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81기 동문들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일어난 명성교회 세습에 대해 통분히 여기며 우리의 입장을 천명한다.
"여전히 포로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세상의 희망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운 비전을 가슴에 품는 순간 절망의 장벽에 틈이 생기고 그 속으로 하늘의 빛이 새어 들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과 불통의 세상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장벽이 무너진 세상을 만들라는 소명 앞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만 신앙인이 아닙니까? 직분만 거창하지 않습니까? 진리를 외면하고 말만 번지르르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경계선을 넘어 낮고 천한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며 모든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이렇게 경계선 밖에 있는 이들을 품어준 것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땅의 갑들은 많은 사람들을 경계선 밖으로 몰아냈으나 우리는 그들을 경계선 안으로 끌어 들여 함께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은사가 마치 누군가의 소유물이어서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깊고 부요한지를 밝힘으로 교인들을 그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런 열정의 배후에 있는 것이 바로 '빚진 자 의식'입니다.
" 오늘은 마르틴 루터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가 당시 가장 고민했던 문제는 첫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고 둘째는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믿고 따라야 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그 분을 섬기고 따르는 교회의 현실 사이의 깊은 괴리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중심은 교황과 교황청이었는데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깡그리 무너뜨리고 왜곡된 길로 가면서 교황과 가톨릭교회는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한 사도들과 성도들의 기록입니다. 이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날로날로 늘어났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전개를 미리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대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과 성도들이 예루살렘à 사마리아à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전진했습니다
"얼마 전 아름다운 원로들과 함께 보았던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기억납니다. 일본군에 의해 성 노예로 살아야 했던 김옥분 할머니는 자기의 아픔과 과거를 숨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까칠한 사람입니다. 소소한 잘못도 다 시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평생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친구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친구가 못 다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 하원 청문회의 증언대에 서기로 작정합니다."
어느 날, 오후 세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중입니다. 그 시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떼메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장애가 있는 사람을 날마다 미문, '아름다운 문' 곁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 장애인은 이중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가 있으면서 사람들의 돈벌이에 이용 당하는 가련한 처지입니다.
"에덴 이후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상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인간은 그렇기에 제도나 국가를 통해 행동을 제약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국가도 온전한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수십만의 촛불로 정권에 대항하던 거리에서도, 역사에 남을 평화적 탄핵을 이뤄낼 때도, 적폐를 청산하는 선거 때도, 그리고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꿈꾸는 오늘의 현장에서도 정작 개신교회의 모습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찾습니다.
"최근에 미얀마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방글라데시에 유입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국민 다수가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설 자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종교간의 갈등이 삶의 자리를 박탈하는 폭력으로 번진 것입니다. 종교적 차이 혹은 문화적 차이가 인간성을 부정하는 형국입니다."
"인간영혼 깊은 곳에 죽지않고 영원히 오래오래 살고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하고 경이로운 창조세계 안에 인간 속사람 까지를 완전 무화시켜버리는 죽음이 권세를 휘두르는 것은 '정상태'가 아니라는 영혼의 저항과 절규가 있습니다. 속사람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 주권, 자비의 속성과도 어울리지 않는 비정상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합니다. 인간은 세 번째 해방 곧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기까지 온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가 지난달 28일 성당 부설 유치원에서 있었던 수녀 원장 원생 폭행 사건에 대해 사죄의 글을 냈습니다. 아래는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사죄의 글 전문.
증오와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오늘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본문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에서 정신분석학과 신학 사이 학제간 연구를 주도했던 로버트 무어 교수의 자살 사건을 언급하며 이 글은 자살에 관한 신학적 단상을 전개한다. 자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시각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반성하며 자살에 대한 신학적 응답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 중 하나다. 본 글은 제3시대 웹진에 실린 글이다.
[시와 묵상] 새벽 편지"시인(1954- )은 밤과 아침의 경계에 서서 "존재의 순간"(the moment of being)을 경험한다. 그 순간에는 비존재(non-being)의 장막이 걷히고 존재의 영역인 빛과 생명과 깨달음이.. |