하나로 여기곤 했던 이 나라 백성들이, 다시금 민족이 몹시 곤란에 빠진 현실에서 자신들의 애국심을 표현할 가장 큰 통로를 한국교회에서 찾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동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로마서 9장 3절)
1900년대에 들어서 한국교회의 애국심은 한편으로 구체적인 항일 독립투쟁의 성격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가 여럿이어서 어느 나라가 적이고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도움이 될지를 놓고 제 정파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어느 나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의라는 뚜렷한 적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무기를 들고 일어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제의 한국 침략의도가 더욱 노골화되자 한국교회의 저항도 더욱 구체적이고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저항은 먼저 서울과 지방에서 여러 차례 개최된 구국 기도회를 통해 표출되었습니다. 그해 11월 상동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개최된 구국기도회는 민족을 향한 한국교회의 열망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의 기도문을 통해 당시 한국교회의 마음을 읽어봅시다. 오늘의 말체로 옮겼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 한국이 죄악으로 심윤(沈淪)에 들었으매, 오직 하나님밖에 빌데 없어 우리가 일시에 기도하오니, 한국을 불쌍히 여기사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다니엘의 자기 나라를 위하여 간구함을 들으심같이 한국을 구원하사 전국 인민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다 천국백성이 되어,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교회 기도회가 그랬듯이 이 구국기도회 역시 일주일간 계속되었고, 참여한 인원 역시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일반인들까지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국 기도회들이 1903년에 시작되어 1907년에 그 절정에 도달한 신앙대부흥운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위의 기도문을 보면, 신앙대부흥운동의 두 가지 축인 ‘회개기도운동’과 ‘성경공부운동’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말씀에 따른 구체적인 적용이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부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운동이 가져다 준 한국교회의 몰역사적, 비정치적 특성이 주로 거론되곤 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앙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이전의 민족교회적인 특성이 제거되고 초월적 내세 지향적 신앙양태가 형성되어 민족이 당면한 문제를 외면하게 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제기는 비중 있는 한국교회사 서적들이나 학자들이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이어서 대부분의 한국교회에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져 있는 실정입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가진 역사적 모순이 있다고 한다면, 그 원인은 단연 이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의 몰역사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논리는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일반에도 마치 절대불변의 사실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100주년 되는 2007년 들어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에 대한 평가가 여러 교단들과 한국교회역사 관련 연구소들에서 다양한 학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평가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경향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이던 대대적인 100주년 행사를 배려한 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더욱 밝혀지면서 그런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상쇄시켰다고 봅니다. 정말로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이 이후 한국교회를 몰역사적이고 비정치적인 교회로 만들었느냐 하는 부분은 꼭 짚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은 선교사와 한국기독교인, 신자와 불신자, 남녀노소, 신학과 교파의 차이를 불문하고 일어났습니다. 말씀과 참회에 따른 영적 각성은 한국인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가정적인 죄 문제까지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한국인들의 죄 인식은,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요구했듯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3:7~8)를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맺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 신앙대부흥운동을 우리는 한편 한국사회의 ‘집단적 회심운동’ 또는 ‘집단적 도덕갱신운동’으로도 규정할 수 있습니다.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은 마치 한국교회사의 용광로와 같아서 이전의 모든 사건이 이 속으로 들어와 새롭게 정련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907년 이후의 한국교회가 민족교회로서의 옛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교회가 민족의 문제에 어떤 식으로 응답해 왔는지를 살펴보면 보다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다양한 신앙과 다양한 증언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장 11~12절)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을 겪으며 그 목격자들이었던 선교사들 가운데는 이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가 민족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눈을 돌려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한국사회가 복음화 되는 길로 가게 되길 바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선교사들에게는 한국이 자주독립 국가여야 한다는 사실과 한국이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의식은 분명히 선교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사의식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처음부터 그 두 가지 사실은 따로 떼어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한국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문제와 ‘민족이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문제 사이의 관계를 보다 다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결론은 식민지 시기에 한국교회가 일제의 억압에 반응하는 항일운동의 다양한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그 다양한 방식이라면, 우선 기존의 무장독립투쟁 방식에서부터 교육운동, 독립운동, 문화운동, 성서운동, 부흥운동, 저항문학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그 시기적으로도 일제 식민지 전 시기에 두루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그 다양한 항일운동을 민족운동이라는 틀에서 시기별로 살펴봅니다.
먼저 무장독립투쟁으로는 가톨릭 신자인 안중근과 함께 일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나섰던 감리교 청년 우덕순의 투쟁을 들 수 있습니다. 1909년에 그가 안중근과 함께 거사 직전에 하얼빈에서 남긴 민요 형태의 시조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체로 옮깁니다.
만낫도다 만낫도다 원수너를 만낫도다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중략)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오호간악 이노적아 아등국민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중략)
너뿐인줄 아지마라 너의동포 오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대로
내손으로 죽이리라
우리 중에 ‘이 글은 도저히 기독교인이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고 할 분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그 시대 속에서 표출한 민족의식의 한 양태라는 점입니다.
1910년대 고국을 떠나 타향에서 민족의 현실을 애달파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도 있었습니다.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일제에 빼앗기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북간도로 간 한국기독교인들은, 그곳에 공동체와 학교를 세우고, 역사과목과 함께 민족의 포부와 정서를 기르는 노래를 지어 가르쳐 불렀습니다. 일종의 항일 교육운동인 셈입니다. 다음은 1913년 북간도의 학생들에게 널리 퍼져있던 노래 중에 한 대목입니다.
무쇠 골격 돌 근육 청년남아야
황황한 대한혼 발휘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나라에
청년의 생활시대 다달았네
만인 대적 연습하여
후일 전공 세우세
1913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은 한국교회에게도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3·1운동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 일 때문에 이후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하는 것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만 3·1운동 민족대표 중에 한 사람이었던 장로교 김병조 목사가 쓴 ‘우리 한국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을 소개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오늘 말체로 해설된 글을 옮깁니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고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많은 백성들이 세상을 경계하는 말이 저절로 소리가 들리니 자태를 뽐내며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이 활발한 때문이고 열렬한 만세 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이 다시 진동하는도다. (중략) 어른은 독립을 위해 피를 바쳐 죽는 것이 옳으며, 늙은이는 독립가를 함께 부르며, 부녀자들은 독립심에 목숨을 맹세하며, 만입을 한말로 개가를 소리 높여 부를지어다.
이 글은 3·1운동 당시 김병조 목사가 평북 일대를 순회하면서, 3·1운동의 발발 소식을 전하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성 배포했던 격문입니다.
3·1운동 이후 나타난 민족운동의 또 다른 양태는 ‘물산장려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조만식, 김동원, 이승훈 씨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민족의 앞날을 대비하여 일으킨 일종의 문화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주요내용은 토산품 애용운동, 일본 따라하기 배척운동, 외래상품 배척운동이었고, 장로교의 농촌운동도 기독교 민족운동 차원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조만식 선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람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라. 둘째 옳은 사람이 되어라. 그러자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 셋째 학문을 잘해서 남에게 뒤지지 말라. 기독교 청년들아! 최고의 이상을 가져라. 기도하여라. 염원하여라. 그리고 활동할 것이다. 오직 거기에 의기와 활력을 얻을 것이다. 농촌으로 돌아가라. 겨레의 8할이 농민이니 이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한다면 그것은 곧 전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동의 작업을 하여 이 백성에게 봉사하라. 이 백성에게 봉사할 것을 기억한다면 조선기독교회는 물론 이 백성의 부흥이 성취될 것이다.
1920년대 김교신의 <성서조선> 잡지 발생도 한국기독교 민족운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족 조선의 희망을 성서에서 찾았던 것이지요.
우리가 그를 위하여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 성서의 연구이다. 옛날 것 같으나 영원히 새 것인 성서의 진리를 그에게 제공하려 함이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가득 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재림의 신앙이 조선 사람의 마음을 잡게 함이다. 사람의 생명 중추인 영혼의 각성이다. 천상에 민적을 옮기게 함이다. 독일을 암흑에서 꺼낸 루터의 믿음, 영국을 멸망에서 구제한 크롬웰의 신뢰,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의 신앙을 조선도 갖게 함이다.
1920년대에서 30년대의 길선주와 김익두 목사로 대표되는 부흥회 역시 한국교회의 민족운동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는 요한계시록 강해가 그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가 요한계시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3·1운동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옥고를 치르면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옛날 로마제국의 박해로 절망 가운데 신음하던 초대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요 암호입니다. 길선주 목사 역시 민족의 절망 가운데서 계시록을 통해 희망을 보았고, 그의 설교를 듣는 한국교회 역시 계시록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들의 삶을 바로잡아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간파한 일제는 한국교회가 계시록을 읽지 못하도록 철저히 금지시켰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특징은 이적 집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적 집회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듯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비이성적 행위가 동원되고 교인들의 삶을 왜곡시키는 그런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진보 신학자였던 김재준 박사가 그의 부흥회를 통해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이 땅에 가장 낮은 자들의 현실이 질병이요 귀신들림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도록 도왔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일제의 만행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교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말년인 1942년에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구령이 내려지고 목사직을 박탈당했으며, 자신의 주거를 제한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때 이 민족의 아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슬프다 이 강산 금잔디 옥동산에
이름모를 들짐승이 짓밟아 버리니
어찌 울지 않고 볼소냐
이리뛰로 저리뛰며 좋은 것은 다 짓밟으니
그 중에 한국교회 상처가 크도다
목사, 장로, 교인들 신앙이 있는 사람이면
죽이고, 내쫓고, 폐인을 만들었으니(중략)
1930년대와 1940년대를 거쳐 활동한 윤동주의 저항문학도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중요한 한 축입니다. 그의 시 가운데 “태초의 아침”(1941년)은 일제로부터 민족이 해방되는 날에 대한 기대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표현하고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십자가”라는 시는, 고통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민족의 아픔과 동일선상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태초의 아침”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前)날 밤에
그 전(前)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한국교회 항일운동의 결정체는 아무래도 신사참배반대운동일 것입니다. 일제가 패망하는 그 날까지 한국교회는 항일저항운동을 그 시기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계승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이제 그 마지막 양태가 1940년대의 신사참배 반대였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반대로 고난의 길을 걸을 때, 국내에는 다른 뚜렷한 항일운동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반대는 목숨을 건 공개적인 항일운동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저항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반대 운동은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으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최후의 유언 설교라 할 수 있는 “5종목의 나의 기원”(1940. 10) 마지막 부분을 옮겨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길에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하게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집단적 저항운동으로는 경북 청도와 영천지역에서 결성된 ‘시온산 제국’ 운동이 있습니다.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정치가 극에 달하던 1940년대 초에 박동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시온산 제국’ 운동은 ‘땅에 있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하나님 나라의 제국’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온산 제국’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씩,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산속 깊은 마을 교회에 모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종말론적 신앙’으로 그들의 삶을 다잡아 갔습니다. 이 운동을 이끌어 갔던 박동기 전도사는 1945년 6월 8일, 자신을 심문하던 일제 총독부 관원 앞에서 자신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증언하였는데,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첫째, 일본제국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영을 받은 가짜 제국이므로 곧 멸망합니다. ... 셋째, 신사참배, 동방요배, 신붕(神棚)설치,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강요하는 것은 벌을 받을 죄이며 천황은 신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람을 신이라고 주장하면 또한 벌을 받습니다. ... 다섯째, 이러한 마귀사단의 제국은 망합니다. 금년 8월에는 전쟁이 끝나고 조선이 해방될 것입니다.”
이 ‘시온산 제국’ 운동은 식민지 말기에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집단적으로 저항한 거의 유일한 실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한국교회 초기의 민족운동이 1907년 신앙대부흥운동이라는 용광로를 거친 이후 일제 식민지 기간에 어떤 다양한 양태의 민족운동으로 드러나게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은 일제 식민지 기간에 펼쳐진 한국교회의 다양한 민족운동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기본 토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항일 무장투쟁이 우덕순에서 시작하여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을 거쳐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주기철 목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항일운동은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다양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글쓴이 : 정성한(영남신학대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